예감 지은이 : 박완서 외 출판사 : 정민 새가 난다. 쉽고 편한 먹이가 도처에 널렸음에도 허기를 참고 산다. 세속의 꿈도 사랑도, 부귀 공명의 봄바람도 아랑곳없이 난다. 아이와 남편을 겨드랑이에 낀 채 높이 더 높이 날아 새가 닿는 곳은 어디일까. 이웃에의 가없는 위로와 사랑일까. 치열 한 구도 정신이 흘린 자기 확인일까. 끝내는 휴지처럼 잊혀질 소설 몇 권일까. 아니면 아름답지도 고결하지도 못할 이름 석 자 모래펄에 돋을새김하고픈 허허 로운 욕망 탓일까. 역사라는, 다수라는 이름의 수레바퀴가 지날 때마다 으깨어지는 삶이 있다. 노 동자와 실향민과 운동권과 장애자와, 그보다 더 숱한 소시민들의 생살 아린 고 통이 있다. 이 시대의 전염병균 득실거리는 상처를 햇빛 아래 드러내는 작업, 곪 아서 진물 나는 상처를 따스한 혀로 핥는 작업은 늘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도 더럽다고 도망가거나 무릎 꿇지 않는다. 맑고 요요로운 새벽이 오기까지 는 참아야 한다고 은밀히 서로의 등을 토닥인다. 쓴다는 게 뭔지, 정말 뭔지 모름에도 우리는 쓴다. 다시 원고지 위에 놓인 작 두를 탄다. 내림굿에 실패한 병든 무당의 꼴을 보이게 될지라도 쓸 수밖에 없는 것처럼. 1997년 2월 여성동아 문우회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지은이 박완서 우리 집 오동나무 이층장 위칸에는 남자 모자가 여덟 개나 들어 있다. 아래 칸은 비어 있다. 그 장 위에는 한 남자의 독사진이 놓여 있다. 미소 짓고 있는 사진이지만 쓸쓸하고 복잡한 미소다. 때에 따라서는 우는 것처럼 보일 적도 있 다. 원래 그 사진은 독사진이 아니었고, 웃음도 그렇게 쓸쓸하고 복잡하지 않았 다. 사진으로 한 번 찍힌 표정이 때에 따라 변한다면 정신이 살짝 어떻게 된 사 람의 수작 같지만 정말이다. 그 사진을 찍을 때 그는 건강하고 기쁨에 넘쳐 있 었다. 그날은 그의 환갑날이었고, 우리의 아들 딸 손자들이 하나도 안 빠지고 다 모여 잔치를 벌이며 즐거워했으니까. 카메라 사진을 수없이 찍었는데도 사진관 에서 나온 사진사가 우리 부부를 중심으로 가족과 일가 친척을 다 불러 모아 단 체 사진을 찍고, 가족 사진 따로 찍고,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만 앉혀 놓고 찍었 다. 사진사가 "김치" 하는 대신 "자아, 찍습니다. 입 좀 다무세요. 너무 웃으면 첫딸 낳습니다." 하고 농지거리를 할 정도로 우리는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우리 가 그날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던 건 환갑 잔치 때문이 아니라,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몽매함 때문이었다. 그날 우리 부부가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 중에서 그를 혼자 떼어 내어 독사진 을 만들기는 그날로부터 삼 년도 안 돼서 였다. 영정으로 쓸려면 독사진이라야 하는데 그에겐 마땅한 독사진이 없었다. 나는 그의 영정을 그가 죽기 전에 만들 었다. 폐암이 뇌로 전이되고 나서 그의 목숨은 무거운 추를 단 끈처럼 무서운 속도로 죽음의 나락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나는 그가 곧 죽게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거짓 희망으로 그를 들볶았다. 병원 약과 방사선 치료만으로도 지 칠 대로 지친 그에게 좋다는 한약 생약을 다 실험하려 들었다. 탕약, 환약, 인삼, 영지, 어성초, 알로에 등 온갖 채소와 약초의 녹즙을 그의 입에 처넣으면서 꼭 고쳐 놓고 말 테니 두고보라고 장담을 하곤 했다.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한의사 한 분이 중국에서 구한 희귀한 비방대로 만들었다는 환약은 크기가 꼭 수수알만 한데 한 알에 만 원씩 하는 고가품이었다. 값보다는 복용 방법이 문제였다. 그 작은 알약은 그냥 삼키면 약효가 반감되니까 꼭 혓바닥 위에 얹어 놓고 반쯤 녹 을 때를 기다렸다가 침으로 삼키라고 했다. 메마르고 백태가 앉은 혓바닥 위에 서 아무리 작은 환약이라지만 쉬 녹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약 먹는 걸 제일 싫어했다. 그럼 난 무서운 얼굴로 그 약이 얼마나 신효한 약인지를 강조하 면서 그를 윽박질렀다. 나도 믿지 않는 걸 믿게 하려니 무서운 얼굴을 할 수밖 에 없었다. 매일 밤 그의 손을 꼬옥 붙들고 잤다. 행여 내가 잠든 사이에라도 당 신의 영혼이 육신을 훌쩍 떠나가지 않도록 지키고 있다는 몸짓이었고, 그도 그 걸 알아주길 바랐다. 이렇게 결코 그를 혼자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처럼 굴면서 나는 뒤로 조금 씩 그의 장사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와 나의 교적이 있는 본당 연령회장 댁 전화번호를 비롯해서 오랫동안 격조했지만 알려야 할 친척들의 연락처까지 수소문해서 메모해 놓는가 하면, 임종의 장소를 집으로 할 것인가 병원으로 할 것인가를 자식들과 수군수군 의논하기도 했다. 그리고 딸을 시켜 환갑 때 찍은 사진 중 부부의 사진을 사진관에 보내 아버지만 홀로 떼어 내어 영정으로 쓰기 에 적당한 크기로 확대해 오도록 했다. 넉넉한 사랑을 받으며 나이 먹은 티가 역력한, 흡족하고 평화로운 미소가 마음에 들어 골라 집은 사진이었다. 그러나 미리 영정 사진을 받아 보고 나는 그만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가슴이 뜨끔하고 말았다. 장식 없는 나무틀 속에 확대된 그의 미소는 암만해도 나하고 나란히 앉아 찍은 환갑사진 속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내가 끊임없이 불어넣은 거짓 희망에 속아 주고 있을 뿐 결코 정말 속고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 았다. 엷은 미소가 감도는 눈매는 남의 속을 지그시 들여다보면서도 노염을 타 거나 무안을 주려는 게 아니라 연민으로 감싸는 쓸쓸함 때문에 우는 것 같기도 하고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되레 나를 위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여덟 개나 되는 모자는 다 그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 일 년 동안에 사 모은 것 이다. 모자가 유행하는 시대도 아닌데 일 년 동안에 모자를 여덟 개씩이나 사다 니, 누가 들으면 그가 몸치장 따위에 취미가 각별한 멋쟁이 신사였다고 여길지 도 모르지만 전혀 아니다. 나는 그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어쩌면 이렇게 단 한 가지도 값나가는 게 없을까 놀라고 민망해 한 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을 비롯해서 가깝게 지내던 조카들은 그가 쓰던 걸 뭐든지 한 가지씩이라 도 얻어 갖길 원했다. 다들 그런 게 아쉬운 처지가 아닌데도 그런다는 건 그 뜻 이 소유나 쓸모에 있지 않고 애장에 있으려니 싶어 나는 목이 메이게 감격을 했 다. 크게 성공하거나 성취한 건 없어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는 증거 같아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의 유품을 공평하게 노느매기했다. 그러 나 모자는 다 내가 가졌다. 그건 누가 달래지도 않았지만 달라고 해도 안 주었 을 것이다. 마지막 일 년은 참으로 아까운 시절이었다. 죽을 날을 정리해 놓은 사람과의 나날의 아까움을 무엇에 비길까. 애를 끓는 듯한 애달픔이었다. 세월의 흐름이 빠른 물살처럼 느껴지고 자주자주 시간이 빛났다. 아까운 시간의 빛남은 행복하 고는 달랐다. 여덟 개의 모자에는 그 빛나는 시간의 추억이 있다. 나만이 아는. 마지막 일 년은 새벽잠을 설치게 하는 그의 기침 소리로부터 비롯됐다. 담배 를 워낙 즐기는 그는 새벽 참에 쿨룩거리길 잘했다. 그러나 참아도 될 걸 가장 이 일어났다는 표시로 일부러 소리를 내보는 것 같은 약간의 허세스러운 것이었 다. 나는 어려서부터 기침과 기침을 동일시하는 말버릇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린 날 사랑에서 할아버지의 엄엄한 기침 소리가 들리면 어머니는 할아버지 기침하 셨구나, 하면서 나에겐 양칫물과 소금 그릇을 들리고 당신은 세숫대야를 들고 종종걸음을 치셨다. 남자들이란 나이 먹어 아침잠이 줄면 으레 일어났다는 표시 로 기침을 하는 거려니 예사롭게 듣던 소리가 어느 날부턴지 문득 귀에 거슬렸 다. 일부러 내는 게 아니라 억지로 참으려 해도 복받치는 소리로 들렸다. 그러나 그는 괜찮다고 했다. 새벽 담배가 안 좋은가 봐, 안 피우면 괜찮아지겠지, 하는 정도로 눙치려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각 증상이 전혀 없고 기침도 새벽녘의 잠시 동안뿐이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병원에 가 봐야 한다고 우겼고, 그가 마지 못해 따라나선 게 기침 소리에 이상한 걸 감지한 지 불과 사나흘 만이었건만 X 선 소견만으로도 폐암이 거의 확실하다는 진단을 받았고 당장 입원해서 정밀 검 사한 결과도 역시 틀림이 없었다. 아주 초기니까 항암제로 치료가 가능하다고 자식들은 나를 위로했다. 그러나 나는 그 전에 벌써 자식들이 전화로 수군대는 소리를 엿듣고 말았다. '스몰 셀', '엑스텐디드'. 내 짧은 영어 실력으로 어찌하여 그 뜻은 그다지도 명료했던지. 특히 'EXTENDED'는 정확한 스펠과 함께 그 뜻 이, 가슴속에서 차가운 얼음 조각이 명치로 내려앉듯이 통로가 분명한 차가움으 로 느껴져 와 나는 그만 전화기를 놓치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속의 차디찬 이물감은 차차 손끝 발끝으로 시리게 퍼졌다. 스몰 셀이란, 폐에 생기는 암의 종 류 중의 하나고 문자 그대로 작은 암세포가 고루 퍼지는 소세포암을 이름인데 진행이 빠르고 초기에도 수술이 불가능한 대신 항암제는 아주 잘 듣는 암이라고 했다. 아주 잘 들으면 완치될 수 있단 소리냐고, 나는 주치의와 역시 의사인 아 들과 사위에게 따로따로 추궁을 했고, 그러문요, 그러문요, 하는 그들의 선선한 대답을 얻어냈지만 믿지 않았다. 그의 새벽 기침에서 여느 때와 다른 불길한 울 림을 가려내고부터 갑자기 민감해진 눈치로 자식들의 선선한 대답이 거짓임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스몰 셀이 아니라 엑스텐디드가 문제였다. 주치의 한테서도 자식들한테서도 그 이상 알아낼 수 없게 되자 나는 집에 있는 의학 책 들을 들들 뒤져 그 상태의 폐암이면 적절한 치료를 받아도 팔 개월 내지 일 년 밖에 못 산다는 걸 알아냈다. 이 년 이상 생존율은 2.5%, 이왕이면 완치율이라고 할 것이지 인색하게 이 년 이상 생존율은 또 뭐람.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기보다 는 자기들 책잡히지 않을 것만 우선으로 한 의사들의 야박한 말버릇이었다. 항암제 주사는 바늘이 꽂힐 때 한 번 따끔하고 마는 보통 주사하고 달랐다. 꼬박 사흘 동안 입원해서 수도 없는 주사를 시간과 순서에 따라 번갈아 맞아야 하는 거창한 주사였다. 하룻밤 사이에 맞아야 할 주사약만 해도 바퀴 달린 테이 블에 하나 가득 넘쳤고, 그 각기 다르면서도 위세 등등한 모습은 마치 하룻밤 동안에 쏘아 대야 할 대포알을 방불케 했다. 아닌게아니라 투병은 곧 전쟁이었 다. 항암제가 몸 안으로 흘러들면 환자는 곧 오장육부까지 쏟아 낼 것처럼 심한 구역질을 시작했고, 항암제와 함께 빠른 속도로 주입되는 링거 때문에 변기를 줄창 대고 있어야 할만큼 오줌 마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놈의 대포알이 암을 명중시키기 전에 사람 먼저 잡을 모양이었다. 그러나 하룻밤만 악전 고투를 치 르고 나면 다음 이틀은 수월했다. 더욱 신기한 건 그 첫 번째 항암제 주사로 거 짓말처럼 말끔히 새벽 기침을 안 하게 된 거였다. 암이란 자각 증상이 없어졌다 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누누이 들어서 알고 있으련만도 그 악명에 비해서는 너무 쉽게 기가 꺾인다 싶었다. 앞으로도 삼 주에 한 번씩 그런 치료 를 언제까지나, 암이 이기든 인체가 이기든 결판이 날 때까지 받아야 했으므로 그의 퇴원은 재진과 재입원이 예약된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럼으로 해서 더욱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건강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온갖 자유가 보장 된 바깥 세상은 그에게 황홀했으리라. 그는 어디 가서 맛있는 걸 사 먹자고 했 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급한 마음에 우리는 채 그 동네도 벗어나지도 못하고 동숭동 일대에 널린 음식점 중에 하나를 골라잡았다. 그는 돌솥비빔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내가 시킨 갈비탕에서 갈비까지 한 대 건져다 먹었다. 항암제를 맞으면 맞는 동안은 물론 그 후 며칠간은 속이 느글거려 아무것도 못 먹는다. 항암제를 맞으면서 체력을 유지하려면 그저 잘 먹는 게 수다, 항암제 는 또 백혈구를 감소시켜 그로 인하여 주사를 못 맞게 되는 수가 곧 생긴다, 주 사를 맞게 되면 끝장이다, 백혈구 생산을 위해서도 잘먹는 수밖에 없다. 그가 입 원해 있는 동안 딴 환자 가족으로부터 수없이 얻어들은 정보는 대강 그러했다. 도대체 어쩌란 소린지. 고약한 병답게 진퇴양난의 섭생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의 왕성한 식욕을 보자 나는 그가 그 중의 한 고비를 거뜬히 뛰어넘은 것 같아 마음이 놓이고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는 식당을 택시도 잡기 전에 먹은 것을 길바닥에 다 토해 놓고 말았다. 그가 토악질을 하는 동안 나는 그의 괴로움보 다는 길가는 사람에게 미안하고 창피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자기 몸 상태에 대 해 그 정도도 모르고 마구 먹어댄 그의 미련함이 싫은 생각도 났다. 토하고 난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무실에 들렀다 집에 갈 테니 나 혼자 가라고 했다. "당신 미쳤어?" 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 치는 소리로 말했다. 투병 초긴데 벌써 이 상하게 굴려는 것 같아 노상의 토악질보다 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내버려둬, 나 하고 싶은 대로...." 그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슬프고도 단호한 느낌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길에서 놓아주었다. 그가 가야 한다는 사무실은 실상 별것도 아닌 데 였다. 은퇴한 노인들 몇이서 공동으로 경비를 부담하고 유지하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그 동안 못 나갔다고 밀린 일이 있을 것도 아니겠다, 퇴원하자마자 얼 굴을 내밀어야 할 까닭이 없었다. 나는 그가 이상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 도 암환자 가족들로부터 들은 이야긴데, 가장 못할 노릇은 육신이 손을 들기 전 에 정신이 먼저 망가지는 걸 지켜보는 고통이라고 했다. 혼자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입이 타게 조바심하며 저녁 준비를 했다. 손이 예 가 있고 제 가 있고 도무지 내 정신이 아니었다. 부엌 조리대에선 작은 창을 통 해 버스 정거장을 내다볼 수가 있었다. 저녁 노을 속으로 그가 돌아오고 있었다. 손엔 이 홉들이 소주병을 달랑 들고. 그건 그의 몸에 아무 이상이 없던 평상시 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은퇴하기 전이나, 후나, 예고하지 않고 늦는 일이 없 었고, 저녁 먹을 때에 한하여 이 홉들이 소주 삼분의 일내지 반 병 정도의 반주 습관이 있었다. 집에 소주가 남아 있는데 더 사 오는 일도, 없는데 안 사 오는 일도 없는 그였다. 어머, 소주가 떨어졌나 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맥없이 쉽게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그가 하고 싶어한 게 별게 아니라 보통 때처럼 구 는 거였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나는 그를 보통 때처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 눈엔 그의 모습이, 그의 존재가 시간과 마찰하면서 빛을 내는 것처럼 빛나 보였다. 나는 신혼 때처럼 가슴을 울렁이며 그를 마중했고, 그는 어디까지나 보 통 때처럼 저녁 반찬 뭐냐부터 묻고 씻는둥마는둥 밥상을 받고 소주 반 병을 아 껴 가며 마셨다. "담배를 끊으니까 술맛이 유별난데." "거봐요, 담배끊기 잘했지 뭐예요."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마치 술맛을 위해서 담배를 끊은 것처럼 굴었다. 그는 안주로 먹은 적지 않은 밥반찬도, 보통 때와 다름없이 맛있게 먹은 저녁밥 도 토하지 않았다. 잘 자고 기침 없이 깨어나 손수 커피 끓여 마시고 내 머리맡 에도 한 잔 갖다 놓았다. 제 시간에 버스 타고 출근했다가 제 시간에 버스 타고 돌아왔다.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너무 감지덕지해서 감히 입밖에 내서 말하기도 겁났다. 어느 날부터인지 그가 자고 일어난 자리에서 주워 모은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되었고, 그건 날로 늘어나 두 번째 항암 주사를 맞고 나서부터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 인체에서 가장 암세포와 닮은 세포가 머리카락 세포여서 항암제를 맞고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은 암이 그만큼 죽어 간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거와 마찬가지라고 이미 들어서 아는 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숱 많은 머리칼이 수시로 한 움큼씩 빠져 단시일 내에 아주 없어져가는 걸 지켜보는 마 음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이 우울하고 참담했다. 무성하던 머리칼이 한 오라기 도 안 남은 늙은 남자의 두상은 그 나이에 흔한 대머리하고는 또 달랐다. 대머 리는 보통 피부보다 더 유들유들 윤이 나 한 눈에 강인한 인상을 주지만 그의 머리칼 빠진 두상은 마치 머리칼이 귀하게 태어난 갓난아기의 두상처럼 피부가 희고 여려 보였다. 정말이지 크기만 좀 크다뿐 머리칼 귀한 갓난아이 두상과 다 를 게 하나도 없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대머리는 아니고 보오얀 솜털이 장차 머리카락이 될 희망이지만 그의 여려보이면서도 결코 근절되지 않는 솜털 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때부터 자식들이 아버지를 위해 모자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사 온 모자는 갈색 세무 캡이었다. 의외로 모자가 잘 어울렸다. 써 보기 전엔 형사 나 무슨 기관원이나 쓸 것 같은 모자여서 별로 탐탁지 않더니만 써 보니 십 년 은 젊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장난꾸러기처럼 보이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잠바엔 괜찮은데 신사복엔 암만해도 좀 어색했다. "왜 중절모로 사오잖구, 이왕이면 최고급으루다." 나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불평을 했다. 나는 그의 갓난아기처럼 애처로운 민둥 머리에다 최고의 사치를 시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식들은 내 말뜻을 알아들 은 것 같지 않았다. 지금은 중절모가 유행하는 시대가 아니다. 우리가 혼인할 때는 다들 지금보다 훨씬 못 살 때였고 게다가 전쟁 중이었는 데도 어른 남자가 출입할 때 모자는 필수적이었다. 문자 그대로 의관을 갖추지 않으면 행세할 수가 없었다. 염색한 군복을 입었으면 역 염색한 군모를 얹고 다 녔고, 두루마기엔 약간 찌그러진 듯한 중절모가 제격이었다. 혼인날을 받아 놓은 어느 화창한 봄날, 그가 양복을 맞추러 가는 데 같이 가 달라고 했다. 조선 호텔 앞에 있는 양복점이었는데도 환도 전의 적막하고 헐벗은 서울에서 그 집은 딴 세상처럼 으리으리해 보였다. 영국산 양복지가 첩첩이 나긋하고도 품위 있게 걸 려 있고, 같은 양복지로 빼 입은 지배인 역시 나긋하고도 품위가 있었다. 그는 그 비싼 양복을 두 벌이나 맞추었고, 나는 그를 위해 양복지를 고르면서 그가 부잔가 보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하고 이 년이나 넘게 연애를 했지만 한두 번 가본 집이 제 집이라는 것밖에는 그의 재산 정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궁금해하지도 않았으니까. 혼인할 남자가 부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과히 기 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간 서글프지가 않았다. 그가 무작정 들 뜨고 행복해 보이는 게 괜히 안돼서 였다. 내가 어느 날, 느닷없이 결혼할 남자가 생겼다고 했을 때, 식구들의 놀라움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아마 배신감도 섞인 분노가 아니었을까 싶 다. 그때까지 나는 식구들을 벌어 먹이는 입장이었다. 육이오 난리 통에 식구 한 둘쯤 잃지 않은 집이 어디 있을까마는 오빠가 비명에 가고 난 우리 집의 후유증 은 좀 유별났다. 오빠는 어머니에겐 하늘같은 외아들이었고, 올케에겐 신혼 삼 년째의 새신랑이었고, 연년생의 조카들에겐 생명만 주었을 뿐 낯도 익히기 전에 가 버린 무책임한 아빠였다. 그 일을 당했을 때, 어머니나 올케의 비총은 꼭 따 라 죽을 기세였다. 그래도 시일이 지나면 어린것들을 생각해서라도 살아 나갈 궁리를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성질이 모질지 못해 비록 스스로의 목숨 을 끊지는 못할 망정 살아갈 궁리를 할 의욕이 전혀 없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들이 따라 죽고 싶은 건 조금도 엄포나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난 그럴 수 없었다. 나 역시 그들 못지 않게 오빠를 사랑했지만 오빠를 따라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나는 순전히 내가 먹고살기 위해 폐허나 다름없는 황량하고 살벌한 최전방 도시에서 겁없이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요행히 미군 부대에 취직이 되어 얼떨결에 식구들을 부양하는 입장이 되었는데 그것도 해보 니 나쁘지 않았다. 특히 난리나던 해의 9월, 함포 사격과 무차별 폭격 중에 태어 나, 젖과 보살핌의 부족으로 사람 될 것 같지 않던 어린 조카가 우유를 실컷 먹 을 수 있게 되자 토실토실 살이 오르기 시작한 건 기쁨이자 보람이었다. 아기의 놀라운 생명력은, 무덤의 곁방살이인 양 살아 있는 건지 죽어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될 만큼 침체된 생활에 하루하루 생기를 불어넣었다. 식구들은 아기를 따라 웃기 시작했고 나에게 미안해 할 줄도 알게 되었다. 올케는 자신에게 살아보겠 다는 의욕이 생기자 딴 사람처럼 용감해졌다. 당시 부녀자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도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가 양공주들이 밀집해 있는 기지촌으로 옷가지 나 화장품 따위를 이고 다니며 파는 보따리 장수였는데 올케가 그걸 할 수 있으 리라고는 아무도 상상을 못했다. 증조모까지 생존해 계신 양가집 맏딸로, 여고 졸업 후 줄창 부모 슬하에서 엄한 훈도를 받다가 시집 온 올케는 어머니 마음엔 들었을지 모르지만 나 보기엔 여간 답답한 맹추가 아니었다. 그 시절의 기준으 로도 요샛세상에 저런 여자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얌전하기만 하던 올케가 어찌 해서 장사 중에서도 가장 쌍스러운 기지촌 보따리 장수 길을 트더니만 일 년 만 에 변두리 시장에 가겟터를 하나 얻을 만한 돈을 모았다. 올케의 자립 능력을 믿게 된 나는 그 가게가 개업할 무렵 내 혼인 얘기를 꺼냈다. 그때야말로 내가 집을 떠나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적기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식구들의 생 각은 달랐다. 올케가 그렇게 빨리 목돈을 모은 게 그 동안 내가 전적으로 식구 들을 먹여 살렸기 때문이란 걸 알아준 건 고마웠지만, 그래서 더욱 나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거였다. 조금만 더 같이 고생해 주면 살 만해 질 게 확실한데 그 동 안을 못 참고 시집을 가겠다니 괘씸하고 야속한 게 친정 식구들의 인지상정이자 욕심이었다. 생전 데리고 살 것도 아니면서 다만 때가 이르다는 식구들의 생각 과, 바로 이때다 싶은 내 생각과의 차이는 단지 시기의 문제에 불과하련만도 그 렇지가 않았다. 특히 어머니는 사사건건 사위 될 사람에 대해 트집을 잡고 싶어 했다. 당신도 외며느리 거느리고 살면서, 너만은 시집살이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그가 부모를 모셔야 하는 외아들인 걸 못마땅해하는 것까지는 그런 대로 이해가 됐지만, 그의 성이 벽성인 걸 가지고 너무 오래 탄식하고 얕잡는 데엔 정말 견 디기 어려웠다. "세상에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이라고, 헌다 헌 양반 중에서도 노론허구 아니 면 통혼을 안 하던 집안인데 아무리 쑥밭이 됐기로서니 백줴 상것한테 내 딸을 내주다니, 아이고 우세스러워." 이런 식이었다. 마침내 그를 집으로 데려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우리 식구들이 허세 부리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허락을 그닥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가 당해야 할 고비를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머니 는 우리 집에 어른 남자가 없다는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 외삼촌을 대기시켜 놓 고 있었다. 외삼촌은 평생 돈벌이라곤 안 해 보고 놀고 지낸 분인데 언변이 유 창하고 박식했으며, 특히 양반 족보에 통달했다. 내 꼬인 생각인지는 몰라도 신 랑감이 만의 하나라도 양반 행세를 하면 여지없이 폭로해 망신을 주려는 어머니 의 포석임이 분명했다. 사위 될 사람에 대한 기대나 호의는커녕 일말의 호기심 조차 없이 트집잡을 궁리만 하고 진을 치고 있는 식구들 사이로 그를 불러들여 야 하는 내 심정은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는 초대된 것만 좋은지 싱글벙글하면서 나타났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외삼촌은 "우리 집안으 로 말할 것 같으면...."을 서두로 우리가 얼마나 뼈대있는 집안이란 걸 늘어놓고 나서, 그의 지체를 캐묻기 전에 짐짓 난감하고도 동정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닥 오랫동안 외삼촌의 시험에 들지 않고, 선대가 종로에서 선전 을 하던 중인 집안이라고 그의 지체를 털어놓았다. 양반이 아니면 사람도 아니 라고 여기고 싶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중인이라고 말하는 그의 태도가 어쩌면 그렇게도 당당하고 떳떳한지 나는 속이 다 후련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확신이 잘 서지 않던 나의 선택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를 망신 주려던 외삼촌의 작전은 이렇게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러나 아직 마음을 놓을 단계는 아니었다. 그를 보내 놓고 나서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어머니가 외삼촌에게 물었다. "선전을 했다니, 그게 아전보담 좀 나은 벼슬인가? 못한 벼슬인가?" "누님도 참, 선전 시정의 비단 감듯하다는 속담도 못 들으셨수? 벼슬을 했단 소리가 아니라 포목전을 했단 소리예요." "그게 무슨 자랑이라구." "보아 하니 그 사람 그게 창피하다는 것도 모르는 눈칩디다." 어머니와 외삼촌은 이렇게 다시금 그를 깔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지만 형식 적으로라도 몇 마디쯤 반대를 할 줄 알았는데, 저 애 고집을 누가 꺾겠냐는 식 으로 허락이 떨어졌다. 그렇다고 아주 호락호락한 허락은 아니었다. 지체가 떨어 지는 데로 시집가는 대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단서가 붙었으니까. 우리가 혼수를 장만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건 나도 빤히 아는 사실이었다. 이왕 못해 보내는 거 듣기 좋게 서로 위로할 수 있는 말도 얼마든지 있으련만 이렇게 야박하게 굴었다. 비록 딸자식을 맨몸으로 시집보낼 망정 당당하고 싶은 거였다. 나는 절대로 굽잡히기는 싫어 안간힘 쓰는 우리 집안의 이런 체면 차리기가 면 구스러웠고, 그런 야박스러운 허락에도 감지덕지해 가며 양가에서 나누어 해야 할 혼인 준비를 혼자 떠맡은 그가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심정적으로나마 어느 쪽을 역성 들 수도 없는, 짓눌리는 듯 무력하고 우울한 시기였다. 양복을 맞추고 난 우리는 미장원에 들러 신부 화장이랑 면사포를 예약했다. 뭐든지 다 최고급으로 해 달라며 예약이고 뭐고 없이 전액을 지불하는 그를 보 며 또 한 번 그가 부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양복점에서처럼 그 생각이 기분 좋지만은 않았다. 울고 싶도록 울적했다. 미장원을 나와서 점심을 먹으면서도 그는 신부 쪽에서 꼭 장만해야 할 것이 무엇무엇인지 알고 싶어했 다. 그는 바보처럼 눈치가 없었다. 내 우울을 도무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그 에게 불쑥 나도 그에게 뭐 하나 사 주고 싶은 게 있다고 말했다. 직장에서 받은 마지막 월급만은 집에 내놓지 않고 꿍쳐가지고 있었다. 그는 덮어놓고 괜찮아, 괜찮아 했다. 그러나 입가로 비죽비죽 웃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모자를 사 주고 싶어요, 최고급으루다." "모자도 곧 살거니까 염려 말아요." "내가 사주고 싶다니까." "비쌀 텐데...." 양복지도 그렇지만 모자도 국산품이란 아예 있지도 않을 때였다. 우리는 명동 에 몇 안 되는 양품점을 다 뒤져 꼭 마음에 드는 중절모를 찾아냈다. '필그림'이 란 상표가 붙은 고가품이었다. 밝고도 기품 있는 회색빛 몸체에다 그보다 약간 짙은 빛깔의 본견 리본이 달린 순모의 중절모는 가볍고도 부드러웠다. 그에게 썩 잘 어울렸다. 문득 중학교 일 학년 영어책 첫 장이던가, 둘째 장이던가에 나 오는 잇 이스 어 캡, 잇 이스 어 햇 생각이 났다. 그 문장 삽화에 나오는 햇을 쓴 신사만큼이나 그의 모자 쓴 모습은 멋있어 보여서였다. 그러나 우리 집안 어 른들 앞에서 저희는 중인 집안입니다라고 말할 때보다는 덜 멋있었다. 내가 정 말 반한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고 속으로 되새기며 은밀한 행복감 맛보았다. 예로부터 혼수 없이 몸만 가는 시집을 허리춤에 참빗 하나 찔러 넣고 간다고 했는데 나는 중절모 하나 달랑 들고 가는 시집이었다. 어머니의 아무것도 안 해 주기는 아주 철저했다. 그 대신 딸이 시집가서 역시 지체 높은 집에서 데려온 며느리는 다르다는 소리를 듣게끔 교육시켜 보내려는 조바심은 무슨 앙심처럼 집요하고도 정열적이었다. 이를테면 시부모님한테 조석 문안드리는 법도로부터 집 안내와 친척들을 촌수와 아래 위 턱에 따라 어떻게 부르는 게 점잖은 집안의 예절에 합당한지를 시시콜콜 가르치고 복습을 시키느라 장작 급하게 배워야 할 밥 짓는 법이라든가, 저고리 동정 다는 법 따위는 치지 도외였다. 그때만 해도 그런 것도 안 가르쳐 보내는 거야말로 친정 어머니가 욕먹을 짓이었는데도 우리 어머니는 그러했다. 하긴 시집에 있지도 않은 하인한테 쓰는 말씨, 잡도리하는 법까지 가르쳤으니까. 그런 걸 가르치다가 친시누이는 없지만 시집 근방에 시외 가가 살고 있어 자주 만나게 될 사촌 시누이는 여럿 있다는 걸 안 어머니는 갑 자기 돌변한 태도를 보였다. "반가의 풍습은 손아래 시누이를 깍듯이 작은아씨라고 불러야 한다만 그까짓 중인한테 작은아씨는 뭐. 그 사람들 풍습 따라 아가씨라 부르도록 해라. 알겠느 냐?"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시대 착오적이면서도 사람 헷갈리게 하는 이런 양반집 규수다운 법도야말로 어머니가 장만할 수 있는 유일한 혼수인 걸 어쩌랴. 자연 히 피로연까지도 그의 몫이 되었다. 그는 그 당시 서울에서 제일 큰 중국 요릿 집인 (아서원)에다 양가의 하객을 다 먹일 만한 피로연 자리를 마련했다. 우리 친정 친척들은 먼 친척 가까운 친척, 외가 진외가 할 것없이 모두모두 양반님네 였음으로 어쩌다 딸년 하나 중인한테 시집보내 지체를 떨어뜨린 분풀이로 너무 도 당당하게, 털끝만치도 굽잡히지 않고,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모두 그 피 로연에서 마음껏 먹고 마셨다. 그래도 돈푼이나 있는 집인가 봐, 그나마 다행이 지 뭐유, 이렇게들 수군대면서. 그러나 막상 시집을 가보니 남들이 수군대고 나도 은근히 기대한 것만큼 그는 부자가 아니었다. 작지만 제 집을 지니고 있었으니 아주 가난뱅이라곤 할 수 없 어도 스물아홉 노총각이 되기까지 착실히 모아 둔 돈을 색시 하나 싸데려오기 위해 고스란히 탕진한 뒤였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탓할 계제도 아니었다. 먹고 살 만큼 벌어 오는 직장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신혼 생활의 이런저런 추억 중 가장 아늑하고 따스한 추억은 역시 모자와 관 계가 있다. 나는 처음부터 그가 출근 준비를 혼자서 할 수 있도록 길들였지만 넥타이 매는 것만은 아무리 가르쳐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나도 그걸 어디서 따로 배운 바가 있는 건 아니고 그가 하도 속 가닥과 겉 가닥의 길이를 들쭉날 쭉하게 매길래 매듭 만드는 법은 그에게 배워 가며 가지런히 매 주기 시작한 게 그만 버릇이 되고 말았다. 넥타이를 매주고 나면 모자를 건네줄 차례였다. 그 동 안 잠깐 모자를 매만졌다. 고가품답게 잘 빠진 모양은 늘 일정했지만 나는 괜히 가운데 누르는 부분과 둥근 테의 곡선을 조금씩 손보면서 그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을 즐겼다. 소탈한 그에게 사치로운 모자가 잘 어울리는 것도 묘한 즐거움 이었다. 그가 지닌 유일한 사치품이 주는 낙은 약혼 시절 그가 부자일지도 모른 다고 꿈꾸던 낙과도 비슷하니 철없는 것이었지만, 생각보다 재미없고 어쩔 줄 모를 것 투성이인 시집살이를 그래도 견딜 만하게 해주는 정서적 돌파구였다. 처음 그와 부부로 맺어졌을 때, 신혼의 서툰 행복에 적절한 소도구처럼 끼여 들었던 모자를, 삼십오 년 후 그를 홀로 떠나 보내야 할 시간이 시시각각 임박 해 올 무렵 생각해 낼 게 뭐였을까. 세월의 덧없음을 거슬러 보려는 부질없는 생각은 그러나 절절했다. 그때마다 내 눈치를 보면서 어머니 이게 맞아요? 하고 자문을 구했다. 자식들은 에미의 의중에 있는 그 우아하고 품위있는 최고급품 중절모를 이해하지 못했다. 요새는 아무도 그런 걸 쓰고 다니지 않으니 그런 걸 파는 데도 없나 보다. 나도 백화점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모자 파는 데부터 기 웃거려 보았지만 자식들이 사 오는 모자와 대동소이한 것밖에 팔고 있지 않았 다. 중절모는 중절모이나 테가 너무 좁아 점잖지 못하고 질도 코르덴, 화학섬유, 혼방, 면, 모 등 다양하고 줄무늬나 체크 무늬로 된 것까지 있어 멋스럽긴 하나 경박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최초의 중절모는 꿰멘 자국이 한 군데도 없 는 통짜였는데 요새 것은 다 바느질해서 만든 거였다. 그러나 집에서 물세탁을 해도 감쪽같이 새것처럼 보이는 이점이 있었다. 우리의 최초의 중절모는 당시의 미숙한 드라이클리닝 기술 때문에 이 년 만에 못 쓰게 되고 말았었다. 내가 속으로 흡족치 못해 한 것과는 상관없이 그는 자식들이 사 온 모자는 뭐 든지 다 좋아하며 번갈아 쓰고 다녔다. 어떤 모자를 쓰면 퇴직하여 유유자적하 는 노교수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모자를 쓰면 평생 연예인에 연연하며 한 번 도 빛을 못 본 불우한 딴따라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 그와는 인연이 먼 것들뿐 이었다. 역시 요새 모자는 취미로서의 모자지 정통 의관으로서의 모자는 아니었 다. 나의 다양한 평가와는 달리 그는 아침에 모자를 쓰고 나갈 때마다 현관 거 울을 보며 말했다. "어때 나 예술가 같지?" 결혼 전 한때는 토목 기사였다지만 객지 생활을 많이 해야 하는 게 싫어서 장사꾼으로 전향한 후 한 번도 딴 일에 한눈을 팔아 본 일이 없는 그와 예술가처럼 안 어울리는 직업이 또 있을까. 그 의 숨은 마음에 예술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면 혹시 글쟁이인 마누라에 대한 콤 플렉스가 아니었을까. 나는 별것도 아닌 것에 신경을 쓰면서 그를 배웅했다. 실 제로 내가 내일을 하면서 그에게 신경을 쓴 적은 거의 없으면서 말이다. 내가 내 일이 잘 안 되어 두억시니 같은 모습으로 아이들이나 집안 일과 부딪칠 때마 다 그는 말했다. "쉿 조용히 하자, 느이 엄마 또 거짓말이 딸리나 보다." 혹은 손 수 커피를 타 가지고 와서 "당신 또 거짓말이 막혔나 보구려." 하고 놀리기도 했 다. 그럴 때처럼 그의 시선이 따뜻하고 정겨울 때도 없었다. 그러면 나도 슬며시 웃음이 나오면서 그래, 한낱 거짓부리인 것을 하고, 죽자구나 덤벼들던 그 암담 한 악전 고투에서 한 걸을 물러날 여유가 생기곤 했다. 그렇다고 내 소설 쓰기 가 그에겐 한낱 거짓말 만들기로밖엔 안 보였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모자로 멋 부리는 것 외에는 보통 때와 같은 시간에 보통 때와 같은 모 습으로 출근을 했지만 내 일상은 보통 때하고 같을 수가 없었다. 이 보통 때와 같은 나날이 오래 지속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도 하고 보통 때와 같은 날을 연장시킬 수 있는 음식이나 생약에 관해 얻어들은 잡다한 정보에 따라 구하러 다니기도 하고 직접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는 병원의 지시나 처방해 준 약은 잘 지켰지만 수많은 비방의 생약에 대해서는 매우 냉담해서 먹이기가 여간 힘들 지가 않았다. 아무개도 이걸로 나았고 누구도 이걸 먹고 감족같아졌댄다고 설득 을 해도 도무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열심히 구하고 만든 날 봐서 먹어 달라 고 애걸을 하는 게 차라리 빨랐다. 그쪽에서 나에게 애원을 할 적도 있었다. "여 보, 제발 우리 현대 의학 하나만 믿도록 합시다. 이왕 자식을 둘씩이나 의학 공 부시켰으니 그 정도의 의리는 지켜야 하지 않겠소." 별 말도 안 되는 의리였다. 그런 태도는 현대 의학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식들에 대한 애정과, 자기 목숨에 대한 담담함에 연유했음직하다. 밀가루도 약으로 믿고 먹으면 효험을 본다지만 아무리 좋은 약도 환자가 믿지 않으니 무슨 약효가 있을까 싶어 생약을 연구하 고 만드는 일은 자꾸 서글퍼만졌다. 그 대신 저녁 식사 준비는 신이 났다. 그가 지금 가장 열심히 하고 싶어하는 일은 병나기 전의 보통 때처럼 사는 거였다. 보통 때, 그는 집에서 저녁을 먹을 때, 제일 흡족하고 살 맛이 나 보였었다. 거 의 유일한 취미가 식도락인 그는 음식 잘한다는 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아했지 만, 그건 휴일날 점심에 한하고, 보통날 저녁은 꼭 별식을 한두 가지쯤 장만한 내 집 식탁에서 이 홉들이 소주를 반 병이 채 안 되게 비우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한없이 오래 하며 먹고 싶어했다. 부엌에서 음식을 하면서 버스 정거장 쪽을 내다볼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 다. 그가 모자를 쓰고 있다는 건 더 좋은 일이었다. 내 아물아물한 시력으로도 꾸역꾸역 내리는 사람들 속에서 쉽게 그를 가려낼 수가 있었다. 아아, 오늘도 그 가 무사히 보통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내 곁에 돌아오고 있다. 그 동안 그를 기다린 타는 목마름은 그가 휘적휘적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도 탐조등처럼 그를 비추며 좇았다. 그가 보통 때와 다름없이 맛있는 저녁 식사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푼 표정으로 현관에 들어서면 나는 신혼 때처럼 종종걸음으로 그를 마중해 모 자 먼저 받아 걸었다. 비록 늙은 얼굴에 걸맞지 않는 갓난아기 같은 연애할 때 도 신혼 시절에도 느껴 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건 순전히 살아 있음에 대한 매혹이었다. 그리고 나서 풍성한 식탁에 마주앉으면 우린 더불어 살아 있음에 대한 안타까운 감사와 사랑으로 내일 걱정을 잊었다. 그 시간 그의 구미에 맞는 한 그릇의 두부찌개는 누가 천 년까지 먹고 살 보화를 가지고 와서 바꾸자고 해 도 거들 떠도 안 볼 만큼 값진 것이었다. 남들이 십 년후를 근심하고 백 년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동안 우리는 순간을 아까워했다. 죽음은 모든 살아 있는 것 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동물도 죽을 병에 들거나 상처를 입으면 괴로워하기 도 하고 저희들 나름의 치료법도 있으리라. 그러나 죽음을 앞둔 시간의 아까움 을 느끼고, 아까운 시간에 어떻게 독창적으로 살아 있음을 누리고 사랑할 것인 가를 생각해야 하는 건 인간만의 비장한 업이 아닐까. 그가 선택한 인간다운 최 선은 가장 아까운 시간을 보통처럼 지내는 거였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에게 순간순간 열중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 부부에게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열 달이나 계속했다. 항암제를 삼주일에 한 차례씩, 때로는 백혈구 부족으로 한 주일 연기해서 사 주일에 한 차례씩 무려 열 번을 맞는 데 팔 개월이 걸렸고, 팔 개월 후 정밀 검 사 끝에 폐암은 거의 완치된 걸로 본다는 진단을 받았다. 거의 완치란 얼마나 애매하고도 반지빠른 말투인가. 그러나 주치의가 꼭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고 지금까지의 치료 효과는 희귀한 케이스에 들만큼 양호하나, 재발이나 전이의 가 능성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마냥 항암제를 맞는다는 것도 인체가 견딜 노릇도 아닐 뿐더러 또 지금까지의 임상 경험으로 봐서 무한정 맞는다고 재발이나 전이를 방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의 어렵고 우회적인 말을 그 렇게 풀이했을 뿐이다. 만일 재발했을 경우 신속하게 발견해서 항암제를 다시 맞을 수 있게끔 매달 정기적인 검사를 받기로 하고 항암 주사는 일단 중단을 했 다. 그 동안 그에겐 일곱 개의 모자가 생겼다. 매일 아침 일곱 개의 모자를 이것 저것 번갈아 써 보며 멋 부리는 버릇도 여전했다. 그가 어때? 나 예술가 같지? 하고 물으면 나는 예술가 좋아하시네, 꼭 난봉꾼 같네, 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그냥 농담처럼 말했지만 속으로는 진담이었다. 아아, 그에게 마지막으로 로맨스 가 생길 수는 없는 것일까? 이왕이면 불꽃같은. 보통으로 살기도 초인적인 힘이 드는 그를 두고 나는 이렇게 화려한 일탈을 꿈꾸었다. 남편의 연인을 가상해도 조금도 질투가 나지 않는 이 하해와도 같은 관대함은 실은 인간의 운명의 속절 없음을 거슬러 보려는 작은 몸부림 같은 거였다. 항암제를 중단한 지 두 달만에 그의 민둥머리에 삐죽삐죽 머리털이 돋아나는 게 보였다. 그도 거울로 그걸 확인하고 환성을 질렀다. 그는 소생하고 있는 걸 까? 그는 암세포와 가장 비슷한 세포가 머리카락 세포라는 소리를 벌써 잊었는 지 나도 같이 기뻐해 주길 바랐다. "당신은 모자가 아깝지도 않수?" 나는 도저히 꾸밀 수 없는 내 침울한 표정을 이렇게 변명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새벽 기침을 전전긍긍 기다리느라 잠못 이루는 밤이 계속됐다. 그러나 암세포는 한 번 왔던 길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날도 부엌 창문으로 그의 귀가 를 지켜보고 있었다. 모자 때문이었다. 그날 그는 갈색 줄무늬가 있는 모자를 쓰 고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였다. 기분에 따라 또는 몸 컨디션에 따라 걸음걸이가 달라질 수도 있으련만 괜히 가슴 먼저 후들댔다. 그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왜 그렇게 이상하게 걷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당신 보기에도 그랬어? 참 별일이야. 똑바로 걸으려고 해도 자꾸만 비뚜루 나가잖아." 그가 웃으면서 말했고 나 역시 웃으면서 그 얘기를 아들에게 했다. 설마 비뚤 게 걷는 병도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나 아들의 반응은 심각했고 당장 누나와 매형에게 전화해서 여러 말을 수군대더니 그 밤으로 그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아버지한테 베란다 쪽으로 똑바로 걸어가 보라느니, 손가락으로 코끝을 가리키 라느니, 두 팔로 앞으로 나란히를 해보라느니 꼭 세 살 먹은 어린애 재롱 보듯 이 시험을 했다. 그리고 나서 내일 당장 뇌를 CT촬영해야 한다고 했다. 그게 아 직도 수련의 아니면 기초 의학 전공인 그들의 진단의 한계였다. 그러나 나는 수 도 없는 검사를 거친 노련한 주치의의 진단보다 더 확실하게 그의 몸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놈의 암이 뇌 속 으로 옮아갔다는 걸 인정하는 건 너무도 무섭고 분노스러웠다. 견딜 수 없이 비 참한 밤을 보내고 나서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찾아간 병원에서 그러나 CT촬영은 불가능했다. 노사 분규가 극도에 달했던 1988년 초였다. 그가 그 동안 입원과 통원 치료를 받아 오던 종합병원도 막 그날 아침부터 간호사를 비롯한 종업원들이 파업에 들어가 병원 업무가 마비돼 있었다. 환자들은 하릴없이 발길 을 돌리면서도 한마디씩 한탄을 하거나 욕을 했다. 이 층에선 일손을 놓고 권리 를 부르짖는 근로자들의 노래 소리, 구호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 왔다. 뭔가 참을 수 없는 기분에 떠밀려 나는 발길을 돌리는 대신 이 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거 기서 뭣들하고 있어, 지금 내 남편이 죽어 가는 데, 제발 내 남편 좀 살려줘." 이 런 아우성이 목구멍까지 차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이 층 로비에 모여서 선창자 를 따라 주먹을 휘두르며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뒤에서 사담 을 소곤대거나 시시덕대는 패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머리에다 띠를 두르고 있었다. 머리띠에 붉은 물감으로 쓴 구호가 마치 상처에서 배어 나온 핏자국처 럼 분위기를 살기 등등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무작정 뛰어 올라온 기세와는 달리 잠시 우두망찰하고 서 있었다. 내가 어쩔 줄을 몰라 했던 건 그들이나 그 들이 자아내는 활기차면서도 살기 등등한 분위기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였다. 노사 분규 현장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백화점에 쇼핑하러 갔다 가도 쇼핑 대신 종업원들의 축제처럼 흥겨운 데모 구경만 실컷 한 적도 있고, 택시나 지하철도 시한부로 파업을 예고해 놓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이 연일 대기업의 노사 분규로만 채워지던 때였다. 남들이 겪는 것만큼 불편도 겪고 걱 정도 하면서도 나는 내가 노동자 편이라는 걸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노동자라서가 아니라 억압하는 쪽보다는 억압당하는 쪽을, 가진 자보다는 못 가진 자를 편드는 건 내 기본적인 도덕심이었다. 더군다나 남편의 잦은 입원 과 통원 치료로 종합 병원과 일 년 가까이 관계를 맺어 오면서 그 권위주의적이 고 관료주의적 체제에 넌더리가 난 뒤였다. 큰 병원 또한 대기업 못지 않게 시 급히 달라져야 할 가장 비민주적인 기구라는 걸 뼈아프게 느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런 거대하고 오만한 체제의 말단에서 짓눌려만 온 노무자들의 권리 행사에 맞닥뜨리자 동질감보다는 반감이 앞섰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 할 수가 없었다. 홀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절망감과 피해 의식 때문이었을까, 나 에겐 그들 또한 막강한 강자로 보였다. 강자란 무엇인가? 목청 높은 가해자가 곧 강자인 것을. 그들이야말로 지금 그 두 가지를 완벽하게 겸비하고 있다고 나 는 생각했다. 다음 다음날 딴 병원으로 CT 촬영을 하가 갈 때였다. 자식들이 수소문하고 청을 넣고 해서 간신히 예약을 한 병원이었다. 그쪽 지리에 서툰 나는 입구를 잘못 알고 미리 차에서 내렸기 때문에 병원 긴 담을 끼고 한참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자꾸만 비틀비틀 담으로 가서 부딪치면서 한없이 더디게 걸었다. 다시 전전날의 분노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화를 안 내면 미칠 것 같았다. 그에 게 화낼 일은 아니었지만 그럼 누구한테 낸단 말인가. "제발 똑바로 좀 걸어봐요. 꼭 쥐구멍 찾는 게처럼 걷지 말고...." 나는 발까지 굴러가며 모질게 악다구니를 쳤다.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민물 게가 지금처럼 귀물이 아니었다. 시골에서 벼가 누렇게 익을 무렵 동대문 시장 에 가면 좀 비싸긴 해도 배꼽이 둥근 산 암케가 많이 나와 있곤 했다. 암케 딱 지 속에 고약같이 검고 찐득한 알 잔뜩 들어 있을 때였다. 그대를 맞춰 반 접쯤 의 게장을 담그는 건 김장 못지 않은 우리 집의 연례 행사였다. 식구들이 다같 이 유별나게 게장을 좋아했다. 산 게를 여러 마리 항아리 속에다 가두고 한 마 리씩 꺼내 한 채로 손질하려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곤 했다. 집게 발가락에 물 리지 않도록 조심도 해야 하지만, 줄줄이 딸려 나온 게들이 제각기 도망을 치는 것이 큰 문제였다. 시어머니는 게가 쥐구멍으로 들어가면 평생 가난하다는 묘한 미신을 믿고 있었다. 오래 된 한옥엔 유난히 쥐구멍이 많았다. 게는 빠르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인간과는 다른 횡적인 방향 감각 때문에 까딱 잘못하다간 놓치기 일쑤였다. 시어머니는 손질은 당신이 하면서 달아나는 게가 쥐구멍으로 들어가 기 전에 붙들어 오는 막중한 역할은 꼭 나한테 시켰다. 그러나 게에다 간장을 부어 죽인 후에도 다시 세어 보아야만 안심을 할 정도로 면밀했으니 나는 자연 히 그 일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남편한테 그 일을 고해 바치며 그의 어머니 흉을 한바탕 보아야만 다소 스트레스가 풀릴 지경이었다. 그런 옛 일에 얽힌 농담이라면 얼마든지 재미나게도 그윽하게도 할 수 있었으련만 나는 고약한 성깔이 잔뜩 치받쳐 있었다. 여북 해야 그가 딱하다는 듯이 그러나 역시 농담으로 받았다. "당신이야말로 왜 그래? 꼭 틈바구니에 낀 쥐 같잖아." 그리고 피식 웃더니 탄식하듯 덧붙였다. "생전 틈바구니에 끼여 봤어야지." 그의 목소리가 하도 연민에 차 있어서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죽어 가는 사람 으로부터의 연민은 감동적이었다. 울어 버릴 것 같았다. CT 촬영은 참으로 놀라운 첨단 과학이었다. 뇌를 가로 세로 여러 장으로 슬 라이스하듯이 나누어 찍은 단면 사진은 내 눈으로도 고루 퍼진 암을 확인 할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뇌는 혈관의 회로가 달라서 항암제가 미치지 못한다고 했 다. 그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치료법은 방사선을 뇌에다 쬐는 거였다. 방사선 치 료란 죽는 연습이었다. 그 치료엔 아무도 입회하지 못했다. 방사선과 의사까지도 그를 치료대에 혼자 고정시켜 놓고 나와서 밖에서 컴퓨터 화면을 보며 조종했 다. 그 안에서 그는 어떤 기분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방사선이란 어떻게 생긴 빛 일까? 그 깊이 모를 외로움과, 너무 밝아 차라리 암흑과 상통할 것 같은 빛에 대한 공포감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너무도 유사했다. 그는 이마가 까맣게 타 도록 방사선 치료를 받았지만 다시 해본 CT 촬영에서 암은 소멸되지도 줄지도 않은 채였다. 미국 가 있는 막내를 잠시 귀국하도록 했다. 부고 받고 장사에 대 오려고 허둥대는 것보다는 생전에 뵈러 오는 게 효도가 아니겠느냐는게 딴 자식 들의 의견이기도 했다. 아버지한테 뭐 사다드리면 좋겠느냐고 막내가 전화로 물 어 왔다. 약 종류를 묻는 말투였다. 그러나 그의 병세도 그렇지만, 때도 이미 미 국엔 별의별 신효한 약, 불로초 같은 것까지도 있는 것처럼 여기던 촌스러운 시 대가 아니었다. 나는 막내에게 모자를 사오라고 말했다. 최고급으로 사오라는 말 도 잊지 않았다. 과연 막내가 사온 모자는 내 마음속에 있는 그의 모자의 원형 과 가장 가까웠다. 순모로 된 통짜 중절모였고 견직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테가 너무 넓어 신사 모자라기보다는 카우보이 모자를 연상시켰다. 아니나다를 까 네 살짜리 손자 녀석이 그 모자를 보더니 "와아, 장고 모자다." 하면서 그걸 빼앗고 싶어했다. 녀석이 좋아하는 만화 영화의 주인공 장고가 그런 모자를 쓰 고 있다고 했다. 그는 모자를 쓴 채 안 빼앗기려고 이리저리 도망을 다녔다. 여 전히 비틀대며. 손자가 울음을 터뜨려도 그는 그 모자를 내놓지 않았다. 손자와 의 마지막 장난이었다. 마지막 한 달 가량 자리 보존하고 있을 때를 빼고는 그 는 집에서도 줄창 그 모자를 쓰고 있었다. 막내에 대한 사랑 때문에도 그 모자 를 아꼈겠지만, 넓은 테는 방사선 치료로 시커멓게 탄 이마를 가려 주는 데 안 성맞춤이었다. 그 장고 모자가 그의 여덟 번째 모자이자 마지막 모자가 되었다. 나는 요새도 가끔 그가 남긴 여덟 개의 모자를 꺼내 본다. 그 안에서 머리카 락 한 오라기라도 찾아보려고 더듬어 보지만 번번이 헛손질로 끝난다. 그 여러 개의 모자는 멋이나 체면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민둥머리를 가리기 위한 것 이었다. 그의 몸을 차디찬 땅 속에 묻은 건 확실한데 아침마다 우수수 지던 그 숱한 머리카락은 지금 어느 만큼 멀리 흩어져 티끌로 떠도는 걸까. 생명의 가없 음이 티끌과 다를 바 없다는 속절없는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그의 흔적을, 남긴 물질에서 찾는 것보다는 남긴 말이나 생각에서 찾는 게 그래도 조금은 덜 허전 하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고, 잘난 척할 줄로 몰랐기 때문에 담소는 즐겼지만 그 럴 듯한 말은 할 줄 몰랐다. 우리 집엔 그 흔한 가훈도 없다. 그의 말이 생각나 는 것도 그가 끼면 편안하고 여유로워지는 담소 분위기이지, 멋있거나 뜻깊은 말뜻은 아니다. 오직 틈바구니만이 예외다. 내가 생긴 틈바구니에 끼여 보지 않았다는 게 무 슨 뜻일까? 그런 생각이 나를 자꾸 심각하게 한다. 그가 나 대신 가 주던 동회 나 세무서에 볼 일 보러 가서 똑똑치 못하게 굴다가 구박 맞으면 이게 틈바구닌 가 싶기도 하고, 사용자와 노동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칼자루 쥔 자와 칼날 쥔 자, 통일꾼과 반통일꾼이 서로 목청을 높여 싸우는 걸 봐도 전처럼 선뜻 어 느 쪽이 옳거니 양자 택일이 안 되고, 또 그 놈의 틈바구니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봐란 듯이 틈바구니에 끼기 위해선 거친 두 목청 사이에 낀 틈바구니의 숨결 을 찾아내야만 할 것 같다. 어쩌면 그는 그때 삶과 죽음의 틈바구니에서 어느 만큼은 내 원색적인 분노를 관조할 수도 있었기에 해본 단순한 연민의 소리일 뿐인 것을 내가 괜히 심각하게 구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틈바구니 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 않는다. 그가 남긴 모자가 나에겐 모자라는 물질 이 상이듯이 틈바구니란 말 또한 이상의 것, 한없이 추구해야 할 화두임을 면할 수 가 없다. 여자와 우산 지은이 김향숙 바람은 흡사 바늘침 같다. 잘디잔 얼음조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무 릎, 귓불, 뺨, 목젖, 심장 모두를 아프게 한다. 견디기가 쉽지 않다. 왜 정우는 찻 집에 가자는 얘길 하지 않는 것일까. 어두운 골목을 벗어나면서부터 줄곧 막막한 얼굴을 했던 정우에게 그러나 나 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다. 정우는 지금껏 무슨 생각에 골몰해 있는 모습 인 것이다. 아주 무섭도록 심각해 보인다.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을 정도로. 차라리 아무 말 없이 그냥 걷는 것이 낫겠다. 어째서인지 정우가 입을 여는 것을 조금은 두려워하게 된 나는 남산으로 오르는 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젊은 이들을 쳐다본다. 서로의 허리며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뜨거운 눈길을 주고받는 젊은이들. 뜨거운 눈길은 전류처럼 내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 보는 것만으로 얼음조각들 속에 쟁여진 듯한 내 마음에 온기가 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일말의 쓸쓸함 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부터 나와 떨어져서 걷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는 데 생각이 미친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싫어진 것일까.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금 정우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정우는 내 시선과 마주 칠까를 저어하듯 앞만 곧바로 쳐다보며 걸을 뿐이다. 나쁘지 않은 그의 옆모습. 그러나 그렇게 여기는 것은 내 생각이고 정작 정우 자신은 스스로를 칭하기를 잘하였다. "영락없는 미녀와 야수로군, 흠." 머리칼을 빗을 때면 간혹 그의 울퉁불퉁한 면상이 내 얼굴 옆으로 떠오르곤 하였다. 여관방의 면이 고르지 못한 거울 속에서였다. 선량한 야수님이신데 하고 내가 말했을 때 정우는 얼마나 환하게 웃곤 했었나. 약간 모자란 듯한 그 눈의 흡인력을 무어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우산을, 뒷주 머니에 찔러 넣고 다니던 포켓북을 그는 어디에서나 잃어버리기를 잘했다. 어딘 가 헐렁한 그 점이 좋았던가 보았다. 그랬는데 오늘 밤 정우는 아무래도 여느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질 않은가. 아주 냉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거듭해서 단속하고 있는 것도 같다. 정우만은 여럿의 얼굴을 지닐 수 없다고 믿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내 희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불안한 느낌을 떨쳐 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정우도?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럴 리가.... 나는 거푸 고개를 저었지만 내 마음속의 불안감이 점점 커져 가는 것을 못 본 척할 수는 없다. 일 년 전의 그 어느 날처럼 가슴엔 무수히 많은 금이 그려지려 하는 참이었다. 크게 소리내어 울지도 못했던 그 나날들. 불을 켜지 않아 뿌연 막으로만 보이던 천장을 향해 반듯이 누우면 뜨거운 눈물이 가슴 언저리로까지 흘러내리곤 했었다. 어쩌면 좋을까? 어쩌면 좋아. 자신에게 던졌던 그 수많았던 물음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물음들이 날 사로 잡는 것일까. 그 물음의 답을 구하려는 듯 나는 또 정우를 쳐다보아야만 했다. 그는 이제 석상처럼 보였다. 말을 붙인다는 것을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저기로 갈까?" 정우는 야외 음악당 앞쪽의 빈 벤치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추울 꺼야." 나는 멈추어 섰다. 자신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한 마리 짐승이라는 느낌인 채. 그러나 정우는 자신이 눈짓으로 가리켰던 벤치 쪽으로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정우는 내 마음 따윈 전혀 셈에 넣을 줄 모르는 구나. "난 추위에 약하잖아." "조금만 앉았다 가지." 정우는 벤치에 앉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러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다. 이 석연찮은 불안한 느낌을 떨쳐 버리기 위해 애쓰면서. "이리로 와서 앉아 봐. 기화야." 기화야, 하고 내 이름을 부를 때의 정우 목소리는 얼마나 다정한가. 눈을 감고 서 정우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언제나 숨이 막히는 듯하곤 했었다. 내 의지의 끈 따윈 찾을 길이 없게 되곤 하질 않았던가. 정우 옆에 앉게 되면 좋지 않은 말을 들을 수 있으리란 예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만 여느 때처럼 말 잘 듣는 아이이기나 하듯 그가 시키는 대로 하고 만다. 정우는 내 손을 잡았고 우리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시가지의 불빛들 쪽으 로 눈길을 주고 있었다. 수많은 열꽃송이들. 밤의 시가지는 열꽃들이 흐드러지게 만발한 들판과도 같다. 정우와 손을 잡으면, 어깨의 살이 닿기만 해도 가슴속에 서 무수한 열꽃들이 한 순간에 만개하는 듯한 느낌이 되고 했던 나날들이 불현 듯 떠오른다. 그것은 어쩌면 내 손을 잡은 정우의 손에서 아무런 열기가 전해져 오지 않음을 의식해서인지도 모른다. 정우는 지금 숙제를 하듯 내 손을 잡고 있 는 것이 아닐까. 나는 정우의 손에 든 내 손을 빼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째선지 그렇 게 할 수가 없다. 정우를 무안하게 해주고 싶지 않아서라고 여기지만 그 때문만 은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이 더는 이어져 나가지 않는다. 온몸을 에워싸는 추위 때문이다. 춥다. 너무 추운 것이다. 턱이 자구만 들들댔다. 나는 기침을 터뜨렸 다. 정우가 뿜어내는 담배 연기도 한몫을 했던 것이다. "그만 내려가면 안 될까?" "기화는 우리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우는 그렇게 물어 왔다. 나는 얼떨결에 벤치에서 일 어났다. 내가 그 벽을 넘어갈 수 있을까. 산달이 가까운 임산부처럼 부풀어오른 배에 지퍼가 달린 커다란 돈주머니를 찬 모습을 한 정우의 어머니. 정우의 어머니에게 여자라는 단어는 얼마나 왜소 해 보였던지. 정우와 내 몸무게를 보태야만 아주 간신히 평형을 이룰 듯 싶었던 거대한 몸집. 4개월 전 정우의 어머니를 처음 만났던 순간의 현기증이 되살아난 탓일까. 수 렁 속을 걷는 듯 걸음을 내딛는 것이 몹시 힘들게 여겨지지만 걷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정우와 멀어지고 싶기 때문이다. 기화는 우리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해? 정우 의 그 물음은 정우의 어머니가 날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밝히기 위해 던 져진 것이 아니었을까. 비겁한 사람. 믿기가 어렵다. 정우는 남자가 아닌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권리를 가진. 정우의 어머니가 날 마뜩찮아한다는 것쯤이야 처음 만났던 날에 알아차렸던 참이었다. 정우의 어머니는 스스로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단속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식품점 가게에 달린, 조리퐁이니 라면땅 같은 과자가 든 상자가 천장에까지 닿도록 쌓여 있는 방에서 삼십여 분쯤 기다리는 동안 나는 내내 마음이 불안하 기 그지없었다. 나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정우 어머니는 점원 아이를 향해 목청 높여 삿대질만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정우를 따라 그의 어머니를 만나러 온 것을 깊이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걸레질조차 되지 않은 어지러운 방. 멈출 줄 모르는 고함소리. 내가 전혀 환영받 지 못하는 존재임을 느꼈기에 나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그 얘길 어머니께 말씀드 렸느냐고 묻고 말았다. "미쳤니? 그런 얘길 내가 하게." 정우가 펄쩍 뛰었던 그때, 왜 나는 이상하게 안도가 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하였을까. 한 번 결혼했다가 아이까지 낳은 후 곧바로 이혼하고서 복학 한 여자. 내 정체에 대해 정우가 입 다물었다는 것이 당연하고 고마운 일로 여겨지면서 도 또 한없이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언제까지 감추어 둘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나는 들릴 듯 말 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우리 어머니가 입에 거품을 무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야?"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속인다는 것이 떳떳하지 못한 일로 여겨진 다는 말은 입안을 맴돌 뿐이었다. "구태여 밝혀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정우는 딱하다는 듯 혀를 찼고 그때 정우의 어머니가 방으로 모습을 드러내었 다. "기화예요. 내가 늘상 얘기하던...." 정우는 한껏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얘가... 그 피래미냐. 니 녀석을 혼 빠지게 만든?" 정우의 어머니는 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를 순식간에 훑듯이 살펴보았는데 난 시선을 아래로만 줄 수밖에 없었다. 흰자위가 두드러진 쌍꺼풀진 두 눈의 강 한 빛을 감당하기 힘들어서였다. 내가 그 순간 느꼈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당 치 않게도 정우의 어머니가 날 경쟁자로 여긴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느낌 은 내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난 그런 류의 느낌에 붙잡혔던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쯧쯧. 어느 모퉁이에 복이 붙겠니?" 불을 단 담배를 두텁고 건조한 입술 사이로 밀어 넣기 직전의 정우 어머니의 말이었다. 한동안 나는 멍한 채로 그 말이 내 야윈 얼굴에다 빗대어서 하는 말 이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게다가 머리통 속은 또 너무 살이 쪘나 보구나. 멍한 기색을 한 걸 보자니 까." 담배 연기를 내뿜은 정우 어머니는 끄윽, 트림을 하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기화가 남자애들한테 얼마나 인긴데요." "허긴 니 녀석들 나이의 취향에는 맞을지 모르겠다만... 내 보기엔 틀렸어." 내 보기엔 틀렸어. 그 말은 내 가슴에 못이 되어 박혔다. 나는 정우를 쳐다보 았다. 못을 빼어 줄 사람은 정우뿐이어서. "난 기화가 좋은데요." 내 마음을 알아차렸던 것이었을까. 정우는 어깨를 들썩이며 그렇게 말했다. "이 애미보다도?" 정우 어머니는 희물희물 웃으며 그의 귀를 슬쩍 잡아당겼다. "당치도 않은 비교를 하시다니. 어머니답지 않으신 말씀인데요." 정우와 정우 어머니의 눈길이 얽혔다.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를 못마땅해하는 기색이었다. "니들이 연애하는 건 말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도록 해라. 연애 와 결혼은 다르다는 것 말이다." 정우 어머니는 통고하듯 말했고 그러자 정우는, "제 결심이 변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요." 하고 받아 말했다. 단단한 어조였지만 난 그때 정우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음 을 알아볼 수 있었다. "생김새만으로...그것도 첫 만남으로 기화를 며느릿감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 기시는 건 공정하지 못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우는 계속해서 기화는 참 여리고 착한 여자애라는 말을 덧붙였다. "글쎄, 그거야 니 녀석 생각인 게지. 하지만 이 에미 눈엔 저렇게 생긴 아인 애인 노릇에 적합하지 마누라로서는 별로 라는 생각이 드는걸." 당당한 정우 어머니 말에 나는 숨조차 크게 내쉴 수가 없었다. 첫 번의 결혼 에서 실패한 마누라가 바로 자기 자신인 때문이었다. "니 녀석 나이 때는 그딴 걸 알아보는 눈이 있을 리 없겠지만 산전수전 다 겪 고 나면 척 보면 알게 되는 거지. 마누라를 자꾸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결혼만은 신중해야 하는 거야." 정우 어머니는 이어서 내가 니 녀석을 위해서 헌신한 만큼 니 녀석도 어머니 비위에 맞는 마누라를 맞이하도록 애쓰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말을 했다. "그래야 셈이 맞는 거지." 그 말을 끝으로 정우 어머니는 가게로 나갔고 난 정우네 집을 나왔다. 정우가 내 옆으로 바싹 붙어 서며 우리 어머닌 바위 같은 분이셔, 라는 말을 하였다. "그런데 요즘은 바위도 크레인으로 옮겨 놓을 수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었다. 너무나 비참하고 당황했던 나머지 어떤 말도 입에 담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정우 어머니를 괴롭혀 주려면 정우와 꼭 결혼 을 해야만 할 것이었는데 그 다음이 무섭기만 했던 터였다. 결혼 생활이란 얼마 나 어려운 것인가를 나는 이미 경험해 보질 않았던가. 또다시 그 어려움을 되풀이할 수 있을까. 그 물음이 떠오르면서 나는 정우에 게 나와 꼭 결혼해 주어야 한다고 매달릴 수가 없었다. 정우는 그런데 나의 침 묵을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무서움증 때문이라고 여겼음에 분명했다. "걱정하지마. 결혼은 내가 하는 것이지 어머니가 하는 게 아니니까." 정우의 다정한 위안의 말을 듣는 동안에도 난 무슨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가. 저렇게 생긴 아인 애인 노릇에 적합하지 마누라로서는 별로 라는 생각이 드 는 걸. 정우 어머니의 말을 잊기 어려웠던 나는 정우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정우 어머니를 만났던 일 자체를 잊고 싶었던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정우와 나 사이에 정우 어머니가 등장한 적이 있었던가. 한 번도 없었다. 괴로운 일을 떠올리기 싫어하는 나로서는 정우 어머니 얘기를 하다 보 면 정우가 어쩔 수 없이 날 애인 노릇에 적합한 여자로 생각하게 될 것이 두려 워진 탓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럭저럭 잘되어 나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려 애써 온 것이었다. 그랬는데 결국 오늘 밤 정우 입에서 그의 어머니가 들먹여진 것이다. 정우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그때 누군가가 내 오른팔을 낚아채었다. 정우였다. 이상한 건 내 마음이다. 정 우로부터 멀어져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정우가 내 뒤를 따라와 주었 던 것이 기쁘고 반가웠다. 난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정 우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눈빛의 화장은 쉽지 않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추운데 어디 다방에라도 들어가지." 내 시선을 피하려는 듯 등을 돌린 정우는 뚜벅뚜벅 앞장서서 걸어간다. 내 마 음속의 기쁨, 반가움은 순식간에 스러져 버렸다. 쉽게 정우 뒤를 따를 수가 없 다. 집으로 가 버릴까. 길 건너편 카페, '겨울' 앞에 선 정우는 나에게 한 번 더 고갯짓을 하고 난 다 음 '겨울'의 문을 열었다. 난 결국 정우의 이야기를 듣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아 니 내 의지로 정한 것은 아니라는 게 옳겠다. 상대가 정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난 누군가의 말을 거절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내 마음을 따르기보다 그냥 누군 가가 하자는 대로 해 버리는 것이 버릇이 된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언제나 되풀이해서 말하고 하질 않았던가. 고집이 승한 여자는 사람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을 수 없기 마련이야. 그러니 제 주장 따윈 내세우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란 다. 어머니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었다. 여자란 모름지기 물 같아야 한단다. 내가 늘 어머니의 말에 승복했던 것이었을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귀여움 받는 것을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는 어머니가 때때로 낯선 적도 여 러 번이었다. 그러나 이즈음의 나를 보면 나는 결국 어머니의 되풀이되는 말에 길들여져 왔음을 깨닫게 되곤 한다. 어머니는 귀여움을 받는다, 라고 표현했지만 어쨌든 상대방으로부터 호의가 깃들인 눈길을 받으려면 맞서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나 나름대로 터득한 결과에서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우가 원하는 대로 카페 '겨울'로 들어서는 동안 난 정말이지 스스로를 못마 땅해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아니 못 마땅해 한다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무엇인가 크게 잘못 되었다는 느낌에 휩싸여든 것이었다. 왜 나는 거듭 실패하 는 것일까. "앉아." 정우를 내려다보며 섰던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는다. 그렇게 하면 정우의 눈 을 정면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고역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포기가 빠른 나. 난 어느덧 정우가 무슨 말을 해 오더라도 발밑이 흔들리는 듯한 놀라움에 사로잡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다짐의 말을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터였다. 그것이 나 자신을 지키는 길이라고 여겨졌다. 난 정우에게 사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집에선 늘 꿀차를 마셨댔지?" 정우는 혼잣말처럼 낮게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리고는 차 나르 는 아가씨에게 달지 않은 식혜를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두 그릇의 식혜가 탁자 위에 놓여졌다. 정우도 나도 식혜 그릇으로 손을 내밀지 않는다. 침묵 속에 앉아 있을 뿐. 다른 자리의 연인들 쪽으로 건성의 눈길조차 주지 않고서. 그냥 묵묵히 자신만의 생각에 붙들린 모습이었다. 자신만의 생각? 그러나 사실 내 머리 속은 텅 빈 채였다. 그저 한없이 쓸쓸하 다는 느낌이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지면서 울음을 터뜨릴 것도 같았던 내게 정우 의 말은 울음을 막아 주는 둑 노릇을 해주었다. 어렵고 난감한 일이 생기면 울 음으로써 해결하려는 여자애들은 딱 질색이야, 하고 언젠가 정우가 말했던 것을 떠올린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그렇게 심각해 보여?" 나의 반문에 정우는 주저 없이, "응." 하고 대답했다. 난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헛된 일, 일종의 허위로 여겨진 때문이 아니었을까. "모르겠어. 그냥 끝없이 쓸쓸하다고 여겨지는데...."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은 무 엇일까. 정우와 난 우리의 모두를 건 사랑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내 머리 속에 서 소용돌이치는 말들을 왜 정우에게 토해 내고 싶지 않다고 여기는 것일까. "기화야." 정우의 짧지만 깊은 한숨소리. "어머니가 그 내막을 알아 버리셨어." 내 머리 속에서 들여오는 짱, 하고 얼음장이 갈라지는 소리. 오랫동안 나는 고 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또 아셨으면 어때. 나는 입술을 씹고 또 씹 었다. 그 말을 듣게 되리라고 짐작했으면서도 정작 말을 들었을 때의 느낌이란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어머니를 설득시켜 보려고 무진 애를 썼어. 하지만 기화도 우리 어머 니를 한 번 봤으니까 사태를 추측하는 것이 어렵진 않을 꺼야." "그래. 어렵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하는 나. "기화야, 난 이번에야 내가 얼마나 시시한 놈인가를 분명하게 깨우치게 되었는 데.... 왜 이렇게 우리 어머니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지." 정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기화 편에서 보자면 이따위 인간하고는 지금이 라도 헤어지는 게 이로울 수 있겠다, 라는 말을 보태었다. "이로울 수 있겠다고?" 나도 모르게 크게 벌려진 입은 쉽게 다물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이 순간 그따 위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정우가 시시한 걸 알게 되었으니까 헤어지는 것을 이롭다고 여겨야 한다 니...." "난, 그저, 기화야." 정우의 얼굴에는 당황해 하는 기색이 뚜렷하다. "그러니까 정우의 마음속 저울의 잣대는...." 나는 말을 이어갈 수가 없다.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생각이 너무나 깊은 서러 움을 불러일으킨 때문이었으리라. "제기랄. 그래 난 이 정도로 형편없는 인간이야. 좀더 솔직하게 까발겨 볼까. 난 어머니가 기화의 과거를 알게 되어서 어느 면으로는 다행이리라는 생각을 했 는지도 모를 일이야. 왜냐하면," "듣고 싶지 않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격렬하게. 그리고는 두팔로 내 가슴을 감싸안아야만 했 다. 참기 어려운 추위 때문이었다. 난, 참으로 바보였다. 그 동안 줄곧 정우의 말 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기만 했다는 것이 이제야 난감한 일로 여겨지다니. "기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무리는 아닐 거야." 나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정우를 원망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탓하는 것이 조금은 덜 괴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한 때문이었을 듯도 싶지만.... "기화는 모를 거야. 내가 지금 얼마나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의자에 머리를 기댄 정우의 눈은 감겨 있었다. "그래... 난 정우의 기분을 헤아리기가 어려워." 이 기가 막히는 순간에도 저마다의 굴 속을 떠나려 하지 않는 정우와 나. 그 것을 떠올리자 난 참을 수 없이 자신이 싫어지고 만다. 그러나 내 머리 속에서 윙윙대는 말소리들은 사라져 갈 줄을 모른다. - 기화 걘 왜 그 모양일까. - 아무래도 걔한테 숨겨진 결점이 있는 모양인가봐. - 첫 번째 결혼도 일 년 만에 깨졌잖았어. - 그 결혼은 기화가 먼저 깨뜨리자고 했다더라. - 얜 그 말을 어떻게 믿니? 이혼을 하면 손해를 보는 쪽은 여자인데. 게다가 남편 되는 치가 꽤나 부자였다지 않았어. - 기화가 돈을 밝히는 편은 아니잖니. 돈보고 눌러 살 애는 아니었을 테니까. - 사람 속은 겉모습과는 다른 거야. 나는 귀를 막는다. 실패는 한 번이면 족하다고 믿었는데. "날 사랑해?"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물음이었다. 정우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려고 해서 나는 손등으로 눈을 눌러 주었다. "기화는,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상대가 자신이었다는 걸 모 르지 않을 거야." 정우는 우리가 2년 전에 만났어야 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 지 않는다. 정우의 말에 동의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가 아니기도 했던 것이 다. 그러나 어쨌든 깊은 회오의 념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혼을 하나의 탈출구로 여겼던 나의 철없음을 뼈저리게 인정한다는 것. 그것 은 어느 때나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음에랴. 오직 집을 떠나기 위한 목적에서 선택했던 결혼. 그것이 지금은 우스꽝스러운 일로 여겨질 뿐이지만 그 당시엔 얼마나 절박한 마음이었던 것일까. 어머니의 버릇이자 지병이던 잔소리가 그 해 가을에는 극으로 치닫는 듯하질 않았던가. 이십여 년 세월을 남편 없이 혼자 몸으로 지내 온 어머니에게 나는 또 하나뿐인 자식이었기에 어머니의 모든 관심은 내게 쏠리기만 했었다. 나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이 너무나 지극했으므로 나는 어머니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날 어머니의 분신으로 여겼고 그랬기에 난 적어도 겉 으로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말 잘 듣는 착한 딸 노릇을 감당해야만 했던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대학생이 되면서 나는 어머니와 분리되고 싶어하는 내 안의 욕구가 점 차로 높아져 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곱 시 이후의 외출은 금기 였는데 나에게 그 금기가 참을 수 없는 덫으로 다가온 것이 시발점이었다. 어머니에게 일곱 시는 무리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어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얼마나 험하고 무서운 세상인가. 어머니의 말은 옳았다. 그 러나 아무리 무서운 세상이라고 해도 일곱시 이후의 외출은 어머니와 함께가 아 니면 허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내겐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결국 난 어머니의 복제품이 되고 말 것이란 생각을 떨쳐 버리기 힘든 날들이 계속되면서 난 어머니에게 내 바람을 밝혔고 그에 비례해서 어머니는 더욱더 어머니 주장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한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 던가 보았다. 뿐이었을까. 그 무렵의 난 고지대의 수돗물 사정과도 흡사하였던 내 용돈 수령액에도 진력 이 났던 참이었다. 부자는 아니지만 매달 삼 층짜리 점포에서 받는 집세로 돈이 결코 부족할 리가 없는 어머니가 유독 내게만은 지출 내용을 일일이 밝히게 하 면서 용돈을 아주 조금만 주곤 한 탓이었다. 돈을 헤프게 쓰기 시작하면 나중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낭비가가 될 수도 있 다는 어머니 말에 수긍하면서도 내 처지가 한없이 답답하게만 여겨지곤 하질 않 았던가.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어머니가 심장 마비로 죽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의 당혹감을 잊을 수 있을까. 이웃집 용식이 할머니가 옆 집 맏아들과 선을 보게 하면 어떠하겠느냐는 말을 해 온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 다. "좋은 자리야. 부모 재산 든든하겠다, 사람 여물어, 게다가 신랑 자리가 기화한 테 쑥 빠진 형편이니 더 볼 것 없는 거지." 당사자인 내 뜻 따위는 물어 보려고도 않고 어머니만 쳐다보았던 용식이 할머 니. 여느 때의 나 같았으면 그런 용식이 할머니를 너무나 엉뚱하게 여기며 선을 본다는 이야기에 전혀 귀기울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럴 수가 없었다. 결혼이라는 것을 하면 자연스레 어머니 곁 을 떠날 수가 있게 되는구나. 내 가슴은 설레기까지 했었다. 시선을 어머니한테 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뭐라고 하실까. "세상에... 우리 기화 나이가 몇인데... 아직 학교조차 마치지 않았는데요. 그리 고 난 기화를 빨리 결혼시키지 않을 작정을 하고 있어요. 대학원에도 보내고 유 학꺼정 시켜서 아주 박사로 만들어 볼 작정이랍니다." 어머니의 어조는 단호했다. 마치 어머니의 딸이 박사 학위라도 얻은 양. "딸아이한테 뭔 그런 고생을 시키려 들어. 여자란 그저 시집 잘 가는 게 제일 인 게지." "시집이란 거 잘 가려서 가지 않으면 시집 식구들 좋은 일 시키는 일 아니겠 어요. 더구나 신랑 자리가 맏이라면.... 없던 일로 하시는 게 좋겠어요, 용식이 할 머니." 어머니는 자르듯 말했고 그러자 용식이 할머니는 중매 일을 업으로 삼아 온 경험에 의해선지 그제야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기화 뜻은 어떤지 물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어...." 어머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용식이 할머니의 체념은 빠르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일은 당자한테 물어 봐야지." "기화야. 어서 말씀드리지 그러냐." 어머니는 날 재촉하기까지 했다. "그 댁이 얼마나 알토란같은 부잔데." 용식이 할머니는 슬쩍 덧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시집에 돈이 있으면 그 유세가 또 대단치 않기가 일쑤 아니겠어요." 몇 마디 더 주고받던 어머니는 마침내 입씨름마저 귀찮아졌던지, "기화야, 뭐하는 거냐. 어서 말씀드리지 않고." 라고 말하며 내게 눈짓을 보냈다. 어머니가 너무나 당당해 보인 때문이었을까. 선을 보겠다는 말이 내 입에서 흘러 나왔다. 그 순간 어머니의 어이없어 하던 표정이라니. "저 철없는 것. 선 보는 일은 니들끼리 해보는 미팅하고는 다른 것인 게야." 어머니는 쯧, 혀를 찼다. 그리고는 조금은 냉정해진 목소리로 이 얘기는 없었 던 것으로 해 달라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뒤 나는 용식이 할머니와 선을 보러 갔다. 어머니는 자리를 깔고 누웠지만 내 뜻을 꺾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신랑 될 사람 은 키가 컸고 못생긴 데가 없어 보였으며, 또 내게 아주 친절하였다. 그런 점들 이 결혼을 하기로 작정하는 데 도움이 되어 준 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러나 실상 은 신랑의 존재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결혼을 한다는 것. 어머니 곁을 떠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 문이었다. 어머니는 한동안 날 보려 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어쩔 수 없이 결혼식 준비를 해주었다. 딸과의 불화를 소문내지 않고 싶었던 까닭에서였을 것이었다. 결혼식 전날 밤. 어머니와 나는 거의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하였다.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몹시 불안한 마음을 누르기가 힘들었다. 신랑 될 사람과 정 말 깊은 속내 이야기를 해보지도 못했다는 데 생각이 미치기도 했던 것이다. 그 러면 어머니가 결혼식을 취소하자고 나설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에. 신랑 될 사람과 밤늦도록 다니면서 난 이미 자유의 공기를 맛본 상태가 아니 었던가. 더군다나 결혼을 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내게 박사 학위를 얻을 때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고 다그쳐 댈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결혼 쪽이 나은 도피처였다. 신랑 될 사람은 내게 아내 이외의 노릇은 바라지 않는다고 언 명했던 터였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새 생활을 받아들이자. 난 새로운 나로 태어날 수 있 게 될 것이다. 살면서 생겨날 정을 바탕으로 이제야 마음껏 자유롭게 살아 가리라던 내 기대 는 그러나 결혼 일주일만에 싹둑 잘려지고 말았다. 남편은 내게 가계부를 주었고 또 그 가계부를 일주일마다 점검하였다. 아이스 크림 한 통을 사더라도 플라스틱 용기의 것을 사라고 말할 만큼 그가 알뜰한 사 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걸 모아 두면 무엇에 쓰더라도 쓰임새가 있을 테니까." 남편의 말은 옳았는데 난 그런 말을 하는 남편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남편과 나 사이의 차이점은 날이 갈수록 두드러졌다. 내가 지출한 문화비란의 레코드 두 장과 책 두 권의 비용을 보았을 때 남편은 그만 눈썹마저 찌푸려 가며 붉은 볼펜으로 가위표를 그었다. "결혼한 여자가 객쩍게 레코드는 무슨...." 남편은 또 음악에 취해 사는 생활은 건전하지 못하다는 충고도 서슴지 않았었 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의 생활을 내가 답습해 주기를 바란다는 말 또한 빠뜨리 지 않았다. 집안의 청결, 맛있는 음식 마련에 모든 정성을 기울이며 집안의 여러 경조사를 내 일처럼 챙기는 마음 씀씀이 같은 것들을 하루라도 빨리 배워야 한 다고. 내가 그처럼 열망했던 밤 외출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편은 용건이 없는 외출을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여기는 사람이었음에랴. 나는 결국 또 다른 새 장 속으로 갇힌 새 한 마리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새로운 새장은 지난번의 새장보다 더욱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머 니는 어느 때나 날 위해 주었지만 더욱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어느 때나 날 위해 주었지만 남편은 자신이 섬김을 받기를 원하고 그것을 나에게 주 입시키려 들곤 했던 것이다. 당연히 남편과 나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나는 남편에게 이것은 내가 바라던 결혼 생활이 아니라는 말을 했고 남편은 그러자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내가 당신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당신이 예쁘기도 했지만 당신이 무슨 일이 있어도 일곱 시까지는 귀가하곤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 는 나 자신에 대해 깊이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를 대할 면목이 없기 도 했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즈음 나는 내 몸 속에 새로운 생명이 자리잡기 시작했음을 알게 되었다. 체념을 하는 것이 좋으리라. 하루에도 여러 번씩 나는 스스로에게 그 말을 들려주곤 했었다. 그러나 나는 무책임하고 철없는 아내답게 이것이 내 삶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세 끼니 밥을 해 먹고 집안 청소를 하고 나면, 지겹다는 마음으로 드나들었던 강의실과 학교 교정의 곳곳들이 눈앞에 떠오르곤 하였던 것이다. 그럴 적이면 그만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질 않았던가. 어머니를 원망하고 나 자신을 탓하고. 또 탓하는 날들이 계속되면서 남편의 나에 대한 실망감도 커 졌던가 보았다. "당신은 겉모습만 여자다울 뿐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가 못해." 여자답지 못한 여자는 사랑을 받기 어렵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언제나 가슴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 으면서도 사랑을 받기 어렵다는 말에는 마음이 위축되곤 했기 때문이었다. 태어난 지 일주일만에 아기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열병으로 죽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결혼 생활은 좀더 계속될 수 있었을까. 무의미한 물음. 어쨌든 아이가 죽 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남편과 헤어질 수 있었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내가 헤어지고 싶다는 말을 입에 올렸다는 것만으로 나를 용서할 수 없어진 것이었다. "저 사람은 어머니와 너무 달라요. 그런 주제에 어머니를 닮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었어." 남편은 고자질하듯 말했고 시어머니는 그 점을 이제야 깨닫게 된 아들이 대견 한 모습이었다. "맞지 않은 사람들끼리는 일찍 헤어지는 것이 낫다. 그러게 내가 애초에 뭐라 고 했니? 외모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충고를 했었건만. 다음에는 어미가 시키는 대로해야 한다." 남편과 나는 각기 저마다의 어머니네 집으로 돌아갔다. "에미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소동은 없었겠지." 어머니 또한 그 말을 빠뜨리지 않았지만 난 끝내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박사꺼정 마쳐야 한다. 알았니? 다 잊어버리고 공부만 하는 거다." 이렇게 될 것을 예견이나 했던 것처럼 휴학으로 처리해 둔 어머니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난 학교로 돌아갈 생각을 했던 터였다. 공부를 계속해서 학위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을 했었기에. 그러나 도서관 옆자리에 앉게 된 정우와 친해지면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우와의 만남이었을 뿐이었다. 정우는 내게 첫사랑이질 않았던가. "기화야. 다음 번엔...." 정우가 입을 연 순간 난 놀랍게도 새로운 희망의 감정에 붙들리게 된다.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거든... 앞으로는 우리 또래 남자 녀석들과는 만나지 않 는 게 좋을 거야." 내가 해줄 수 있는 도움말은 그뿐이라는 정우의 말을 듣는 동안 내가 떠올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경포대 바닷가에서 날 쳐다보던 정우의 눈이었다. 그 눈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과거는 훈장도, 또 아물 수 없는 상처도 아닌 그저 지나간 삶의 한 통과 지점에 불과할 뿐이라는 그의 목소리는 또 얼마나 정결한 울림을 자아냈던가. 나는 그때 그 눈의 순결함을 믿었다. 그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 데... 정우는 이제 내게 이별을 고하고 있질 않은가. "그리고... 녀석들이 원한다고 해서 쉽게 너의 전부를 주지 않는 게 좋을 거 야." 머리가 나쁜 나는 정우의 말의 뜻을 헤아리지 못해 그를 망연한 눈길로 쳐다 만 본다. 정우는 내 시선을 맞바라볼 수가 없었던지 고개를 탁자로 수그렸다. 내 얼굴이 차츰 달아오른다. 그러면서 나는 깨닫는다. 내가 그의 말뜻을 정말로 헤 아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러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는 정말이지 한 순간도 정우 곁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도 불구하 고 나는 일어설 수가 없다. 걸음을 떼어놓을 수 있는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는 제 몸 간수를 잘 해야만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게야. 어머니의 목 소리가 송곳이 되어 내 가슴을 파고드는데... 왜 나는 자꾸만 고개를 젓기만 하 는가. 뜨거운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우에게 눈물을 보여 서는 안 될 것이다. "기화야, 미안하다." 정우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짜증스러움이 드러난다. "정말 모든 것이 신파조다. 그렇지 않니?" 나와 너 둘다 참으로 구태 의연한 모습들이라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정우가 먼저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는 여전히 옴짝하지 않는다. 정우 와 나는 끝난 관계다. 믿기 어렵지만 정우 또한 자신의 어머니의 세계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이상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을까. 난 그저 혼자 있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전혀 사랑하지 않았던 전 남편과 정 우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점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 문이었을까. 사막의 한가운데에 놓여진 느낌에 휩사여든 참이었다. "넌... 기화야. 너란... 애는 끝까지 날 혼란스럽게 만드는구나." 정우는 다시금 내 옆의 의자에 털퍼덕 주저앉는다. "난 기화가 내게 매달려 오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넌 몹시 거침없고 용기 있는 애니까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상한 건 지금의 내 기분 이야. 형편없는 쪽은 나인 것 같고... 나한테 이따위 기분 들게 하는 기화가 괘씸 하게 여겨지고." 정우는 길 잃은 아이와 같은 표정인 채로 기화 너의 정체를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제발 말을 해봐, 기화야." 거듭해서 재촉하는 정우. "무슨 말을...." 정우와 나의 눈길이 부딪쳤다. "넌... 지금 나와 헤어진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어." 정우는 부르짖듯 말했고 그 순간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카페 '겨울'을 나오고 만다. 정우가 정말 지겨워진 탓이었다. 바람은 좀더 차가워져 있었다. 나는 고개 를 수그리지 않고 안간힘을 다하여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걷기 시작하였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그러나 난 정우에게 붙들리고 만다. "용서해 줄 수 있을까?" 정우의 목소리는 아주 낮다. 용서라는 말은 우습지만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따지지 않고 그러마고 말해 주고 싶을 정도로. "널 보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에... 오히려 억질 부렸던 것이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여 준다. 한숨을 크게 내쉬는 정우. 정우는 나와 나란히 걷는 다. 나는 혼자 집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지만 정우는 들은 척도 않고서 지나가 는 택시를 세우고선 나와 함께 탔다. 그의 친절함이 조금도 누르기 힘든 때문이 었으리라. 정우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한 그의 상념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택시를 세워 달라는 말을 하고야 만다. 내 어조의 절박함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던지 택시 기사는 별말 없이 차를 세 웠다. 정우의 미간이 찌푸러 들었다. 나는 혼자이고 싶다는 말을 했고 그는 이 시간 에 여자 혼자 귀가하게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는 말을 하였다. "내 말을 듣도록 해." 정우는 다정한 어조로 말한 뒤 택시 기사에게 다시 가 달라고 부탁했다. 택시 기사는 두 번씩이나 내 편이 되고 싶지 않았던지 정우의 말에 따른다. 정우는 마지막 순간까지 제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구나. 짜증이 치밀어 오른 나는, 그만 난 이제 정우의 여자가 아니라는 말을 입 밖으로 밀어내고야 만다. 침묵이 찾아왔다. 불편한 침묵. 그것은 형체도 없으면서 바윗덩이가 되어 가슴을 누른다. 이십여 분이 지났다. 늦은 시각이어서 택시는 거침없이 달려 정우와 날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앞에 내려놓고는 또 다른 손님을 찾아 떠났다. 정우는 쉽게 발걸음을 돌려 가지 못하고 머뭇대었다. 무슨 얘기가 또 남았다 는 것일까. 난 집으로 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깊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데 정우는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이 크 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를 편안하게 놓아주자. 내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 그 일은 생각보다 고통스럽진 않다. 어쩌면 나는 정우를 원망하기보다는 가엾게 여기는 지도 모르겠다. 내 자신이 어머니를 한 때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여겼듯 정우 또 한 그러하리라, 는 생각을 한 때문일 것이다. "기화가 이처럼 착하지 않다면... 내 마음이 훨씬 가벼울 수 있을 텐데...." "잘 가." 정우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나는 우리 집 쪽을 향해 걷는다. "기화야. 내 말 한마디만 들어." 정우가 곧 내 곁으로 다가왔다. "기화가 착하지 않다면 이 말도 안 하려 했겠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는 정 우가 날 놓아주지 않으리란 생각을 하는 나는 걸음을 멈추어 선다. "내 생각엔... 기화는 전 남편한테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기화가 내 누이라면 나는 그렇게 하게 할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눈을 감은 채. "내 충고를 황당하다고 여기지 말고... 남자들은 거의 엇비슷할 테니까... 첫 남 편이 그래도 가장 안전하고 든든한 우산 노릇을 해 줄 거라고 믿어." 나는 이제 정우의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다. 아, 정우와 헤어지게 되어 얼마 나 다행인가. "내게 필요한 것은 우산이 아냐." 정우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서 다시 한 번 되풀이 말했다. "우산 속에 있으면 비에 젖지 않아. 구태여 알몸으로 비를 맞을 필요가 어디 있겠어?" 어떻게 하면 정우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정우를 뚫어져라 쳐다본 다. 아... 하지만 그 말만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정우로부터 놓여나려면 다 른 방법이 없질 않은가. "정우 씨가 어머니 핑계를 대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내가 싫어졌다고 했더라 면 정우 씨에 대한 추억 몇 조각쯤 내 것으로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나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어느덧 등을 돌린 채 내 게서 멀어져 가는 정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이란.... 이세상의 끝에 내버려진 듯한 쓸쓸함. 바로 그것이다. 칼날 같은 빗줄기가 등 으로 박혀드는 것도 같지만.... 그러나 나는 견디어 낼 것이다. 견디어 내어야만 한다. 그것이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내 몫이라면. 나의 쓸쓸함, 나의 외로움과 부디 친해져야만 할 것이다. 흥타령 지은이 박재희 1 - 이거이 꿈이여, 뭐여. 위이이잉 귀울음인가, 퉁소 속을 지나는 바람소린가, 도둑고양이 흘레 붙는 소 린가. 소풍 온 개구쟁이들처럼 뒤란의 왕대숲을 들깨우는 소리에 달실네는 간신 히 눈꺼풀을 열었다. 사르르사르르 댓이파리를 흔들며 바람 나부랭이나 찝쩍이던, 늘 듣던 바람소 리가 아니었다. 물결처럼 솨아 허리를 굽혔다가는 돌연 대노하며 솟구쳐서 몸통 을 맞부비며 울부짖는 대나무, 그 왕대숲을 통째로 뒤흔드는 바람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우수수 무리를 지으며 돼지우리 쪽으로 몰려가는 콩지스러기를 본 것도 같았다. 엊그제 서너 접의 곶감을 부리고 헐거워진 감나무에서 후드드 득 감잎들이 떨어지는 걸 본 것도 같았다. 꿈결인지 생시인지, 머릿속에 질펀히 엉겨 붙은 소리의 부스럼딱지들은 필시 비를 몰고 올 바람의 짓거리일 터였다. - 잠이나 한숨 들었남. 어둠 속의 몸을 배추벌레처럼 움츠리며 달실네는 세게 도리머리질했다. 잠자 리에는 들었으나 잠이 든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눈을 감은 채로 무당 방울 같은 색색의 소리 귀신들에게 머리 끄덩이를 휘돌림 당한 기분이었다. "야아, 자귀질하다 죽은 귀신 붙응겨! 거 좀 퍽퍽 못 찍냔 말여! 저런, 저런, 오메, 미련곰퉁이가 따로 없구마잉! 나무가 아야아야 할라, 이 오살할 밥통들아!" 소스라치게 놀라 달실네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얼쩡대던 잠이 찬물을 뒤집 어 쓰고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당신들, 할망구라구 얕잡다간 국물두 ㅇ응게 알아서들 겨. 이래 뵈두 노가다 판에서만 반생이란 말여. 눈 감구 아웅 헐라거든 모가지를 걸라구들!" - 뭔 놈의 잠꼬대여. 화다닥 장지문을 열고 서울네에게 지청 구를 주려다가 달실네는 쓴 물 삼키듯 이 말을 삼켰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으로 쓴 물을 삼킨 것이 처음이랴. 어제도 그제도 달실네는 서울네에 게 하고픈 말들을 서투르게 삼켰었다. "안 들려? 아, 방 하나 쓰자구우. 한 사나흘, 아니 한 달포쯤. 얼마 주면 되겠 어? 아, 특별한 일 따윈 없어. 서울 바닥이 하두 골지끈거려서 바람 쐬러 내려가 는 거라구. 정말 별일 없으니까 신경 끊구서 방값이나 불러. 얼마 주면 되겠어? 십만 원? 백만 원? 아, 그냥은 싫어. 글쎄 싫대두. 이런 답답이! 알았어. 이따 갈 게. 차가 끊어졌다구? 염려 푹 놔라. 자가용 타구 갈 테니까. 전화 끊어, 정순아." 날콩 볶듯 빠르고 급한 목소리를 한 바구니 쏟고 전화는 끊어졌으나 달실네는 어안이 벙벙하여 수화기를 놓지 못했다. 띠띠띠띠 다좆치는 신호음이 꼭 금방 전화한 서울네의 목소리 같았다. 서울네는 사십 년 전에 서울로 이사 간 뒤 만난 일조차 없었던 달실네의 소꿉 친구 덕례였다. 방금의 전화가 바로 그 덕례인지 아닌지를 목소리로는 알아보기 어렵지만, 높고 빠른 말투와 불여시라는 별명답게 깐죽거리는 낌새로 보아서는 영락없이 그 덕례임을 달실네만은 알 수 있었다. - 이기 뭔 씨나락 까는 소리여. '정순아'라는 끝말이 생급스럽고 흉물서러워서 달실네는 노래기 떨구듯 수화기 를 떨구었다. 환갑 진갑 다 지내고 칠순이 낼모레인 늙은이에게 정순아, 라니. 덕례야, 맞대거리 못한 게 쓴 물이 되어 목울대를 건드렸다. 더구나 생뚱맞게 여기 와서 무슨 바람을 쐬겠다는 말인지 깜냥할 수 없었다. 사나흘이든 달포든 간에 여기가 놀이터도 아니고 유원지도 아니고 그 흔해 터진 온천도 해수욕장도 아닌데, 남도 끄트머리 촌구석에 와서 바람은 무슨 바람... 나 무를 타고 오르는 덩굴풀처럼 주절주절 많은 말이 치받쳤다. - 장득만. 달실네는 급히 손가락으로 바람벽을 짚어서 서울네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손때 로 저러어서 희미하기는 했지만 장득만이라는 이름 곁에 전화번호는 있었다. - 오메, 미안혀서 워쩐다냐잉. 여그는 방이 셋뿐인디 말여. 하나는 고추를 널 어놔서 발 디딜 데도 ㅇ어라. 또 하나는 내 방인디 쪼까 헐어서 말시. 또오 우리 막둥이가 오믄 나랑 한방을 써얄 틴디... 미안혀서 워쩐다냐잉. 아, 느그 돈 있구 시간 있구 세월 좋은디 하필이믄 이런 촌구석에 와서 뭔 바람을 쐰다구 그래싸. 내야 느그 얼굴 보고 잡지만도, 그려, 처녀적 꽃바람 싱싱헐 때 보구는 여즉 못 봤응게 보고 접제잉. 그라믄 그란 줄 알구 퍼뜩 들가거라, 덕례야. 그렇지만 달실네는 02로 시작되는 그 전화번호를 끝내 돌리지 못했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달실네는 며느리를 불러 전화의 내용을 말했다. 집안을 구석구석 잘 치우고 저녁상도 잘 보도록 일렀다. 말을 다 듣고도 며느리는 멀뚱하게 서서 움직일 기 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긴 연우 애비가 죽은 뒤로 찾아오는 사람은 더러 있었어 도 묵어가는 손님은 없었던지라 이상해 할 만도 했다. "묵는 밥값은 주겠다여." 서울네에게 밥값 받을 생각이란 조금도 없으면서 달실네가 던딘 말이었다. '년'자에 개구리 배 터지는 힘을 넣어서 '서울년!'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마을의 말 돌림을 모를 리 없는 며느리였다. 이 마을에 삽 꽃은 이래 제일 큰 부자가 바로 서울네라는 것도 잘 알 터였다. 남편 장득만의 이름으로 된 선산 말고는 이 마 을에 밭 한 뙈기가 없는 서울네인데도 사람들은 서울 갑부라고 시샘하듯 수군댔 다. 누가 서울 가서 보고 온 것도 아니고 마을 동구에 반반한 정자 한 채 세운 일 없지만 - 덕수 장씨 문중에 제각을 마을 복판에 떠억 지은 일 말고는 - 사십 년 세월 저켠에서 마을을 뜨고도 여태껏 토박이들 입질에 시달리는 서울네였다. "뭔 밥값이다요. 엄니 소꿉동무람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발걸음 가벼이 부엌으로 향하는 며느리 뒤에다 달실네 는 한마디 덧대었다. "십만 원이든 백만 원이든 부르는 대로 준디야." 불침 맞은 듯 화급히 돌아보는 며느리의 토끼눈에다가 달실네는 자신도 모르 게 배시시 웃음을 보였다. 그날로 자가용을 타고 온다던 서울네는 이틀이나 지난 해거름에야 왔다. 이제 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송이볶음도 닭도리탕도 다 동난 뒤여서 달실네는 적이 당 황했다. 달실네를 더욱 놀래킨 것은 서울네가 가져온 짐보따리였다. 장롱만 없다 뿐이지 웬만한 집 이삿짐 같았다. 서울네는 자가용이라기엔 좀 뭣한 트럭의 앞 자리에서 내리자마자 운전사에게 한 자 겨웃 넓이의 아랫방 툇마루를 가리켰다. "짐은 저기다 부리구 빨랑빨랑 가라구. 길이 좀 멀어야지. 후지긴 또 얼마나 후지구. 성질 같아선 아스팔트를 십 차선으루다 쫘악 깔구 싶다만. 아유, 엉덩짝 아파 죽겠네!" 말눈치로는 엄청나게 변한 고향길 찾아오느라 꽤 고생했나 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끼리 눈인사 차릴 겨를도 없는 사람 같았다. 덕례. 친정집에 온 양 만만하게 들어선 여자는 분명 이덕례였다. 언뜻 보기에도 달 실네보다는 열 몇 살이나 젊어 보이는, 늙은이라기엔 좀 이른 중년의 여자는 분 명 사십 년 전에 샛터를 등진 덕례였다. 웃을 때면 눈꼬리가 샐쭉 올라가고 보 조개가 얄밉도록 옴쏙 패이던 처녀적 모습은 간 데 없이, 허리며 배에 군실이 보기좋게 붙은 서울네였다. "이기 다 뭔 짐이여?" 자동차소리에 놀란 양 헐레벌떡 텃밭을 뛰어나오는 며느리를 보며 달실네는 짐짓 볼멘소리를 냈다. "잘 있었어?" 달실네에겐지 며느리에겐지 모르게 말을 건네고 서울네는 손수건으로 목덜미 께를 활활 부채질했다. 서울네는 혼이 달아난 듯 멀뚱하게 선 허리 구부정한 백 발의 달실네와 스물 몇 살에 본 박정순의 모습이 조금도 헷갈리지 않는 모양이 었다. "편안하셨어라우?" 며느리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럼, 그럼. 잘 있었구말구. 아유, 이렇게 조신한 며느리가 삼시 세 때 따신 밥 지어 바치니 네가 그렇게 살이 오동통 찌지. 후분 팔자가 처억 늘어졌어, 년." 며느리 앞에서 정순아 어쩌구 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싶어서 달실네는 서 둘러 서울네의 손을 끌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니, 저 짐은 모두 어째라우?" "아, 그거. 나둬, 놔둬. 한숨 돌리구 나서 내가 치울 테니까." 뭐라고 하려는 달실네를 손막음하고 서울네가 며느리에게 일렀다. "아가, 시원한 냉수 한 그릇 줄래?" "예에." 조금 뒤 며느리가 쟁반에가 누리끼리한 꿀물을 받쳐들고 왔다. 서울네는 낚아 채듯 대접을 받아 꿀꺽꿀꺽 소리나게 들이켰다. "어, 시원타!" "웃뜸에서 사온 진짜배기 꿀이라요." 돈 든 보람을 느끼는지 쟁반을 들고가며 며느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말야, 정순아." 며느리에겐 대꾸도 없이 서울네가 달실네의 무릎을 쳤다. 드디어, 라고 달실네 는 생각했다. 사십 년 간 호적에서나 써먹는 박정순이란 이름을 가까이에서 듣 게 되는구나, 하는 감회 때문이 아니었다. 소꿉동무 네 사람 중에 산 사람은 박 정순과 이덕례뿐이니, 세상에서 '정순아'를 부를 사람이 덕례인 건 당연했다. 그 럼에도 왜 이리 가슴이 떨리는 것일까. "나, 잠 좀 잘게." "뭐여? 어디서?" "아, 여기서. 여기가 내 방 아니니?" "그려. 여그서 같이 자야제." "같이? 아유, 난 같이 못 자. 너 딴 방 없니? 옆에서 누가 부스럭대면 토옹 잠 을 못 자서 말야. 내가 전화로 그랬잖아. 방하나 쓰자구." 나무라는 말투에 놀라서 달실네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뭐라고 했다가 는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몰아붙일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그려, 그려, 여그서, 이 안방에서 혼자 자더라고. 잔 뒷방을 쓸 텡게." "뒷방이 있어?" 대답 대신 달실네는 얼른 장지문을 열어서 뒷방을 보여주었다. 바둑판 위의 텔레비젼과 높이 쌓인 이불과 거울이 삭은 앉은뱅이 장롱 사이로 사람 하나 겨 우 누울 만한 자리가 나타났다. "이만허믄 넉넉제잉." 여차하면 며느리와 한방을 쓰게 될 것 같아서 달실네는 괜찮다는 고갯짓을 하 며 재빨리 장지문을 닫았다. "나, 잠 좀 잘게." 진자주빛 비로드 원피스 위의 얇은 덧옷을 벗어 발밑으로 던져놓고 서울네는 목침을 당겨 머리에 괴었다. "곤한가벼." 달실네가 뒷방에서 이불과 베개를 내었을 때 서울네는 이미 축 널브러진 채 깊이 잠에 빠져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록 서울네는 잠에서 헤어날 줄을 몰랐다. 부스럭 대면 못 잔다더니, 거칠게 흔들어 깨워야만 겨우 가자미만큼 눈을 떴다. 뒷간 출 입도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떠가며 했고, 며느리가 시아버지 생일상만큼이나 떡 벌어지게 차려오는 밥상도 숟갈을 드는둥마는둥 하고 놓았다. 그리고는 내쳐 잠 이었다. 찾는 거라고는 냉수 한 사발, 커피 한 잔뿐이었다. 이따금 전화 온 데 없느냐고 묻긴 했으나 딱히 기다리는 눈치는 아니었다. - 하마 일났능감. 다섯 번을 치는 시계소리와 조심스레 마당을 지나는 발소리가 어둠 속으로 들 어왔다. 이어 뭔가를 쌓는 소리, 고르는 소리, 비료 푸대 꺾는 소리들이 바람에 섞여 간간이 들렸다. 어제 며느리가 날 저물도록 솎은 늦배추와 고추 농사 짓는 집이라면 거들떠도 안 볼 서리 맞은 어린 고추와 달실네가 벗겨 가른 도라지 한 삼태기와 곶감 지스러기가 장에 나갈 채비를 차리는 소리일 것이었다. 제 몸보다 큰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여섯 시 차로 나가서는 언제나 마을에서 제일 좋은 값에 팔고 아홉 시 차로 들어오는 며느리였다. 봄철에는 질경이, 참비 름, 다북쑥, 명아주 따위를 캐어 장에 냈다. 여름에는 장대비 쏟아진 이튿날로 소나무밭을 쏘다니며 송이버섯과 고사를 해다가는 냈다. 가을에는 유자, 단감, 배, 밤 따위를 냈으며, 만물이 뼈뿐인 겨울철에는 땅에 묻어 둔 도라지, 더덕, 무 따위를 캐내어 돈을 만드는 며느리였다. 농사꾼보다는 장사꾼의 아낙 노릇이 제 격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재가 밝은 며느리지만, 그래서인지 달실네에게는 고린 전 한푼 용채 삼아 준 적이 없었다. - 워쩐다요, 엄니. 연우가 그새 또 등록금을 달라누먼요. 기성회빈가 뭔가도 내야 된다요. 책도 사야 쓴다는디, 오메, 워쩌까잉. 딴 주머니 차는 달실네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들으란 듯이 돈걱정을 할 때면 제일 민망했다. 영감이 땅 마지기나 남기고 죽었으니 망정이지 아들없는 며느리 밥 얻어먹기가 이 시린 날은 참말 무덤에라도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그러잖아도 며느리에게 용돈 얻어 쓸 생각은 조금치도 없는 달실네였다. 막둥 이 길수도 지난 달 회사에 들어갔으니 설령 며느리가 돈주머니를 내준다고 해도 마다할 달실네였다. 에미의 치맛바람 한 번 쐬지 않고도 유 학년 전체 수석이라 나 뭐라나, 공부를 잘하는 장손자 연우가 기특하고, 늘 누런 코를 훌쩍이고 다니 면서도 고뿔 한 번 앓는 일 없는 둘째 손자 성우가 기특하고, 또 밥사에 비린 것 떨어지지 않게 해주는 며느리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울 뿐이었다. - 그만 일나야제. 누웠음 뭐혀. 첫차가 떠나는 소리, 암탉들이 꼬끼오 우는 소리, 동네의 개들이 요란스레 짖 는 소리에 더는 누웠지 못하고 달실네는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을 더듬어 은비 녀를 찾아서는 입에 물고, 손빗질로 가지런히 머릿결을 빗어다 똬리를 틀어서는 가운데다 은비녀를 단단히 질렀다. "웬 잠을 그리 퍼잔다냐." 그저께처럼 어저께처럼 똑같은 아침 인사를 중얼거리면서 달실네는 장지문을 열었다. 곧 살금살금 서울네 옆을 지나서 방문을 열고 나갈 참이었다. 허나 장지 문턱을 넘다 말고 달실네는 흠칠 놀라 그 자리에 섰다. 희부연 봉창의 빛을 받 으며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은 사람 때문이었다. "오메, 언제 일났능감?" "...." "바람이 꽤 시끄럽제잉." 달실네는 천천히 몸을 전기 스위치 쪽으로 움직여갔다. 켜야 될지 안 켜야 될 지 몰라서 몸이 더 굼떴다. "내가 언제 여기 왔니, 정순아." 서울네의 말소리에 놀라서 달실네는 하마터면 자리끼로 떠놓은 사발 물을 밟 을 뻔했다. "나, 나흘 돼, 됐제. 그, 그것두 모르구 죽은드키 잠만 잔겨?" 쑥쓰러움과 무안함이 범벅된 목소리였다. 형광등은 몇 번 깜박이다가 이내 환 해졌다. 헝클어진 파마 머리, 아직도 윤관만은 뚜렷한 입술 연지, 구겨지고 먼지 낀 비로드 원피스가 불빛을 받았다. 어느모로 보나 옛날의 샛터 미인 이덕례는 아니었다. 방물 판만 보면 환장하고 달려들던 처녀, 마을에서 제일 먼저 귀를 뚫 어 귀걸이를 달고 다니던 멋쟁이의 모습은 어느 한구석도 남지 않았다. 첫날의 그 수선스러움은, 집주인의 안방을 뺏은 그 당당함은 잠 속에 묻어 둔 모양이었 다. 뭔가에 지치고 지친, 뭔가에 닳고 또 닳은, 칠성판에 눕혀도 까탈없이 잠들 것 같은 얼굴의 서울네였다. "전화... 나 찾는 전화 없었니? 회장님이라든가, 이 여사님이라든가... 그렇게 찾 는 전화 말야." 실성한 듯 보이나 낯빛보다는 또렷한 말씨여서 달실네는 마음을 놓았다. "ㅇ었는디. 기다리는 전화 있능가베. 아, 그리 속 타믄 먼첨 걸잖쿠서." 선반의 전화기를 내리려고 일어서는 달실네를 만류하듯 서울네는 방문을 열구 나갔다. 열린 방문으로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바람덩이에 몸서리를 치며 달실 네는 궁둥이를 덮는 털조끼를 찾아 입었다. 말이 좋아 가을이지 추석 명절을 쇠 고 나서는 찬물에 손 담그기도 섬뜩했다. "웬 바람잉감." 방문을 나서니 바람은 왕대숲뿐 아니라 온 천지를 뒤흔들고 있었다. 여름이라 면 장마를 몰고올 바람이요, 겨울이라면 눈보라를 몰고올 바람이지만, 이 가을에 새삼 태풍이 올 리도 없고보면 이상한 조짐이기는 했다. 뒷간에라도 가는 줄 알 았던 서울네는 마루 끝에 서 있었다. 바람을 보는지, 바람에 휘둘리는지, 어두워 서 얼굴빛을 살피기는 어려웠다. "아무려나 다행이제잉. 얼추 가을걷이는 끝냈으게 말여."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고무신을 찾아 신고 달실네는 하늘을 보았다. 새까만 하늘에 많고 많은 별들이 성우놈 눈동자처럼 반짝반짝 빛을 냈다. 2 별밭 고르고 쾌청한 날씨였다. 더위가 시작된다고는 해도 아직은 그늘 밑이 서늘한 때였다. 날이면 날마다 벌건 햇덩이가 두말봉 꼭지에 걸렸지만 단오빔을 하기 전에는 어느 집이나 부체조차도 내놓지 않았다. - 오늘이 단오랑게. 푸른 댓잎을 팔랑이며 이 집 저 집늘 기웃거려 보는 오십 척 대나무숲도 오늘 따라 괜스레 정겨웠다.. 마을의 여기저기를 두루 도는 척하다가 아랫마을로 뻗은 샛강 꽁지에 척 들붙는 개울물도 정겨운 단오였다. 오늘만은 수건 동이고 땡볕에 나앉지 않아도 되었다. 고무래로 아궁이를 쳐내 다가 재를 뒤집어쓰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어제는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 아 반드르르 윤을 냈고, 화채 거리로 앵두를 한 소쿠리 따다 놓았고, 수리치떡 빚을 어린 쑥도 말끔히 다듬어 놓았다. 득만이가 샛강에서 잡아다 준 준치도 양 푼으로 가득 넘치니, - 오매, 좋은 거! 정순의 입은 저절로 벙글어졌다. 그뿐이랴. 난생 처음으로 황소꿈을 꾼 것이었 다. 득만이가 황소를 타고 가면서 따라오라고 손짓하지 않았던가. 따라가려고 허 우적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꿈을 깼지만, 황소꿈이라니. 정순은 꿈에 황소를 만난 것이 참으로 꿈만 같았다. "황소만 타믄 말여. 득달겉이 달려올 텡게 아무 디도 가덜 말고 집에 딱 붙어 있으란 말여. 느그 아부지헌티 넙죽 절 허구설랑은 널 색시루 달랄 꺼니께. 알겄 제?" 준치를 양푼으로 옮겨 담다 말고 정순의 입귀가 길게 올라갔다 요즘 들어 매 일이다시피 듣는 말인데도 들을 때마다 가슴속이 환해지는 걸 어쩌랴. 그렇지만 정순이 또한 언제나처럼 득만이에게 퉁바리를 놓았다. "치이... 허풍은. 아, 딴 마을 남정네들은 씨알머리두 ㅇ는 줄 아나베? 석구만 혀도 니보담은 머리통 하나가 크잖여? 윗마을 덕수두, 종욱이두, 장신이두 모다 니보담 크든디 워쩔 꺼여? 갸들은 모두 팔다리 비끄러맹 꺼여? 그래두 황소가 니꺼여? 치이..." 키는 작아도 유난히 주먹이 큰 득만이었다. 실팍한 가슴, 떡벌어진 어깨, 발 빠른 득만이를 당해 낼 남정네는 없으리라 믿는 정순이었다. 괜히 해보는 투정 인 줄 알면서도 득만이 또한 지지 않았다. "그눔들 다아 속 빈 강정이여. 허우대만 멀쩡허제 붕알에 단물두 덜 든 놈들이 랑게?" "뭔 말을 그리 흉허게 허능감?" "일테믄 그렇다아 이 말이제. 아, 워디 씨름이 덩치루 가간? 씨름은 거 뭐이라, 순발력이라는 거, 그거이 좋아야 혀. 제아무리 힘이 장사래두 기술 ㅇ으면 말짱 헛거랑게." "치이..." "얄밉게시리 입 삐죽이지 말구설랑 그저 니는 꿈이나 자알꾸란 말여. 용꿈도 좋구 돼지꿈두 좋으니께. 알겄제, 요겄아!" 소리가 나도록 군밤을 먹이고 으하하하 되바라지게 웃으며 득만이가 고샅길로 줄핼랑을 놓은 것이 바로 어제였다. 그런데 황소꿈이라니. 용꿈이나 돼지꿈은 아 니었지만 정순은 결코 그것에 뒤지지 않는 꿈이란고 생각했다. 올해 해토모리부터 시작된 득만의 꿈은 곧 정순의 꿈이었다. 아니, 작년 단옷 날 웃뜸에서 벌어진 씨름 대회에서 시작된 꿈이라는 게 옳겠다. 씨름판 틈틈이 연분홍 치마 저고리 차림의 처녀가 들노래, 육자배기, 흥타령 - 특히 흥타령은 박수소리가 끊어지지를 않아서 씨름판도 쉴 겸 두 번이나 더 불러야 했다. - 을 부를 때 넋을 앗긴 당지마을 총각이 바로 장득만이었고, 씨름의 마지막 판에서 메치기당한 총각이 저물도록 모래판을 치며 통곡하는 것을 지켜본 샛터마을 처 녀가 박정순이니 말이다. 본디 놀기 좋아하고 술 마시기 좋아하고 처녀들 곯리기 좋아하고 힘 자랑하기 좋아하는 득만이었다. 노래는 지지리도 못하지만 장단 맞추기는 워낙 좋아해서 젓가락이건 지겟발이건 잔가지를 치는 손도끼까지도 그의 손에 뒤어지면 음악소 리가 났다. 음률에 좀 밝은 어른들은 그가 지나가면서 무심코 두드리는 지겟발 장단에 목 이 근질거려서 참지를 못했다. 꼭 당나무 밑으로 끌고가서 백발가든 청춘가든 그 장단에 소리목을 풀어야만 간신히 놓아주었다. 시누대에 구멍을 뚫어 피리소리를 낸다거나 대나무로 퉁소를 만들어 부는 일 따위는 예사였다. 짤막한 밀짚 토막이나 버들가지의 통껍질로도 그는 귀신 부르 는 호드기소리를 곧잘 내었다. 감잎, 뽕잎, 담뱃잎까지도 그의 입술에 닿으면 그 대고 삐르삐륵삐이 음악소리를 냈다. 정순이도 재 넘어 당지마을의 명고수 장득만을 귀동냥으로 익히 알고는 있었 지만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장득만 또한 호드기보다 고운 목청으로 노래하는 처 녀를 만나기는 처음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명년 단옷날의 씨름 대회를 기다리며 꿈을 키워 온 것이었다. "절대루 씨름판에 얼쩡대문 안 돼야. 사람덜이 또 니보구 노래허라구 헐 텡게. 알겄제?" "알았응게 니나 몸조심 혀. 이겼다구 우쭐해서 술 퍼마시믄 안 돼야 잉? 어른 들이 권해두 입에 대는 척만 허란 말여. 알았남?" 어젯밤에도 두 사람은 절터에서 굳게 다짐을 주고받았다. 달이 왕소나무를 지 나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올라왔을 즈음에는 이미 호리병의 고구마술을 비워진 뒤였다. 술이 오르는지 득만이가 팔베개를 하고는 길게 누웠다. "아이고 대고 gm응... 성화가 났네 흐응...." 낯을 씻거나 밥을 먹을 때는 가슴 가득 고여 있다가도 행주를 집어들거나 호 미를 잡을라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졸졸졸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노래였다. 새삼 목을 가다듬거나 풀거나 헛기침으로 청을 맑히지 않아도 되었다. 높낮이에 걸림 이 없도록 정순의 목소리는 늘 시월하고 부드럽게 트여 있었다. 그 목소리를 놓 칠세라, 손톱으로 호리병을 두드리는 득만의 손장단이 따라왔다. "우레같이 소리나는 임을 벌개같이 번득 만나 비같이 오락가락 구름처럼 흩어 지니 심중에 바람 같은 한숨이 안개처럼 흩어져라아...." "좇제!" 득만이가 발을 구르며 추임새를 넣었다. "어찌 그리 목이 고운가!" 한숨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가 득만의 입술에서 새나왔다. "참말로 사람소리 겉지 않네잉." "새삼 뭔 말잉감?" 달빛뿐인 침침한 어둠 속에서 뒤를 힐끔 돌아보며 정순이는 짐짓 눈을 흘겼 다. 늘 듣는 소리인데도 득만의 칭찬에는 언제나 가슴이 빛으로 가득 차는 정순 이었다. "꾀꼬리가 따로 없네잉." "치이... 사람덜은 내 목청이 니 퉁소만 못허다고 흉보든디?" "아녀, 아녀. 서울 가믄 명가수 깜이여. 딴 디서는 그러코롬 노래 부르믄 못써. 알제? 돼지 겉은 놈들이 흰 눈을 까발기며 달려들믄 워쩌냔 말여." 정순이는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이 바로 곁에 있다고 생각하니 콧날이 시큰 하도록 기뻤다. - 에그, 그눔의 주둥이 좀 다물어라잉. 아, 바뻐 죽겄는디 일손이 잡혀야 말이 제. 아, 그 코맹맹이소리 당장 못 집어칠껴! 하루에도 몇 번씩 부모님께 꾸중을 들으니 동생들도 언니를 밉상으로 여기는 데 득만은 달랐다. 정순이 노래를 잘한다고 부추겨 줄뿐더러 허기지도록 밤새 노래를 불러도 군 소리 한마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들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득만이밖에 없 었다. 그와 혼인한다고 생각만 해고 정순의 가슴은 둥당둥당거렸다. 혼인만 하면 설거지하면서, 불 때면서, 나물 뜯고 밭 매면서도 거리낌없이 실컷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황소야 퍼뜩 이리 오너라잉. 정순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가슴 복판에 모두었다. "말 안 헐라구 혔는디...." "뭔디? 아, 싸게 말혀." "저어... 어제 보성에서 사람이 왔는디." "그란디? 어여 털어놔!" "별말 아니여. 그냥 저어... 보성 장날에 나오라구... 노래자랑허는디 돈두 주구 선물두 많이 준다잖여. 일등만 허믄." "그려서, 나간다구 혔단 말여?" 목소리를 높이는 득만의 등에 정순의 손이 닿았다.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리고 손은 곧 떨어졌다. "염려 놓으랑게. 당퇴 말두 꺼내지 말라구 딱 잡아뗏만 말여." "그려, 그려 잘혔구먼." 득만이는 다시 두 손으로 머리를 괴고 뒤로 벌렁 몸을 눕혔다. "어여, 또 불러보더라고." 노래를 하는 대신 정순은 득만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다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 밀었다. "치이...," "아, 왜 또 그러능겨. 노래허라니께." - 오늘 아침에 덕례네 누렁이 잡아 묵었담서? 따지고 싶었지만 정순은 참았다. 내일 씨름에 나갈 사람에게 개는커녕 애돼지 한 마리도 못 잡아 먹인 것이 미안해서였다. 눈을 감고 오직 정순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기만을 고대하는 득만이 믿음직해서였다. 3 "엄니, 이기 겁나게 비싼 낙지라요, 잡숴보시요잉." 장이세 돌아온 며느리가 급히 차려낸 밥상에는 별나게도 비린 반찬이 많이 올 라 있었다. 쇠고기 장국이야 며칠 전에 밑반찬으로 끓여 놓은 것이니 그렇다 치 지만 병어튀김이며 산낙지와 꼬막무침이 여느 때와는 달랐다. 꼬막만 해도 그랬다. 보통 된장을 멀겋게 풀어서 찌개인 양 국인 양 끓이는데 오늘은 알맹이만 발라서 갖은 양념으로 무친 것이었다. 목구멍에 쩍쩍 달라붙으 며 넘어가는 고소한 산낙지도 생일날 외에는 먹어본 적이 없었다. 낙지를 고르 던 젓갈질을 멈추고서 달실네는 남은 밥을 국에 부어 후르륵 마셔버렸다. "더 드시오, 엄니. 찬이 입에 안 맞으요?" 병어살을 성우의 밥숟갈에 얹다 말고 며느리가 토끼눈을 떴다. 아마도 달실네 와 거의 동시에 굳강을 놓는 서울네에게 묻는 말이리라. 서울네의 밥그륵은 고 봉으로 올린 윗밥만 슬며시 깎여 있었다. "아냐, 아냐. 간이 썩 좋은데. 난 실컷 먹었으니 어서 애나 멕이라구." 실컷 먹다니. 더덕구이와 물김치와 메밀묵이나 좀 건드렸을까. 그러나 서울네 는 정말로 맛나게 먹었다는 듯이 넓적한 얼굴 가득 헤픈 웃음을 퍼뜨리며 아직 숟갈도 들지 않은 며느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배가 좀 나온 것 말고는 뚱뚱하지 않은 몸피였으나 그 배가 웃음소리를 따라 꿀럭였다. 아까도 저런 헤픈 웃음으 로 며느리의 혼을 뺀 것이 아닐까. "우선 찬값이나 하라구." 돈을 만진 지 오랜 달실네로서는 열추 어림할 수도 없는 빳빳한 뭉칫돈을 꺼 내어 며느리 치마에 앵기며 서울네가 말했다. 대문으로 들어서는 바깥 시척만 듣고 서울네가 아가, 에미야, 성우 에미야, 불러댄 통에 놀라서 달려온 며느리이 니 아직 장보따리도 풀지 않은 채일 것이다. 온 지 나흘째지만 서울네가 그렇게 기세 좋게 며느리를 부르기는 처음이었다. 달실네조차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당차게 며느리를 불러본 적이 없었다. 더욱 이 아들을 잃은 지지난 해부터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나직이 에미야, 불렀을 뿐 담 밖으로 목소리가 튀도록 며느리를 불러보지는 못한 달실네였다. 치마에 앵기는 돈을 엉겁결에 끌어안은 채 며느리는 잠시 아무 말도 못했다. - 잠시 바람 쐬러 왔담서 소꿉친구끼리 이기 뭔 해괴헌 짓이여. 이렇게 퉁을 줘야지, 벼르면서도 달실네 역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뱀껍질처 럼 번들번들한, 말로만 듣던 악어 가방 속에서 의뭉하게 똬리 틀고 앉아 살모사 대가리처럼 시퍼런 귀퉁이만 내민 지폐 뭉치 때문이었다. 말만 잘하면 어느 때 든 가방을 열고 한 움큼씩 집어내 줄 것 같은 서울네의 헤픈 웃음 때문이었다. 영감이 영면했을 때의 조의금 이후 처음 보는 뭉칫돈이었다. 그 조의금이 목숨 과 바꿔치기한 양 징해서 이후로 낱돈 만지기도 싫어진 것이니 돈 모양조차도 낯선 달실네였다. "아가, 따끈한 커피 한 잔 줄래?" 썩은 밀가루처럼 칼끝도 안 들어가게 굳은 두 사람을 흔든 사람 역시 서울네 였다. 그제야 며느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둔 듯한 말을 두서없이 꺼내었 다. "돈은 뭔 돈이라요. 울엄니 소꿉동무람서요. 우리도 살 만큼은 사요. 쌀 있것 다, 밭에 푸성귀 널렸것다, 빈 방 있것다, 남정네도 ㅇ는 집이니께 맘놓구 푸욱 쉬셔두 되야요. 우린 참말이제 암시랑토 안 혀요. 울엄니 말벗이 생기니께 외려 좋은디 돈은 뭔 돈이라요. 돈은 뭔,,, 경우ㅇ이." 먼저 며느리가 질겁을 하며 왕지네 털 듯 손사래를 치고는 부엌문으로 나갔 다. 그 바람에 앵길 치마를 잃은 뭉칫돈은 가지런함을 허물고 소반만하게 흩어 졌다. 달실네가 해야 할 말을 며느리가 재빠르게 쏟아놓았으므로 그녀 또한, "커피는, 식전 댓바람에 뭔 놈으 커피여." 중얼거리고는 설사끼라도 있는 듯 허겁지겁 방을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 시에미보구 알아서 챙기라는 거여, 뭐여? 시꺼먼 물에다 노른자를 동동 띄워 방으로 들여가는 며느리의 뒤통수에 달실 네는 원망스러운 눈길을 꽂았다. 새벽녘의 바람은 아침이 되었어도 여전히 마당의 낙엽이나 콩지스러기를 휘몰 고 쏘다녔다. 대숲의 일렁임으로 보아서는 바람기가 숙은 것 같은데 털조끼의 앞섶을 헤치는 바람은 코끝에서 알짱대는 바람보다 한결 매서웠다. 밭두둑에 앉아 철 늦게 올라온 당파며 시금치 따위를 일 삼아 거두어서 달실 네가 돌아왔을 때 돈은 다시 가지런한 모습으로 선반에 올려져 있었다. 돈 말고 도 악어 가방, 작은 보석 상자, 드라이어, 커피병 같은 낯선 물건들이 선반이 좁 아라고 들어 차 있었다. 때 절은 왕골 바구니와 약상자와 전화기는 어디다 치웠 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눈에 선 것이 비단 선반뿐은 아니었다. 한 벽을 온통 물들이며 걸린 옷들도, 장지문을 허리 높이로 가로막은 이불도 방문을 반의반쯤 막고 선 이 층짜리 화류장도 모두 처음보는 것들이었다. 미루어오더니 첫날 툇마루에 부 려 놓은 짐더미를 이제사 풀었는가 보았다. "엄니, 저 옷들 다아 엄니 드린다요, 서울엄니가." 아침상을 들여놓고 며느리가 한쪽에 쌓인 울긋불긋한 옷들을 턱짓했다. 찹쌀 을 섞었는지 자르르르 윤기도는 밥맛이 없는데도 억지 춘향이로 고봉밥을 비운 까닭이 알아지는 것 같았다. - 서울 엄니? 남정네두 ㅇ응게 푸욱 쉬라구? 누구 맘대루? 덕례, 지년이 뭔 낯으루다 내 집 문턱에 발을 들인다여?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누르느라 달실네는 뜨거운 숭늉을 입바람 불 새도 없 이 서둘러 들이켰다. 그래도 여태껏 먹은 산낙지들이 떨어진 제 발들을 찾으러 목구멍 가득 기어오르는 아주 고약한 느낌을 떨쳐버리기는 어려웠다. 4 밑 모를 고약한 기분에 곤두박질치던 그 처음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단옷 날이었다. 준치국이며 앵두 화채며 수리치떡까지 채반 가득 부쳐 놓고 정순이가 허리를 폈을 때 라디오는 정오를 알렸다. 사윗감과의 첫 만남은 부모님에게도 즐거운 일인가 보았다. 마당 구석에서 닭 털을 뜯으며 주고받는 입씨름이 한결 정답게 들렸다. "아따, 거 임자는 단옷날 항우장사헌티 막걸리 못 ㅇ어 묵으믄 여름내 더위 탄 다는 속담도 모르능가베." "뭔 걱정이다요. 항우장사가 집으루 와설랑은 철철 넘치게시리 술사발을 올릴 틴디." "이제 정온가 본디 은제나 온디야. 목 타 죽겄네잉." "황소를 타두 곧장은 못 올 게라우." "그라제잉. 황소 타구설랑은 마을마다 한 바퀴 돌아야 헐 텡게." "씨름판 생각 그만허구, 거 털이나 야물게 뽑으쇼잉." "암튼 말여. 머리털 나구는 첨잉게 알구나 있으란 말여." "오메, 이 양반. 씨름판 귀경 놓치믄 병날 사람 겉네잉." 어머니의 호들갑이 웃음을 터뜨렸다. 밝은 감빛 햇살이 이제 막 댓돌 위로 올 라서는 참이었다. 아버지가 집 안팎을 빗자국이 나도록 쓸고 황소금을 뿌리는 사이에 어머니는 약밥과 수정과를 안쳤으리라. 오가며 들은 소문은 많아도 부모님이 직접 득만이를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처가에다 황소 한 마리를 갖다 바치지 않고는 절대로 딸을 달라지 않겠다는 득 만의 고집 때문이었다. - 맹물 떠놓구 맨숭허니 그냥은 못혀. 넘의 집 귀헌 딸을 그러코롬 데려와서 야 쓰것남. 도둑놈 심뽀제. 세 딸의 맏이로 태어나 허드렛일꾼처럼 구박만 받고 자란 정순에게 득만의 고 집은 더없이 귀중한 것이었다. 지금껏 아무도 그녀를 귀하게 여겨준 사람이 없 었다. 말뿐이언정 말 한마디, 눈짓 한 번 따듯하게 받아보지 못한 정순이었다. 황소라니, 모자란 데 없는 남자가 못난 딸을 달라고 나선 것만으로도 애물덩어 리를 치우는 양 반가워할 식구들에게는 참으로 감지덕지할 혼례품이었다. 타고난 목청으로 노래 하나 잘 부르는 - 그것도 식구들은 간살맞은 코맹맹이 소리라고 싫어했다 - 것 외에는 내놓을 것이 없는 그녀였다. 작달막한 키와 오 종종한 얼굴은 그렇다지만, 특히 몸매와는 어울리지 않게 펑퍼짐한 엉덩이에 득 만의 눈길이 머물면 정순은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쩌다 득만의 손 이 손을 더듬을 때에도 어쩔 수 없이 정순의 얼굴은 벌개졌다. 처녀답지 않게 굵은 손복, 불거진 손마디, 못 박힌 손바닥이며 지문 없이 두꺼운 손가락이 못내 민망해서였다. "농투사니 우리덜 손이사 다 같제. 누군 뭐 별난감." 뒷짐 진 손을 우악스럽게 끌어다가 솥뚜껑만이나 넓은 자신의 손바닥에 얹는 득만이었다. "하늘 아래 니겉이 맘 넓은 사낸 다시 ㅇ을 꺼여." 글썽이던 눈물을 기어이 쏟으며 정순이가 훌쩍이면, "어여, 한 가락 뽑더라고 잉. 하늘 아래 니겉이 멋들어지게 노래하는 처녀두 ㅇ응게 말여." 씨익 웃으며 그 큰 귓바퀴를 정순의 입 가까이 대는 득만이었다. 그럴 때면 으레 그가 늘상 가슴에 꽂고 다니는 긴 퉁소가 그녀의 젖부리를 살짝 건드렸다. 댓돌에서 놀던 햇살은 어느새 마루 끝을 따스하게 적시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소세를 깔끔히 하고서 정순은 마루에 올라 앉았다. 색경을 넘어지지 않게 세우 고는 대바늘로 머리에 가르마를 곧게 타서 동백기름으로 빤드르르 윤을 냈다. 엉덩이까지 찰랑대는 어리채도 세 갈래로 잡아 꼭꼭 땋아서는 고무줄을 칭칭 동 인 뒤에 빨간 비단 댕기를 들였다. "서둘 꺼 ㅇ응게 목간이나 혀." 부산떠는 딸이 못마땅한지 아버지가 말끝을 높였다. 삼월이라 삼짇날 제비 새 끼 봄나들이 바람개비가 떴다아 - 하다 말고 정순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 의 말소리가 높을 때만큼은 노래는 금물이었다. "혼인날두 아닌디 목간은 왜 헌다요. 남사시럽게시리." 손질 끝낸 닭 속에 밤, 대추, 인삼, 찹쌀을 잔뜩 넣어서 어머니가 건네면 아버 지는 속이 나오지 않도록 닭의 양허리에 칼집을 내고 닭다리를 서로 꼬이게 집 어넣었다. "딸년 몸단속은 잘혔능감, 임자?" 음흉하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마루로 올라왔다. "오메, 이 양반! 별 흉측한 소릴 다 허네잉. 아그들 듣는 디서!" 어머니가 기급스레 목청을 높이는 바람에 놀란 아버지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 다. "아니믄 아니제, 뭔 소릴 지르구 난리여, 여편네가!" 바닥의 칼을 줍는 손에 매서운 성깔이 담겼다. "에잇! 빌어묵을!" 새삼 신경질이 뻗치는지, 잡고 있던 닭을 흙바닥에 패대기치고 아버지가 일어 섰다. "참, 아버지두. 지가 뭐 어린애간디요." 애교스럽게 웃으며 정순이가 마루에서 내려섰을 때 이미 아버지는 등을 보이 며 삽짝을 나서는 참이었다. 어머니를 도울까 망설이다가 정순은 색경을 버선목 에 넣고 집을 나왔다. 흙 속에 처박힌 계삼탕이 뱃구레 터진 짐승처럼 보기가 끔찍해서였다. 그날, 득만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돌아오기는 왔지만 식구들이 다 잠든 뒤 황소 등에 업혀서 돌아왔다. 그마저도 먼빛으로 동구에 들어서는 황소를 발견한 정순이가 엎어지며 넘어지며 달려 내려왔을 때는 이미 덕례 집으로 들어간 뒤였 다. "쉬잇, 억병으루 취한 걸 워쩌. 시방 골아 떨어졌으니께 밝는 날 보더라고잉." 지쳐 놓은 삽짝 밖으로 덕례의 오빠가 숨죽은 목소리만 내보냈다. "뭔 일루 이제사 온다요. 씨름은 버얼써 해거름 전에 끝났다든디." 원망과 반가움이 반반인 목소리를 다시 숨죽인 목소리가 막았다. 소리가 들릴 때마다 술내와 입구린내가 정순의 코를 찔렀다. "쉬잇." 여느 때처럼 임의롭게 덕례 집의 삽짝을 밀고 들어가려는 몸을 떡메 같은 남 자의 팔이 막았다. 돼지, 염소 따위의 집짐승을 도살하는 동네 대사 때마다 앞장 서서 도끼를 휘두르고 배를 가르는 일치레를 하는 덩치이니 정순은 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지가 묶인 기분이었다. "오메, 음전헌 처녀가 이기 뭔 짓이여. 이 야밤에 워쩔 꺼여어? 합방이라두 헐 참잉겨, 시방?" 기가 딱 막힌 채 입을 벌리고 선 정순에게 흐흐, 누린내 나는 잇몸을 달빛에 비춰 보이고 덕례 오빠가 들을 돌렸다. 다음날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설거지도 미룬 채 달려간 정순에게, "버얼써 새벽에 갔는디." 삽짝을 막고 서서 잇몸을 보이며 비아냥거린 사람도 덕례 오빠였다. - 술허구 웬수졌남. 몸뚱이가 술통이 되도록 퍼마시게. 아, 황소만 타믄 득달 겉이 달오마구 혔잖여. 그러니께 울엄니가 계삼탕꺼정 한 솥 끓여 놨제. 덕례가 아니었다믄 황소뿔에 받혀 죽은 뻔혔담서? 그기 참말여? 덕례 그 지지배 죙일 코빼기두 안 뵈든디... 참말여? 해 떨어지기 무섭게 정순은 통닭과 호리병과 고르고 또 고른 말을 목젖이 닿 도록 싸가지고서 절터로 나갔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기다려도 득만을 볼 수는 없었다. 그 이튿날도, 다시 그 이튿날도 득만은 절터에 얼씬대지 않았다. - 씨름판에서 겁나게 욕봤제? 그깟 황소 ㅇ어두 사위 구박헐분들 아니여, 우 리 부모님. 얌생이 과 준다구 벼르시든디, 은제 올겨? 투정은 싹 빼고 어르고 달랠 말만 가슴에 남았어도 정순은 득만을 볼 수 없었 다. 대신 까닭을 알 수 없는 소문의 형틀에 묶여서 정순은 숨도 제대로 쉬 수 없었다. 누가 누구를 먹었다는니, 누가 누구를 버렸다느니, 고약한 말질이 돌림 병처럼 마을에 돌고부터는 동네 사람도 집안 식구도 얼굴 보기가 소름끼쳤다. 왜 무엇 때문에,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갑자기 하늘이 새까만 먹통처럼 보이 는 것일까. 세상을 살기가 이리도 싫어지는 것일까. 끼니를 잇는 것이 이리도 징 그러운 것일까. 다시는 바람을 타고 흐르는 퉁소 가락을 들을 수 없으리라. 솥뚜껑 같은 손바 닥에 험투성이의 손을 얹을 수 없으리라. 퉁소가 젖부리에 닿는 것을 모른 척하 고서 아이고 대고 흐응, 하는 흥타령을 부를 수도 없으리라. "사내나 지집이나 그저 두리뭉실허게 생겨야제. 인물 잘나믄 못쓰능겨. 인물값 꼴값 두루 허기 십상잉게 말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득만네와 덕례네가 서울로 솔가했다는 말을 전한 다음 어 머니가 정순을 위로한다고 덧붙인 말이 고작 이것이었다. 뼈에 도배한 듯 깡마 른 딸의 얼굴을 맞보지 못한 채 어머니는 이를 옥물며 피눈물을 쏟았다. 5 "지옥 같애!"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찍어내며 서울네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부르르 머리 를 털자 불을 때던 달실네에게 물이 튀었다. "일, 일, 일! 그저 넌 밤낮없이 일이로구나. 예나 지금이나, 젊어서나 늙어서나 일벌레야. 지겹구 넌더리가 나지두 않니?" 서울네는 부엌 구석에 쌓인 볏단 하나를 가져다 아궁이 가까이 놓고 털퍼덕 주저앉았다. 그바람에 부지깽이로 불구멍을 터주다 말고 달실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 살판 났능감. 뭔 심술이여. 말을 내는 대신 달실네는 눈을 흘겼다.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 지, 서울네는 볏 단을 털어서 아궁이에 들이미는 중이었다. 타타다닥 발춤처럼 재빠르고 경쾌한 소리와 잔불꽃들이 아궁이 밖으로 나오자 서울네가 윗몸을 뒤로 젖혔다. "그만 때두 돼야. 웬만큼 엉겼응게." 몸을 일으켜서는 솥에 간수를 치고 달실네는 서울네와 좀 떨어진 곳에다 볏단 을 깔고 앉았다. 짚수세미에 재를 듬뿍 묻혀서는 놋그릇을 썩썩 닦기 시작했다. 스텐그릇이며 사기그릇까지 며느리는 푼돈이 목돈 되는 대로 사다가 쟁였지만 제사상에 올리기는 놋그릇이 제격이었다. 가스 렌지 놔두고 장작불에 두부 만들 기가 제격이듯이. "아, 일 좀 그만하구 쉬어. 쉬라구." 서울네가 돌아보며 쯧쯧 혀를 찼다. "일손 놓으믄 숨도 놓은 거이제, 워디 사능 거 겉응감." "아유, 이런 답답이. 어떻게 사람이 일만 하구 살아 그래. 짬내서 커피두 마시 구, 낮잠두 자구, 마실두 다니구, 음악두 듣고, 테레비도 보구 그래야 동물이 아 닌 인간이지. 며느리가 그러는 데 집 밖에두 안 간다며?" "나갈 일이 있어야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촌에서 밖일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덕례가 서울로 간 몇 년 뒤, 아버지의 주먹다짐을 못 견뎌서 쫓겨나다시피 시집 간 곳은 아들 둘 딸 린 홀아비집이었다. 열 살 아래인 새댁이 이뻐선지, 마을의 말돌임을 막아줄 셈 에선지, 그는 정순의 뜻대로 밖일을 시키지 않았다. 달실네 또한 죽은 듯이 들어 앉은 달팽이처럼 바깥 세상은 눈짐도 하지 않았다. 대낮에 나들이한 것은 친정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었을 때뿐이었다. 연우 애비 때에도 달실네는 물에 불어터 진 주검과 함께 병풍 뒤에 있으면서 문상객들을 보지 않았었다. "나갈 일이 없다구?" 기가 차다는 듯이 서울네가 뒤로 돌아앉으며 혀를 끌끌 찼다. 아랑곳없이 달 실네는 짚수세미 가득 재를 묻혀서 놋그릇의 더께를 힘들여 닦았다. "아유, 나갈 일이야 천지지. 테레비 보면서두 몰라? 넌 제주도도 울릉도도 못 가봤다며? 남들은 동남아루 유럽으루 날아 다니는 판에 넌 정말 딱하구나. 이제 어디 사람 사는 꼴이냐. 염라대왕만 없다뿐이지 여긴 지옥이라구. 밖에서는 달나 라를 가는지 별나라를 가는지도 도통 모르고 시골 구석에 두더지처럼 처박혀서 죽도록 일이나 하구 사니 원." 말 끝에 서울네는 다시 쯧쯧 혀를 찼다. 가마솥에는 허연 순두부가 불기운을 따라 떠다니며 구수한 냄새를 풍겼다. "불이나 꺼부러. 너무 쫄믄 두부맛이 ㅇ응게." 딱하다는 듯한 서울네의 눈빛이 보기 싫어서 달실네는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 다. 서울네가 코를 벌쭘이더니 잽싸게 돌아앉아 아궁이의 장작들을 꺼내어 재에 비볐다. 투실한 몸피에 비해 잰 몸놀림이었다. "노는 입에 염불허기제. 일 놓으믄 뭔 맛으루다 살 꺼여. 일맛이 나야 살맛두 나구 밥맛두 나능겨. 시상 귀경이야 가만히 방에 앉아 테레비만 봐두 실컷 허 제." 말하고 나자 새삼 지난 사십 년 세월의 무게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아서 달 실네는 짚수세미를 놓고 두 다리를 뻗었다. 일이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개 미떼처럼 달려드는 많고도 많은 시간들. 문어발처럼 휘어감고 놓아주지 않는 득 만과의 추억들. 버림받은 여자라는 그 뼈시린 눈총들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살아서 욕되느니, 이렇게 욕되게 사느니 차라리 죽으리라. 득만이가 준치를 잡 던 샛강에 빠져 죽으리라. 죽창처럼 날카롭게 베어낸 대밭에 엎어져 죽으리라. 흥타령을 부르던 절터에서 통곡이나 한바탕하고는 얼어 죽으리라. 기필코 죽으리라. 텃밭에 감자를 심고 나서, 고춧대나 세우고 나서, 콩이나 털 고 나서, 설이나 쇠고 나서 그리고 나서는 반드시 몸뚱이라는 욕된 껍질을 벗으 리라던 맹세는 언제나 그 다음 일에 치여서 다시 미루어졌다. - 또 하루가 가부렀네잉. 막막하게 남은 길고긴 세월의 길이에 몸서리치며 흐느껴 울면 어둠 속으로 퉁 소소리와도 같은 나직한 득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밤도 있었다. - 니는 성깔이 물러서 탈이여. 원체 모지락스럽지 못허니께 평생 손해만 보구 살 게 뻔혀. 니가 잘허는 거라곤 노래뿐이여. 정순이 흥타령은 서울 가믄 명가수 깜이제. 어여 노래나 뽑아봐. 집 뒤로 유자나무밭을 병풍처럼 감싸면서 치솟은 대밭은 시집 온 첫날부터 달 실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득만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퉁소 가락을 콧노래할 수 있었던 지난날처럼, 멀리 텃밭에서 댓이파리들이 햇살을 튕기며 흔 들리는 것만 보아도 대밭이 내려는 가락쯤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가락 은 한 번도 달실네의 입에 오르지 못했다. 퉁소 가락뿐 아니라 육자배기도 흥타 령도 잊은 지 오래인 달실네였다. "엄니, 이것 쪼까 드시요잉." 며느리가 고소한 내음을 풍기며 들어오자 달실네는 놀란 듯 다시 짚수세미를 집어들었다. "뭔디?" "핫케이크란다요." 어느새 달실네 쪽으로 돌아앉은 서울네 앞에 며느리가 쟁반을 놓았다. "어서 났다냐?" 달실네가 뜨악한 낯으로 묻자 며느리는 서울네의 눈치를 살폈다. 날이면 날마 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먹어대는 서울네의 군것질에 며느리는 매달려 살다시피 했다. 꿈도 일꿈만 꾸는 가을 복판인데 서울네가 돈푼이라도 내놓았으니 망정이 지 집안 들어 먹을 짓거리였다. "입이 궁금해서 말야. 내가 사오라구 한 거야. 아유, 색깔 제대로 냈네. 노릿노 릿 먹음직한데?" 칭찬이 즐거운지 며느리가 활짝 웃었다. 연우 애비가 죽고서 이렇게 활짝 웃 는 며느리를 언제 보았던가. - 서울엔 특수 학교라는 게 있어. 연우처럼 머리가 비상한 천재들만 다니는 데야. 열 몇 살에 박사 딴 애두 있으니 말 다 했지 뭐. 그 특수 학교에 연우를 넣어주겠다고 장담했으니 며느리가 신이 난 것도 무리 는 아니리라. 바로 오늘 아침 밥상머리에서의 일이었다. - 은제꺼정 있을 참이여. 낼모레가 제산디. 오늘은 꼭 이 말을 하고야 말리라 벼르던 참이어서 달실네는 어이가 없었다. 친구 남편의 제사를 앞두고도 서울네는 떠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아침 잠자리에서 커피를 마시고, 다시 늘어지게 잔 다음 맞선 보는 큰애기처 럼 공들여 치장하고는 점심상을 받고, 그 다음부터는 줄창 달실네를 따라다니다 가 텔레비전에서 자정 뉴스를 보고 애국가가 나와야 밤세수를 나가는 것이 서울 네의 일과였다. 집장사 잘해서 떼부자 된 얘기, 자식 넷을 한자리하도록 잘키운 얘기, 아메리카로 아프리카로 쏘다니며 여우 목도리와 밍크 코트 산 얘기, 유럽 어느 나란가의 경치가 너무 근사해서 눈물 흘린 얘기.... 달실네가 새로운 일거리 를 찾아 몸을 놀리는 것만큼이나 부지런하게 새로운 얘기 거리를 쏟아내는 서울 네였다. 가끔 가다 말 끝에, - 여긴 지옥 같아. 일, 일뿐이야. 사람 사는 낙이 없으니 말야. 후렴처럼 붙이기도 했다. - 왜 온겨. 지옥에 왜 왔능감. 시방이라두 싸게 가랑게. 안 잡을 텡게 말여. 일을 거들기는커녕 허구한 날 졸졸 붙어다니며 쓸데없는 참견만 하는 서울네 에게 매몰차게 쏘아주려다가도 달실네는 참았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아 서였다. 쑥을 캐면 한식경도 못 돼서 쌀사루와 섞어 찐 쑥버무리를 해오던 친구였다. 들놀이를 나갔다가도 먹음직한 배추만 보면 그 자리에서 겉절이를 해내던 친구 였다. 귀걸이에 목걸이에 매니큐어까지 바르고 다녔지만 닥치는 대로 시원시원 하게 해내던 그 일솜씨만 아니었다면 달실네와 어울렸을 리도 없었을 것이었다. 달실네가 참은 것은 서울네의 옛모습을 안 잊었기 때문이었다. 집장사를 하면서 자식 넷을 키운 억척이가 일에 몸서리를 치는 까닭이 꼭 늙음 탓만은 아닐 것 같아서였다. 온 지 얼마 안 돼서였다. 바깥 툴입도 안 하고 어디 전화 한 번도 걸지 않고 심심해 하는 눈치길래, "영감 산소에 벌초나 갔다오제잉." 달실네가 먼저 말을 걸었었다. 지난 봄, 당지마을 선산에다가 장득만을 안장할 때 서울서 장의차가 다섯 대 나 오는 바람에 샛터마을까지 뻑적지근했던 기억이 나서였다. 그러나 며느리가 전해 준 말대로라면 이번 추석에는 아무도 성묘를 오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영감? 어느 영감?" "어느 영감이라니, 그리 뭔 말." 말 끝을 서울네가 낚아챘다. "장득만? 아이고, 그 인간 말도 꺼내지 말아. 무덤을 파버리고 싶도록 치떨리 니까." 서울네가 낯빛을 바꾸며 쏘아댔다. 옆모습이 어찌나 싸늘하게 굳어 있는지 겁 이 나서 다시 말도 못 걸 지경이었다. "서울엄니, 이렇코롬 설설 끓을 때 묵는 순두부맛이 기가 막히다요. 쪼까 드시 요잉." 언제 들어왔는지 며느리가 사기 대접 가득 순두부를 퍼서 서울네에게 안겼다. 메밀가루와 말린 쑥, 두부판, 두부를 짠 보자기가 부뚜막 여기저기에 널린 것을 보니 그새 몇 번 들락인 모양이었다. "아따, 성우야. 제사 음식 손 타믄 못쓴다잉!" 부엌문께에 놓인 채반의 전을 잽싸게 집어 도망치는 성우에게 며느리가 소리 쳤다. 날이 저물면 광주에 사는 둘째 아들 길수와 큰손자 연우와 아랫마을의 시 동생 내외도 제사를 지내러 들이닥칠 것이었다. 제기로 쓸 놋그릇만 닦아 대충 챙겨놓고 달실네는 허리를 쭈욱 폈다. 순두부의 뜨거운 김을 받아서인지 서울네 의 얼굴은 부황든 듯 누렇게 떠보였다. - 내일은 가겄제. 설마 허니 남의 영감 제사상을 구경헐라구. 즈그 영감 제사도 입동 전이람서, 설마 허니 여그서 지내기야 허겄남. 자손들 도 쌨담서. 성우에게 줄 순두부를 한 그릇 떠가지고 달실네는 부엌을 나섰다. 실비라도 흩뿌릴 듯 잔뜩 흐린 하늘에는 대바람 소리가 가득했다. 6 그날따라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랜만에 푸지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영감은 마을의 남정네들과 토끼몰이를 나갔다. 아이들도 썰매를 지고 샛강으로 가버려서 달실네는 한갓지게 바느질감 을 벌려 놓고 인두질을 하던 참이었다. "실례합니다." 숨소리, 발소리, 기침소리, 부스럭대는 작은 기척에도 임자를 알아채는 여느 아낙들처럼 달실네는 방안에서도 단박 그 목소리의 임자를 알 수 있었다. 날마 다 듣는 낯익은 목소리처럼, 바람의 결이 달라질 때마다 음정이 변하는 대숲소 리처럼 단박 알 수 있었다. 물론 단옷날 이후 한 번도 부르지 않았고, 또 한 번 도 듣지 못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입만 열면 오랜 시간의 문턱을 가벼이 넘어서 술술 풀려나올 것 같은, 바로 정순의 흥타령을 청하는 득만의 퉁소소리 가 아니겠는가. "실례합니다." 버선코를 꺾던 인두를 화로에 꽂고 달실네는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나 탓인지 눈앞이 캄캄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깊이 모를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것 같은 어지럼증으로 문 쪽이 어딘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달실네는 무조건 찻 발을 내딛었다. 고쟁이가 화로를 스치면서 인두를 떨구었는지 탁 소리에 이어 탄내가 났지만 괘념치 않고 달실네는 방문을 화들짝 열었다. - 따져야제잉. 독허게 맘묵고 따져야제잉. 무엇을 어떻게 따져야 할지 아무 마련도 없었다. 그저 고장난 축음기처럼 머 릿속을 뱅뱅 도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주인은 안 계십니까?" 정강이까지 닿는 밤색 외투에 밤색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말했다. 멀끔한 허 우대에 몸피도 굵어졌지만 우뚝 솟은 콧 등에 비해 눈매가 서글한 그는 역시 황 소꿈을 앗아간 그녀의 남자 장득만이었다. 대충 쓸어넘긴 더벅머리와 서투르게 깎은 수염자리와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떠나지 않던 얼굴이 십여 년 세월의 인 두질로 희멀끔해지긴 했지만 그녀의 남자임에는 틀림없었다. "안 계신디요. 뭣 땀시 찾으시오?" 달실네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숫돌에 벼리고 벼린 기나긴 세월의 날이 치잉 우는 듯한 귀울림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 황소만 타믄 득달겉이 달려오마구 철썩같이 맹세혀놓구, 워쩐 일이여! 딴 년 이랑 눈 맞아 도망쳐놓구설랑 이제사 뭔 낯으루 날 찾아온 겨! 목청 돋우어 따지기에는 사내의 얼굴이 너무 편안해 보였다. 머리를 틀어올리 고 털조끼의 앞섶을 여미고 부숭숭한 얼굴로 신발을 질질 끌며 나온 깡마른 여 자를 그는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다. - 정순이, 나여. 아, 득만이랑게. 사내가 웃으면서 솥뚜껑같은 손을 내밀었다면, - 그란디... 뭔 일로 왔능감. 시원찮은 듯 대답하면서도 달실네의 가슴에는 환하게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을 것이었다. 헌데 달실네의 느낌대로라면 사내는 사죄하러 온 것도, 데려가려 온 것도 아니었다. 그가 달실네를, 아니 박정순이를 전혀 몰라보고 있다는 점이 너 무 기가 막혔다. 한밤중에 일어나 미친 듯이 절터로 달려가던 일, 말라깽이 딸을 홀아비에게 여의자마자 어머니가 죽은 일, 영감 몰래 뱃 속의 것을 지워버리고 몸져 눕던 지난 일들이 이빨을 으드득 갈며 부아를 돋우었다. 드렇제만 달실네는 끓는 속 을 지구시 누르고소 말없이 장득만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저 멀리 고샅길을 달 려 오는 영감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이고, 서울양반. 이 누추헌 집에 워쩐 일이시요잉. 귀헌 걸음 허셨네요잉. 어서 안으로 싸게 드시오, 추웅게." 영감은 일찍이 장득만을 알고 있는가 보았다. 그러고 보니 달실네도 영감에게 서 서울양반에 대한 말을 들은 것이 있었다. 제가 지을 터를 잡으러 왔다느니, 동네에 스피커를 설치해 준다느니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서울양반이 장득만인 줄 달실네는 정말 몰랐다. 영감 또한 이웃 동 네까지 뚜르르 퍼지도록 흉한 소문 끝에 서울로 뜬 덕례의 남편이 서울양반인 줄은 모른 모양이었다. 알았다면 득만의 손을 끌어다 아랫목에 앉히고 달실네에 게 고구마술을 내오도록 이르지는 않았으리라. 장 프러덕션 대표 한국 국악기사 사장 장 득 만 전화 00-000-0000-0 "집장산지 건축업인지루 떼돈 벌었다드먼 아닝가베. 이기 뭔 뜻이다요?" 장득만을 문 밖까지 배웅하고 온 영감에게 달실네는 방바닥의 명함을 손가락 질했다. "어, 잃어블믄 큰일나제, 클나." 대답도 없이 영감은 금박으루 테두리를 두른 명함을 두 손으로 받들 듯이 집 어서는 바람벽에다가 이름과 전화번호를 옮겨썼다. "횡재여, 횡재. 임자! 돈 생기믄 거 임자 나들이 입성이나 반반한 걸루 한 벌 하자구. 시집 올 때 못해 준 비단 두루마기두 한 벌 허구 말여." 술동이가 바닥나도록 지나치게 마신 모양이었다. 영감의 얼굴은 전에 없이 발 그레 홍조를 띠었다. "대체 뭔 일루 왔다요." 술김을 피하느라 얼굴을 돌린 채 달실네 또한 전에 없이 샐쭉하게 말을 뱉았 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장득만에의 노여움이기도 했고 그를 지극 정성으로 대접해 보낸 영감에의 분풀이이기도 했다. "허허, 임자. 대밭 말여, 그걸 큰 거 한 장 주겠다지 뭐여. 논 열 마지기 사구 두 남을 돈을 말여. 허허, 참 별일이시." "뜬금ㅇ이 그기 뭔 소리다요." 뜻밖의 일이어서 달실네의 눈은 자연 휘둥그레졌다. 부엌으로 내가려던 술상 을 든 채 발을 옮기지 못했다. "허허, 뭔 소리긴. 대밭을, 아니 밭을 사겠다는 말두 아니구 대나무만 몽땅 사 겠다아 그러더란 말시. 허허, 거 서울양반이 눈 하나는 밝드먼. 이 근동에서 젤 로 크고 오래 묵고 또 다들 누렁댄디 우리 해만 오죽이라나 하는 꺼먹대니께 맘 에 쏘옥 들었든 거이제." 벌써 돈을 받기라도 한 듯, 영감은 턱을 손바닥으로 쓸며 사람좋은 웃음을 자 꾸 웃었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고 생각할수록 신명이 솟는 모양이었다. 장득만 은 저녁까지 먹고서는 자정이 넘도록 앉아 있다가 돌아갔다. 가면서 부엌으로 난 작은 문을 열고는 "저녁 맛있게 먹었습니다." 뜻밖으로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반절을 했다. 달실네가 외면하자, "술이 참 맛있습니다." 한동안 그녀를 쳐다보더 니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는 문을 닫았다. "꺼먹대는 뭣에 쓴다요?" "낸들 아남? 거 퉁손가 젓댄가 그런 거 만든다고 허등만. 대밭이야 싸악 비어 부러도 석 달이믄 시퍼렇게 솟으니께 횡재한 택이제, 횡재. 허허. 이참에 광주의 큰놈 방도 얻어 주고 텃밭도 늘려야 쓰겄구먼." "안 돼야요!" 호리병이 깨지는 듯한 목소리에 스스로가 놀라서 달실네는 하마터면 술상을 메칠 뻔했다. 엎드려서 뭔가를 끄적이던 아이들도, 술기운으로 녹작지근해진 몸 을 이불더미에 기대려던 영감도 벼락맞은 나무처럼 일그러진 눈을 달실네에게 치떴다. - 이라믄 안 돼제. 안 돼야. 속마음에 채찍질하듯 그녀는 눈시울을 위로 흡떴다. "죽으믄 죽었제, 그 인간헌티는 못 판당께요!" 다시 똑똑하게 말그루를 박고 나서 달실네는 방을 나섰다. - 후우 - 알지 못할 설움덩어리가 목구멍을 메웠다. 까마득하게 잊은 줄 알았던 눈물이 후드득 개수통으로 떨어졌다. 시집 온 뒤로 울음자국을 보인 일도 없었고, 소리 를 지른 적도 없었는데.... 험한 꼴을 보인 것이 못내 열적었다. 달실네는 식구들 이 모두 잠 든 뒤에야 방으로 들어갔다. 불은 꺼져 있었으나 영감의 코고는 소 리는 들리지 않았다. "섭섭했남?" 이불 속에서 영감의 손이 달실네의 손을 찾았다. 달실네가 골아눕자 허허, 영 감의 나직한 웃음과 뜨거운 몸뚱이가 어둠 속으로 거너왔다. "팔기 싫음 말제. 한 팔믄 되잖여. ...나이가 몇인디 그랴, 시방. 여직두 처녀적 맘인가베." 7 괘종시계가 일곱 번을 쳤다. 달실네는 천천히 다래끼를 들고 일어섰다. 며느리 가 유자 상자를 이고 첫차로 나간 뒤 줄곧 마루에 앉아서 맥을 놓고 있었나 보 았다. 올해는 유자가 유난 스럽게도 많이 열려서 가지 휘어지게 열린 것도 놀랍 지만 때깔 또한 얼마나 고운지. - 아유, 이쁘기두 해라. 샛노란 약병아리 같구나. 이 유자를 받는 조상은 기분 두 째지겠는 걸. 서울네가 호들갑을 떨 정도였다. 유자뿐만이 아니었다. 해마다 간신히 모양새 나 갖추던 포도와 양다래도 올해는 단물이 흠뻑 들어서 가을내 성우와 동네 꼬 마들의 군입거리가 되었다. - 다아 임자가 걱정돼서 허는 짓이닝께 말리지 말란 말여. 늙은이는 손에 쥐 구 죽을 망정 돈쌈지가 비믄 안 돼능겨. 아무래두 낫살이나 더 먹은 내가 먼첨 죽을 테니께, 거, 영감 ㅇ다구 삯일하러 밖에 나댕기지 말구 저것들 팔아 쓰란 말여. 유자나무 한 그루면 딸 시집 보낸다구 허니께 자식들이 아무리 보채두 유 자밭을 팔지는 말어. 알것남? 망녕 들기 전에는 광 열쇠두 며느리 주믄 안 돼. 임잔 모지락스럽지 못해서 그거이 늘 걱정이랑게. 벌써 십 년이나 되었나 보다. 뱃구레가 졸아들도록 천식이 심해지자 영감은 무슨 생각에선지 집 안팎으로 과실수를 심기 시작했다. 몸이 축난다고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마당 구석에서 구렁이 같은 몸체를 뻗어올려 잔줄기를 친 포도나무, 장독대 옆으로 들어앉은 양다래밭, 대문 앞의 아름드리 개오동나무 와 감나무는 모두 영감이 죽던 해 봄에 몸 사리지 않고 터 잡아 놓은 것들이었 다. - 성님두, 참. 아, 장대 겉은 아들이 넷이나 되는디 형수님이 뭔 걱정이라요. 논농사를 배메기하라는 영감의 부탁이 유언을 듣는 기분이었던지 시동생이 떨 떠름한 낯으로 핀잔을 주었다. - 거, 모르는 소리여. 애비 ㅇ는 자식덜, 의붓에미 등이나 안 치믄 효자제, 효 자. 그러나 영감의 걱정과는 달리 아들들은 별탈없이 제 갈 길을 찾아갔다. 광열 쇠를 받은 며느리도 품앗이에 지쳐 몸살을 앓을 망정 달실네를 내보내지는 않았 다. 마음에 늘 걸리는 것은 일찍 애비를 잃은 손자들뿐이었다. 물난리가 나던 지 지나 여름, 불어 난 개울물을 얕잡아본 것이 탈이었다. 휩쓸려 내려가던 사람은 구했지만 연우 애비는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 "엄니, 유자 따러 가실라요?" "오오냐." 발소리를 들었는지, 아랫방에서 길수의 잠 덜 깬 목소리가 새 나왔다 어제 늦 게까지 친구들과 술추렴을 했으니 아마도 며느리가 돌아와야 일어날 것이었다. "그냥 두시오, 엄니. 이따 지가 싸악 따버릴라요." 곳집 앞에 세워 둔 장대를 들고 뒤꼍으로 돌아드는데 다시 하품을 문 소리가 따라왔다. 유자밭에 오르자 마을이 한눈에 잡혔다. 언제나처럼 마을은 돼지, 닭, 개들이 짖는 시끄러움과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빛살로 아침을 꾸미는 중이었다. 마을의 아랫도리께를 적시며 흐르는 샛강도, 마을 옆의 산으로 치뻗어오르는 길 끝의 절터도 이제 막 말갛게 태어나고 있었다. - 망할 것. 왜 안 가능겨! 밤새 불을 켜놓은 채 뒤치락거리길래 짐을 싸나보다 했는데 첫차가 떠나도록 서울네는 일어나지를 않았다. "첫차로 가야제. 낮차로는 해 안에 서울 못 떨어질껴." 어제 한마디 슬쩍 던졌을 때도 못 들은 척 대답을 않던 서울네였다. 설마 오 늘 첫차로는 가겠거니 하던 마지막 기대마저 없어지자 달실네는 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아마도 딱히 뭐라고 집어 말하기 어려운 그 느낌을 삭이 기 위해서 첫 차가 떠난 뒤의 시간 반을 마루에 앉아 있었나 보았다. 서러움이랄 수도, 원망이랄 수도, 한이랄 수도 없는 그 무엇이었다. 뿌리 없는 물풀처럼 작은 물주름에도 간단 없이 휘둘리는가 하면, 떠 다니는 풍선처럼 실 바람에도 곤두박질치는 그 무엇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느것 하나도 가질 수 없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깨고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 옆에서 치이기만 하는 울분의 그 무엇이었다. "아유, 숨 차. 숨이 차서 죽, 겠네." 서울네가 숨을 할딱이며 올라와서는 달실네를 보자 발을 멈추었다. 아직 유자 는 반 다래끼도 못 차 있었다. "아니, 정순아. 새벽부터 이게 무슨 짓이냐, 응? 아들, 손자, 며느리, 그 시퍼런 것들 다아 놔두고서 왜 환갑 늙은이가 유자를 따냐구." "날 찾응겨?" 이렇게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난 적이 없었으므로 달실네는 서울네가 떠날 인 사를 차리러 올라온 줄 알았다. 버스를 놓치기는 했어도 감이며 유자를 실어나 르는 트럭이 빈번해서 서울행 차편을 구하기는 손쉬웠다. 그러나 부수수한 파마 머리와 보라색 긴 치마는 결코 떠날 사람의 차림새가 아니었으므로 달실네는 곧 시큰둥해졌다. "아유, 제 키보다 서너 배는 긴 장대를 들고서 휘청대는 꼴이라니. 늙은이 노 망이 아니구서야 원. 그거 이리 내, 정순아." 어제는 연우와 성우와 달실네가 길수에게서 장대 끝에 물린 유자를 받아 다래 끼에 담고 한쪽에서는 며느리가 크기를 갈라 상자에 담고 서울네는 먼발치에서 구경만 했었다. "아, 뭔 참견이여?" "장대 이리 달라구, 정순아." "정순아? 정순아, 라니." 장대를 뺏기지 않으려고 힘겨룸하다가 갑자기 장대질을 멈추고서 달실네는 서 울네를 맞보았다. 늘 발치에서 어른대던 어떤 기운이 머리털을 세우며 길길이 뻗는 기분이었다. 쌀쌀맞은 댓거리에 서울네는 움찔 놀란 모양이었다. "왜, 왜 그래, 정순아. 네가 힘들어 하길래 내가 대신 장대질 하겠다는 데 뭐 잘못 됐어?"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조금도 숙어드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 맨들맨들한 사투리 말여. 그 사투리가 듣기 싫어서 그려." "사투리?" 서울네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어 까르르르 웃음소리를 날렸다. 달실네의 얼굴 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 서울말이 왜 사투리야. 정순이 네 말리 사투리지. 이상괴상한 전라도 사투 리!" 장대는 어느 틈에 서울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내 말이 사투리라고요? 원 별 망측헌 소리 다 듣겄네잉. 아, 전라도 사람이 전라도말 쓰는 거이 워찌 사투리여? 니 그 괴쩍은 말뽄새가 사투리제잉. 그라믄 니는 뭣 땀시 잠꼬대를 전라도말고 한다냐잉?" 힐끗 달실네를 보더니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듯 서울네는 장대질을 시작했다. 서울네라고 장대질이 손에 익을 리는 없었다. 장대 끝의 가위에다가 유자 꼭지 를 넣고 비틀거나 잘라서 유자를 잎사귀에 묻은 가지째로 따내야 하는데, 서울 네는 꼭 감을 따듯이 장대로 가지를 툭툭 쳤다. 꼭지 실한 유자이므로 잘 떨어 지지도 않으려니와 떨어져도 멍이 들기 십상이었다. 멍이 든 유자는 제사상에 올리지도 않지만, 저며서 유자차를 끓이기에도 나빠서 장에 내봤자 값이 똥금이 었다. "안 돼야, 안 돼야! 그러코롬 마구 치면 워쩌!" 보다 못한 달실네가 잔소리를 했다. "어쨌거나 유자만 따면 될 거 아냐. 저리 비켜. 다친다구!" "안 돼야! 저런, 저런. 큰 가지를 마구 꺾잖나베. 아, 나무 버린당게 그라네잉." "거, 참. 천리 먼데서 찾아온 소꿉동무한테 되게 야박하게 구네. 아, 이깟 나무 몇푼이나 간다구 그래. 이 유자, 몽땅 내가 사면 될 거 아냐!" "오메! 아까운 유자 다 죽네잉!" "저 엄살 떠는 것 좀 봐. 아, 내가 나뭇값 준다니까. 얼마야, 대체. 오십만 원? 백만 원?" 심통맞게 큰 가지 하나를 우지끈 꺾어놓더니, 무슨 재미가 들렸는지 서울네 는 유자나무를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다. "미쳤남?" 달실네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밤나무 털 듯 모진 모잴에 나뭇잎들이 우수 수 떨어지자 나무는 금세 앙상해졌다. 가리개를 잃은 유자는 가지째로 꺾인 채 나무에 볼썽사납게 매달려 대롱거렸다. "잡년!" 달실네가 달려가서 거칠게 장대를 낚아챘다. 장대는 휘우뚱 중심을 잃고 쓰러 지면서 서울네의 명치끝을 때렸다. "정순이, 네 년이 날 쳤겠다." "그래, 쳤다! 어쩔텨!" "흐흥!" 비웃음과 함께 서울네가 몸을 날리더니 달실네의 머리채를 잡았다. 머리털이 뭉턱 빠져나가는 아픔을 참느라 달실네의 입술에서 피가 번져나왔다. "아이구구! 나 죽는다아!" 끌려만 다니던 달실네가 돌연 서울네를 힘껏 발길질하자 벌렁 나동그라지며 서울네가 비명을 질렀다. "이 쌔려 쥐일 년!" 틈을 주지 않고 달실네는 서울네의 튼실한 몸뚱이를 덮쳤다. "덕례, 이년! 이 잡년! 내 다아 알제. 알았다구! 니년이 먼첨 치맛속을 보이며 득만이를 꼬셨제?" "뭔 소리여, 뜬금ㅇ이!" "바른 대루 대란 말여! 니년이 단옷날 득만이를 술 멕여설랑은 꼬셨제? 니 오 래비랑 작당해서 꼬셨제? 바른 대루 대란 말여, 이 잡년아! 그러잖음 오늘이 니 년 제삿날잉게!" 눈을 번득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달실네는 나무에 걸어 놓은 낫을 발견 했다. 얼른 낫을 가져다가 서울네의 목에 날을 대니 서울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오메, 득만이 땜시, 그 잡눔 땜시 시방 이 지랄잉겨? 오메, 정순이. 너 이제 보니께 사람 몇 쥐일 년이구나잉. 내 워쩐지 고향 땅에 꼭 한 번 오고 접다 혔 드먼. 뭔 빚 갚을 것이 남은 것 마냥 찝찝하다 혔드먼. 아, 이 낫 못 치울겨!" 사지를 벌벌 떨면서도 서울네의 얄팍한 입술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잡년, 잡 년, 잡년, 달실네도 입술을 달싹였으나 스스로는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흰자위를 드러낸 눈, 딱딱 맞부딪는 이빨, 낫을 든 손이 신대를 쥔 양 덜덜 떨렸다. 무슨 짓을 저지른다 해도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신력이지 자신과는 아무 상 관이 없는 듯했다. "잡년! 어디 사내가 ㅇ어서 남의 사내를 붙어 묵냐, 이년아!" "아이고메, 잡년! 내가 니년 액막이 해준 줄이나 알더라고." "싸가지 ㅇ이 뭔 소리여. 덕례, 니년 땜시 내 신세가 요래 뒤틀렸는디. 외려 나 헌티 덤터기를 씌우구 지랄이여, 지랄이!" "신세 뒤틀린 건 나여, 나. 아, 날 보믄 몰러! 순 날건달 겉은 놈 잘못 만나서 꽃 겉은 내 청춘 홀라당 말아먹구설랑은 늙어서 오두가두 못허는 내 꼬락서니를 보믄 모르냔 말여!" "잡년! 그라믄 내 청춘을 요지경으루다 망친 년눔들 뒤끝이 좋을 꺼여?" "그려, 니년 말이 맞어! 좋은 것두 다 한때제. 일껏 고생 고생혀갖구 배가 부 를 만허닝께 거 무슨 프러덕션인가 뭔가를 차려설랑은 노래께나 허는 년들 꽁 무니를 쫓아다니는디, 오메, 징헌 거, 징헌 거어어엉." 깔린 몸을 뺄 생각도 않고 달실네는 입을 크게 벌려 울기 시작했다. 갑작스러 운 울음소리에 달실네는 잠시 멍했으나 곧 낫을 거두고서 서울네 옆에 몸을 눕 혔다 눈을 감자 몸뚱이가 땅 속으로 스며드는 듯 아득한 느낌이 몰아쳐왔다. "전생에 니년허구 뭔 웬수가 졌길래에... 이기 뭔 팔자땜인가 혔는디이...." 달실네가 할 넋두리를 서울네가 가락을 얹어서 늘어놓으며 울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서울네가 아무리 구슬프게 목놓아 통곡해도 - 무슨 울 일이 그렇게 많은지 서울네는 제 설움에 겨워서 울고 또 울었다. 어미 잃은 송아지처 럼 - 달실네는 전혀 슬프지가 않았다. 슬프기는커녕 해묵은 근심을 벗은 듯 홀 가분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일거리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결코 죽을 생각 따위 는 일 것 같지가 않았다. 문 밖을 나가서 이 집 저 집 기웃거리고 멀리 절터까 지도 가보고 싶어졌다. 뿐만 아니라 묵은 건초더미에서 새움이 돋듯 흥타령의 느슨느슨한 가락이 줄줄 흘러 나올 것 같아서 달실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 물었다. - 하필이면 고향의 그것도 신성한 절터에서 약을 먹을 게 뭐람. 진작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화류장의 쇳대와 악어 가방을 며느리에게 맡길 때, 동전 지갑 하나 달랑 들고서 서울 다녀오마고 집을 나설 때, 웬만한 눈치를 가진 사람이라면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더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남부러울 것 없는 서울갑부가 보잘것없는 고향 친구 집에 바람 쐬러 온다고 했을 때 알아 차렸으리라. 적어도 이십 년을 소꿉동무로 지낸 어릴 적 친구라면 그만한 눈치 쯤은 있어야 했으리라. 비록 세상으로부터 내동댕이쳐진 늙은이일지라도 늙은이 라면 누구나 살아온 옛길을 더듬어 보게 된다는 것을 받은 사람조차 없는 오랜 감정의 빚일지라도 그 빚을 갚기 전에는 결코 눈감지 못한다는 것을. - 말이 씨가 된다드먼, 옛말 하나두 그른 거 ㅇ네잉. 한 달이나 지나서야 미국에서 날아온 서울네의 딸에게 뼛가루를 내주며 달실 네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왜 화장했느냐고 다그친다면 달실네로서도 대답할 말 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화류장에도 악어 가방에도 묏자리를 살 만큼의 값진 금 품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장씨 문중의 선산에다 산소를 쓰려고 했지만 간신히 연락이 닿은 장득만의 집에서는 이덕례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경 찰이 찾아낸 이덕례의 호적에도 올라 있는 것을 딸 하나뿐이었다. 그나마도 딸 이 먼저 전화해 오지 않았더라면 뼛가루를 샛강에 뿌려야 했을 것이었다. - 오늘이 니년 제삿날잉게. 아무래도 말이 씨가 된 것만 같아서 달실네는 딸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당신의 땅 그리고 나의 땅 지은이 안혜성 휴우! 불면증에 지끈대던 두통이 슬며시 가라앉자 옅은 수면의 늪 속으로 빠져들던 경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바닥이 꺼지도록 내리쉬는 응어리진 한숨이 살얼 음처럼 여비게 내려앉던 졸음을 여지없이 깨버린 까닭이었다. 울화증에 그는 침 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탁상시계를 보았다. 새벽 두 시였다. 두어 시간이 넘도록 몸을 뒤척이면서 간신히 눈을 붙인 지 십여 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누적된 수면 부족으로 인한 두통이 다시금 바늘이 되어 뇌관을 찌르기 시작했 다. 상실감을 가누지 못한 그는 방문께를 노려 보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정작 그가 흘겨 보고 있는 대상은 방문 밖에 서서 아들을 향해 정한이 서린 한숨을 치쉬고 내리쉬는 그의 어머니요, 어머니의 독선적인 사랑법임을. 그러니까 그들 모자는 지금 방문을 경계선으로 한 채 서로 대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적어도 겉 으로 보면 맞서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신붓감으로 집에 데려왔던 여자 에 대한 모자의 이견 탓이었다. 어떻든 어머니 쪽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경민 자신은 이 같은 자신의 졸렬한 행위의 배후에는 보다 복잡 한 문제가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한숨소리에 뒤이어질 장탄식 앞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한심한 생각에 침대에 벌렁 다시 드러누웠다. 그 순간 성깔이 대단 한 어머니가 자식의 방문을 까부수고 그에게 달려들 것만 같은 위기감에 그는 섬뜩한 한기마저 느꼈다. 그가 고교 이 년생이었을 때 국영수 회에도 무려 다섯 과목에 걸쳐서 과외를 강요했던 어머니에게 반기를 들 셈으로 지금처럼 방문을 때려 잠그고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십대의 이유 있는 반항은 불과 하룻밤도 지나지 않아서 무참한 실패로 끝났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방문을 망치로 까부수고는 보무도 당당하게 그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십 년 전의 치기 만만한 행동을 기억해 내자 소태를 씹는 기분이었다. 꽤 두툼한 담요를 머리끝까지 당겨 덮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라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어머니의 한숨에 뒤이어질 수도 있는 질책이나, 또는 전혀 그럴 리 는 없겠지만 어머니가 그에게 제시해 올 수도 있는 회유책을 미리 차단해 버릴 셈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건만 그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이 서른에 십 년 전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 탓일 터였 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은 남의 행동을 미워하다 말고 어느새 그것을 배워버린다던가. 그러나 그는 다시금 한숨을 치쉬었다. 그가 영원 히 구제 불능의 미성년자로 살아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 탓이었다. 그는 지금 닷새째 그의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칩거하고 있었다. 마치 스스로 감금의 길을 택한 중증의 자폐증 환자처럼. 그러나 조금은 배타적인 자신의 휴 식법에 대해서 그가 극심한 자괴심을 느낄 필요까지는 없을는지도 몰랐다. 사실 그는 삼 년째 다니고 있는 r 신문사의 외신부장과 편집국장으로부터 병가 신청 서에 대한 승인 날인을 받은 뒤 오랜만에 쉬고 있는 중이었기에, 더욱이 신경정 신과 전문의 인 친구 형에게 찾아가서 건강 상담을 한 뒤 건강 진단서는 물론 회사 소견서까지 떼어다가 오 부장에게 제출한 터였다. 그러니까 그는 고교 시 절에 잠시 앓았던 경증의 조울증 병력과 이즈음 들어서 신문사 기자 생활에 대 한 부적응증에 부쩍 시달리고 있었다. 때문에 이 같은 부적응증과는 결코 무관 하지 않을 터인 시대 상황, 그러니까 경색 일변도로 치닫고 있는 80년대 중반의 정황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휴식 공간과 시간을 절 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 같은 그의 변명은 엄살만은 아니었다. 80년대에 들어서부터 언론에 대한 정부 당국의 고삐가 기자들의 숨통을 한껏 조여오면서 그의 부적응증을 또한 부 추기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정치 관계 기사를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 보니 외신 기사에 대한 그외 신문사의 의존도는 상대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1980년 7 월에 수십 명의 기자의 목을 짤라버린 터라 그의 신문사는 심각한 인력난에 시 달리고 있건만 충원보다는 당국의 눈치를 보는 일에 더 급급해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특히 일손이 부족한 외신부 사정은 더욱 딱했다. 발로 뛰는 외근 기자들과는 달리 외신부 기자들이 종일 자리를 지키기만 하면 티커(외신을 찍어내는 기계)가 스물네 시간 토해내는 방대한 양의 외신 뭉치쯤 은 너끈히 처리될 수 있다고 경영진은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타부서 동 료들의 사분지 일에도 못 미치는 다섯 명으로 이뤄진 그의 부서 기자들은 사나 흘이 멀다고 야근을 해대야 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단지 과대한 업무량 때문 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작 그는 한국 정치가 관련된 외신 기사마저 소신껏 다룰 수 없는 기자의 애 환에 비애를 느끼고 있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정치부 기자들의 입에 재갈이 물려 있는 현실은 달리 어찌 해 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서울에 주재하고 있는 외신 기자들이 한국의 정치 사안에 대한 기사를 써서 전세계 계약 신문사 는 물론 그의 신문사에게까지 타전해 주고 있건만 그것마저 신문에 게재할 수 없는 상황이 비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헌데 그와 같은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그는 기이한 병증마저 얻어버렸다. 한국의 정정에 관련된 기사를 발견할 적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이한 충격증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문제의 외신 기 사를 발견한 즉시 철자로 절단해서 그 기사를 오한철 부장에게 넘기곤 했는데 이를 은밀한 기밀 사항인 것처럼 부국장에게 넘기는 부장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 련의 과정이 고역이었던 것이었다. "시국에 민감한 외신 기사들은 결코 타부서 기자들에게 공개하지 말아요. 불량 한 목적에 오용될 소지가 다분하니까 말이오." 오 부장이 매번 그에게 당부를 할 적마다 그는 부장과 자신 모두가 이 나라 통치자의 내밀한 하수인 내지는 모 기관의 기관원으로 전락한 듯한 가책을 가누 기가 어려웠다. "김 기자. 거 요즘에 들어온 뜨끈뜨끈한 외신 기사 좀 보여줄 수 없어?" 법원 출입 기자인 장원철이 며칠 전 그의 등을 치며 물었을 때 그는 놀란 나 머지 하마터면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었다. 바로 그때 그는 광주는 물론 일부 지 방 도시와 일부 서울 대학생들 간에 내밀하게 번지고 있다는 반미주의에 대한 특파원이 쓴 기사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 국장께서 절대로 외신기사를 타부서 기자들에게 공개하지 말도록...." "당신... 월급 남산에서 받고 있어?" 선배 기자가 그를 비웃으며 돌아서자 그는 수치심에 심장이 저렸었다. 그에게 는 병가를 내고도 남을 만큼 필요하고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었다. 그러 니까 그는 부장의 병가 승인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병가 신청서는 물론 친 구의 형이 써준 건강 진단서를 이 층 거실 탁자 위에 있는 대로 다 펼쳐 놓은 채 그의 병가의 필요 불가결성과 그의 독특한 휴가법의 정당성을 가족들에게 과 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문제는 그가 이에 대해서 명쾌한 답을 찾을 수가 없다는 데 있을 것이었다. 경민은 결국 개운치 않은 느낌을 떨치지 못한 채 담요를 내 박차고는 침대에 서 일어나 앉았다. 누군가가 열쇠 구멍 틈으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엿보고 있 는 듯한 불안증이 엄습하자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진짜 정신 질환자마냥. "아휴유우!" 마치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어머니는 그 때 두 번째 장탄 식을 터뜨렸다. 그는 어머니가 퍼부은 욕설을 들은 듯한 환청 탓에 귀를 틀어막 았다. 이구. 이 못난 자슥아! 식음까지 전폐하고 방문까지 걸어 잠그고 누워만 있는 거냐? 이눔 나와 담판이라도 벌여볼 것이지 이 무슨 해괴 망측한 짓거리냐 말이다. 그는 어머니의 욕설을 맞받아칠 양으로 침대에서 방안으로 냉큼 내려선 다음 방문을 향해서 걸음을 내딛었다. 순간 그를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윤미광의 고 운 영상이었다. 그녀는 그의 신문사 옆 건물에 있는 은행의 창고 직원이었다. 고객을 위해서 웃으려고 애를 쓰는 듯이 보이건만 서글픈 눈매가 인상적인 그녀가 바로 그가 지금으로부터 보름 전에 집으로 데려왔던 연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와 의 첫 대면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무도 몰래 그의 집을 뛰쳐나간 길로 종적 을 감췄던 비련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안긴 듯한 가책을 털어버릴 양으로 심호흡을 한 그는 드디어 방문 앞에 버티고 섰다. 어머니가 당장 그의 방으로 쳐들어 온 다 해도 한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어머니와 맞서겠노라고 다짐하면서. 다음 순 간 방문을 열어젖히고 어머니 앞에서 선수를 치고 싶은 열망에 휘말려든 그는 도어를 힘있게 그러쥐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소리쳐 외치고 싶었다. - 어머니, 저는 번번이 제 앞길과 꿈을 가로막고 나서는 어머니의 그 지긋지 긋한 자식 사랑에 진력이 났어요. 제가 이렇게 문을 걸어 잠그고 방안에 틀어박 혀 있는 진짜 이유를 어머니는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요. 그래요. 저는 지금 과 로 때문에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제 결혼과 장래마저도 망치려는 어머니 의 자식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지겨워서 이렇게 시위를 하고 있다구요. 그는 어머니에 대한 구토증에 고개를 내저었다. 경기도 처녀가 전쟁의 와중에 부산 국제 시장까지 내려가서 포목점 점원으로 살다가 가게 주인의 골샌님 아들 과 눈이 맞는 바람에 결혼까지 한 다음 포목상으로 성공한 어머니의 끈질긴 삶 에 대한 애착과 아들에 대한 편애에 질식할 것 같았다. 경민은 전력을 가다듬을 셈으로 잠시 호흡을 가누었다. 순간 아들처럼 당신의 분노를 다스릴 양으로 숨길을 추스르고 있는 어머니의 심호흡을 그는 들었다. 그것은 환청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방문을 열어 젖히려던 그는 주춤 멈춰섰다. 당신의 여한을 탄식으로 터트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목격한 듯한 섬뜩한 느낌은 모자의 대치극에서 승자로 일어서고자 했던 방금 전의 열망을 졸지에 앗아버리 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때 깊은 자각과도 같은 강한 느낌에 그는 휘말려들었다. 어머니를 향한 그의 적개심을 한 순간에 녹여버렸을 만큼 그 느낌은 강렬했다. 지금까지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각성 그것은 방문을 경계선으로 해서 대치하고 있는 그의 어머니가 그의 대적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것은 모자가 같은 자리에 서서 공동 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공범자 내지는 동 지에 지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희한한 사실에 대한 발견이기도 했다. 그는 곧장 침대를 향해서 뒷걸음질쳤다. 자식의 허약한 실체를 훤히 뚫어본 그의 어 머니가 당장에라도 딱부러지게 선언할 수도 있는 얘기에 그는 와락 겁이 났다. "야 이눔아, 그깟 지집아가 그렇게 좋으면 그아와 결혼하믄 될 것 아이가. 언 제는 니가 에미허고 상의하고 살았나? 수천만 원 들여서 미국유학 보내 놓았드 니 딱 한 달 만에 모든 것 집어치우고 거지꼴이 된 이몽룡이마냥 집안으로 들이 닥쳤던 놈이 니가 아이고 누구였드나 말다." 그는 어머니를 적대자로 몰아세웠던 지난 닷새 동안에 느꼈던 것보다도 더 참 담한 패배감을 곱씹으며 책상으로 다가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윤미광의 액자 아니 바로 그녀가 그의 책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미광이. 도대체 너 어디 있는 거니?" 그는 방문 밖으로 새어나갈 불빛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탁상용 전등을 켰다. 그제야 한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액자는 책상의 구석진 곳에 벌렁 나가떨 어져 있었다. 마치 어머니의 냉대에 그의 집을 뛰쳐나갔던 그날처럼. "불쌍한 미광이." 그는 냉소와 훈기를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그 녀에게 청혼했던 지난 해 가을에 반강제로 입을 맞췄을 때처럼 액자 속의 입술 역시 싸늘했다. 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외면할 셈으로 휴지를 찾아든 그는 액자 위에 부옇게 앉은 먼지를 닦기 시작했다. 그는 추억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그녀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삼 년 전인 1982년 초봄, 그러니까 그가 한 달 만에 미국 유학을 때려치우고 귀국한 뒤 이년 간의 백수 생활을 신문사 입사 시험 합격으로 마감한 직후 출근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가 고졸 학력의 은 행원의 영상을 그리게 된 것은 그 무렵, 사회부에서 같이 일했던 신출내기 경찰 출입 기자인 장원철 선배 때문이었다. 신문사 선배들이 장선배를 '샤스마오리'라 고 부를 적마다 '사슴앓이' 내지는 '가슴앓이'라고 잘못 알아들었으리만큼 기자 생활이 낯설었던 그 시절 노총각인 장 선배가 한때는 말 그대로 '가슴앓이'를 했 던 적이 있는 연모의 대상이 바로 윤미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 뒤 단 선배와 어울려서 소주잔을 기울였던 그는 이미 비련으로 끝나버린 선배의 '가슴앓이'의 사연을 건네 듣자마자 대뜸 자신의 여자로 택해 버렸던 것이었다. "야. 김경민. 내가 별볼일 없는 은행원 때문에 속을 끓이다가 어줍잖은 첫사랑 의 상처를 깨끗이 털어버릴 수 있었던 까닭은 말이지, 지금으로부터 이 년 전에 있었던 해프닝 때문이라구.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송금하느라 은행 출입을 하면 서 결국 짝사랑을 하게 되었던 그녀가 불쑥 편집국으로 나를 찾아온 거야." 그러니까 1980년 5월 18일 그 엄청난 일이 광주에서 터진 지 일주일째 되던 날 그녀는 불시에 편집국으로 들어선 즉시 할 얘기가 있노라며 선배를 불러내더 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에도 그녀를 사모하고 있던 선배는 선뜻 그녀의 뒤를 따 라나섰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체면을 벗어던진 채 읍소를 했다는 것이었 다. "장 기자님. 신문사에는 광주로 내려가는 비상 취재 차량이 있겠지요? 제발 단 한 번만 제가 그 비상 교통 수단을 이용하게 해주세요." 어처구니없는 요청에 '가슴앓이' 선배가 오히려 더 놀랬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광주와 타지역을 연결해 주는 전화선마저 끊긴 것은 물론이고 기사 검열 제도 때문에 그 지역에 대한 취재 활동이 중단된 마당에 도대체 일개 '샤스마오리' 기 자인들 무슨 수로 그와 같은 비상 교통 수단을 얻어낼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그런 부탁은 불가능해요." "그렇지만 장 기자님은 대한민국 아니 세계의 오지 어느 곳이라도 취재를 위 해 달려갈 수 있는 기자시잖아요." 그녀는 막무가내로 강청하더라는 것이었다. "지금 정부가 그곳 사람들의 행동을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미 스 윤은 대체 무슨 일로 전쟁터로 변한 그 도시를 찾아가려는 거요?" 그녀는 '어젯밤 죽기를 각오하고 걸어서 광주를 빠져나온 자기 사촌 대학생'으 로부터 그녀의 부친이 어제 오후에 사망했다는 부음을 전해 들었으며 그날 안으 로 내려가지 않으면 장녀로서 부친의 장례식마저 불참하는 불효를 범하게 되었 노라고 울면서 선배를 붙들고 늘어졌다는 것이었다. "서...선배님. 그...그녀에게 비상 차편이라도 마련해 드렸습니까?" "내가 미쳤니? 그처럼 위험하고 불가능한 일을 해주게?" 선배는 덤비듯 물었던 경민에 대한 능멸감을 감추려 들지도 않았었다. "어떻게 좀 도와주시잖구요.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랬겠습니까." "당신, 그때 어디 있었지? 질서와 안전의 땅에서 느끼한 양식 실컷 먹고 싸왈 라 싸왈라 미국말 배우느라 여념이 없었던 당신이 그때의 절박한 상황에 대해서 장광설을 편다한들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선배는 그를 비웃어 주고는 경찰서를 한 바퀴 돌아야 한다며 자리를 떴었다. 그는 마치 선배 기자로부터 따귀를 한 대 얻어 맞은 듯한 얼얼한 통증을 이기지 못한 채 자기 혐오감을 삼킬 셈으로 소주잔을 거푸 비웠었다. 그러자 그리고 망 각하고 싶었던 그 당시의 일이 필름의 화면처럼 선명히 뇌리에 떠올랐었다. 사회학도였던 그는 당신의 포목상을 내로라하는 기업체로 키우고자 했던 모친 의 야망에 떼밀리듯, 경영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났었다. 그 때가 바로 반정부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던 1980년 4월 중순이었다. "지금 젊은것들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주먹을 치켜들고 정부 욕을 하면서 싸 다니는 꼴이 아무래도 심상찮단 말이다. 이 불안한 시국에 니가 미국으로 떠 날 수 있다니 얼마나 잘된 일이냐. 이곳이 여차하면 네게 연락하마. 그러면 LA 근처에 있는 풀장 딸린 집 한 채 사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날 공항에서 그는 모성애에 대한 작은 환상마저 깨지는 것을 경험했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가 아니라 안전한 생존책을 마련하기 위한 첨병으로써 자식을 타국으로 내몰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머니의 내밀한 음 모에 반기를 드는 길만이 조국을 되찾는 유일한 길임을 그는 그때 직감했다. 때 문에 뉴욕 근교에 있는 N 대학교에서 어학공부 과정을 밟기 시작했던 바로 그 날부터 귀국할 수 있는 적당한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했었다. 기다리는 자에게 역시 기회는 찾아온다고 했던가. 반귀머거리 생활을 시작한 지 정확히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그는 학교 기숙사 식당에서 햄스테이크로 저 녁 식사를 하면서 무심코 식당에 설치되어 있는 TV에서 뉴스를 보다 말고 경악 했었다. 아프리카의 빈국 아니면 군부 독재로 악명이 높은 캄보디아에서나 터졌 음직한 반정부 데모이라고 짐작하면서 느긋하게 뉴스를 구경하던 터라 TV 화면 속에서 낯익은 한국인들과 그들의 구호를 발견한 충격은 더욱 컸었다. "아아니... 저건 우리나라에서 터진...." 형편없는 영어 듣기 실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직감했다. 조국의 남녘에 있는 도시에서 엄청난 유혈 사태가 터졌음을. 그리고 그곳 시민들로 하여금 들고 일 어서게끔 내몰아간 원인의 제공자격인 군부 세력이 막강한 철권 정치를 자랑하 면서 끔찍한 학살과 보복 행위를 자행하고 있음을. 이는 또한 동란 이후 처음으 로 터진 동족 상잔의 혈투였기에 더욱 가슴이 아팠었다. 그는 집으로 국제 전화 를 걸었다. "경민이가? 와 무슨 일로 이렇게 이른 아침에 값비싼 전화를 했노?" 그는 방금 전에 느꼈던 충격과는 또 다른 충격을 맛보았다. 호된 피난살이와 그 지역 출신인 시모 슬하에서 매운 시집살이를 하면서 자연스레 입에 익힌 경 상도 사투리로 어머니는 느긋하게 전화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머니는 텔레비전 뉴스도 보시지 않으셨나요?" 어머니의 안일한 시국관에 대한 혐오감이 아무 죄없는 경상도 사투리로까지 번지는 증오 확대증을 가누며 그는 어머니에게 반문했다. "어젯밤 뉴우스 말이가? 뭐 볼거리가 있어야제. 온 밤 푹 잘 잤다 아이가?" "그, 그렇다면 과, 광주에서 터졌던 그 학생들의 데모나 군인들이 마구잡이로 학생들을 때려잡았던 사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계셨단 말입니까?" "뭐라꼬? 아니 그 광주 아이들이 또 들고 일어났단 말이가? 아니 그 아이들 들고 일어서 보았댔자 지네 뒤통수만 깨지는 무모한 짓거리를 또 했단 말이제? 아이구, 왜들 이라나 모르겄다. 수출도 좀 될 만하고 살 만허다 싶으면 아아들이 와 그리 설쳐대는지 정말 귀찮아 몬 살겄다. 우ㅉ든 우리집과 아부지는 물론이 고 서울 사람들 다 잘먹고 잘 살고 있으니께 염려는 치와뿔고 니 공부나 잘하고 있거라이. 엄마의 선견지명에 놀랐제? 그럼 전화 이만 끊는데이." 경민은 무력감을 절감하면서 전화를 끊었었다. 어머니와 서울 사람들의 평안 한 모습이 역설적으로 광주 사태의 참담함을 더욱 극명하게 웅변해 주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빌어먹을! 그러나 그는 그 욕설이 그 비극의 나라로부터 멀리 도망 쳐 온 격인 자신에게 향할 수밖에 없음에 침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이 사태가 그의 귀국을 위한 가장 그럴 싸한 빌미를 제공해 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바로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기숙사에서 나 와서 어학공부를 위한 강의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그의 등을 두드리는 이가 있었 다. 함께 어학 코스에 등록했던 이스라엘 학생인 아이작이었다. "하이. 경민. 너 언제 귀국하니?" "아니, 귀국이라구?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니?" "너희 나라에 정말 대단한 시빌 워(내란)가 일어났잖니?" 나라에 화급한 일이 터졌는데도 불구하고 귀국 이유를 반문하고 있는 그를 이 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아이작을 보자 그는 등골에 식은땀이 솟았었 다. 강의 첫날 아이작이 자랑스레 얘기했던 여타 중동국과 6일 전쟁을 치르고 있었을 때 미국 유학중이던 그의 큰 형 조셉이 조국의 전쟁 소식에 접하자마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노라는 그 얘기는 그날 온종일 경민의 귓전을 떠나지 않 았었다. 물론 한국이 타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조국에 서 득세하고 있는 군부 정권을 적이라고 규정할 수도 없으니 딱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의 조국이 다시금 무서운 동족 상잔의 분란에 휘말려들어간 것만은 분 명하지 않은가. 또한 그 분쟁을 직접적으로 촉발한 계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 분란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신군부가 그러쥐고 있는 무한대한 권력욕이었고 그와 같은 군 부의 권력 남용이 필사적인 시민의 저항을 초래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는 결국 바른 정치와 민주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상식에 속할 터였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해결책인 민주화라 는 이상적이고도 추상적인 정치 개념이 단기간에 걸쳐서 즉각적으로 한 나라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는 데 한국 정치와 한국 국민들의 고민이 상존하고 있을 터 였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더욱 풀이 죽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작의 형처럼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총을 들고 전선으로 달려갈 수 있는 행운아도 될 수 없었 기에, 그리고 조국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좌절감은 더 욱 깊었었다. 다만 그는 타국인들 앞에서 분쟁에 휘말려 있는 조국에 대한 무력 감과 수치심만을 떠안겨 준 군부의 졸렬한 통치욕이 혐오스러웠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그는 조국의 비극과 그의 개인사가 얽혀지는 것을 느꼈 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는 증오와 살상에 앓고 있는 조국은 물론 군부의 총탄에 쓰러지는 동족을 외면한 채 자신만의 장래를 위해서 외국어를 싸왈라대며 햄스테이크를 먹을 수 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미국 유학과 탄탄한 미래가 지금 군부 정치에 시달리 는 조국과 죽어가는 동족들 모두에게 전혀 도움이 되어줄 수 없다는 엄연한 사 실만이 귀국을 위해서 짐을 꾸리는 그의 손놀림을 재촉했을 뿐이었다. 그는 다 음날로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었다. 유학을 떠난 지 한 달 뒤의 일이었다. 미광이의 사진 액자를 정성스레 닦은 그는 탁상 불빛에 그녀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이런! 작은 휴지 조각이 눈매에 붙어 있는 그녀는 마치 경민의 아픈 손 길에 울고 있는 듯이 보였다. 사실일 터였다. 그녀는 그의 어설픈 청혼 때문에 상처를 입은 채 종적을 감춰버렸으므로. 그는 그녀의 고향집 주소를 알아두지 못한 무신경을 후회했다. 그러나 그녀의 단짝인 유명자가 재학중인 학교와 학과 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행방을 찾아내는 일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사진을 품에 안았다. 그러나 그녀를 끌어안으면 안을수록 액자는 뾰족하게 각진 모서리로 그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보름 전 그날 미광이를 향한 내 요청이 이처럼 그녀의 가슴을 찔렀던 것일까? 회한이 가슴을 쳤다. 그날 신문사 지하 다방에서 만났던 그녀를 낡은 '포니'에 태우고 집으로 오는 동안 그는 몇 번씩이나 그녀에게 간청했는지 모른다. 아니, 그의 요청은 그녀에게는 명령이요 협박에 다름 아니었으리라. "미광이는 번번이 어머니의 기대를 깼던 내 얘기 기억해요? 거금을 돌려서 유 학보냈던 아들이 박사님이 되어서 풀장 딸린 저택을 사놓고 미국으로 초청해 줄 날을 학수고대하던 어머니 앞에 거지꼴로 대문에 들어섰다는 얘기 말야. 나는 결혼 건으로 다시금 어머니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게 된 거지. 내 얘기 이해해 요?" 그녀는 여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졸 학력에 대한 자격지심 탓일 터였다. 그러나 그는 결혼 직후 야간 대학이건 전문대학이건 간에 실력이 닿는 대로 그 녀의 대학 진학을 성사시켜 주겠노라고 이미 그녀에게 약속했던 터였다. 때문에 그는 어머니에게 지방대학 출신이라고 얘기하도록 그녀에게 당부했었다. "언젠가 미광이에게 얘기했었지? 조치원 출신인 우리 어머니가 경상도에서 겪 었던 매운 시집살이 때문에 경상도 사람을 싫어하신다는 얘기 말야. 그런데 우 리 어머니가 더 노골적으로 미워하는 지방 사람이 있는데 전라도 사람들이라구. 그러니 한 번만 간청하겠는데 우리 어머니가 미광이의 고향이 어디냐고 묻거 든...." 그는 고향을 숨기도록 부탁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가책에 입을 다물었었다. "너무나 어렵게 자랐다는 어머니를 보면서 깨닫게 되었는데 말이지. 어머니는 당신의 과거에 대한 원망과 수치심 탓인지 엉뚱하게도 없는 이들이나 핍박당하 고 있는 이들을 미워하고 계시드라구. 그러면서도 때로는 엉뚱한 선심을 쓰는 시혜자로 변하기도 하구 말이지. 어떻든 지방 사람들에 대한 어머니의 편견을 깨기 위해서라도 우린 반드시 결혼해서 잘 살아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미광이 는 단 한 번만 거짓말을.... 그렇다고 전라도가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는 것도 아 니구." "이젠 됐어요. 그만해 두세요. 경민 씨의 부탁을 들어드리겠어요." 그녀의 강한 대답에 놀란 그는 부모 앞에 그들이 앉았을 때까지도 고개를 들 지 못했다. 정작 그녀가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시혜자처럼 여겨졌기에. "그래, 부친이 세상을 뜨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홀로 되신 모친과 동생의 생 활은 어떻게 꾸려가시는지...." 미광이는 죄인마냥 낮게 대답했었다. 부친 생존시에 적잖은 규모의 꽃가게와 화훼 단지를 일궈놓으셔서 다행이 생계 문제에 대한 걱정은 없노라고. 어머니의 탐문성 질문은 뒤이어졌다. 아가씨는 결혼을 한 뒤에도 직장 생활을 계속할 계 획인가, 지금 서울에서 결혼한 사촌 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형부 되는 분은 어떤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가. 경민은 한 여자의 인격을 여지없 이 난도질하는 어머니의 질문 공세 앞에서 부아가 치밀어올랐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여자들의 인권과 인격의 파괴자는 단지 가부장제 아래의 사회 제도 나 남자들의 여성 차별 탓만은 아님을. 여자들 사이에 도도히 버티고 있는 치사 한 경쟁심과 질투심 역시 여자의 생존과 위치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 대학교는 어느 학교를 나오셨던가?" "재수한 뒤에도 대학교에 낙방을 하자 아예 취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혼과는 관계없이 내년 봄학기부터 야간 대학교에 입학할 계획을 세워두었습니다." 각본과는 달리 말하는 그녀에게 그는 위기감을 느꼈었다. "그래요? 공부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참 공부가 되겠지요. 헌데." 피의자를 심문하듯이 따지고 드는 모습이 언짢았던 듯 부친이 일어섰다. "아이구, 당신은 왜 그리 서두르시는 거예요? 왜 그리 안달이냔 말이에요?" 아버지는 다만 당신의 형편없는 위상을 손님에게까지 드러내보인 격인지라 입 맛을 다시며 자리를 고쳐앉았다. 평생을 세무 공무원 주사로 눌러 앉았다가 이 제는 세무 관계 비서격으로 아내를 돕고 있는 부친에게 그는 동지애를 느꼈었 다. "아가씨의 고향이 어디시라던가. 고향이 전라도 광주라고 했던가요?" 희생양을 찾아낸 노련한 어머니의 눈매에 번득이는 잔인한 쾌감을 목격한 경 민은 그제야 절감했다. 어쩌면 어머니의 전라도 광주 사람에 대한 턱없는 편견 은 단지 박정희 정권의 불균형적인 경제 개발 정책이 양산한 빈곤층에 대한 막 연한 거부감 탓만은 아님을. 그렇다면 무엇이 어머니에게 쾌감을 맛보게 했을까. 군부 정권 앞에서 그리도 무참하게 무릎을 꿇던 시민들의 허약한 모습에 대한 동정심과 강자 지향의 일반 국민들의 보편적인 성향과는 전혀 다른 어머니의 득 의 양양한 눈빛 앞에서 경민은 섬뜩한 한기마저 느꼈었다. 그는 미광이의 손을 찾아 쥐면서 부르짖었었다. 미광아, 부탁이다. 단 한 번만 우리의 사랑을 위해서 딱 한 번만 거짓말을 해다오. 그의 손을 뿌리친 미광이가 모친 가까이 다가앉았 었다. "어머님, 잘못 아셨군요. 제 고향은 전라남도 광주가 아니랍니다. 마음씨 고운 이들이 모여 사는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나고 자랐었지요. 그럼 이만...." 아들을 놓고 처녀와 한판 싸우면서 승리를 확신했던 모친은 약자의 반격에 아 연 실색했었다. 낭패감이 역력한 어머니를 뒤로 한 채 그들은 거실을 나섰다. "이젠 집에 돌아가야겠어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그녀는 고향을 배반한 고통 탓인 듯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안 돼. 이대로 떠날 순 없어. 내 방에서 커피 한 잔만 마시구 가라구." 그는 기진해 있는 그녀를 부축해서 억지로 그의 방으로 안내했었다. 커피를 준비해 올 양으로 문을 나서던 그는 발을 멈추었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공연 실황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가 그녀의 기분 전환에 도움을 주리라는 생각 때문이 었다. "미광이 옆에 있는 VTR 세트 속에 <사이먼과 가펑클>의 공연 실황 비디오가 들어 있거든. 스위치만 켜면 볼 수 있어요. 그럼, 커피를 가져올게요." 그러나 블루마운틴을 갈아서 끓여온 커피와 과일을 챙겨들고 방문을 열었을 때 그는 기겁했었다. 윤미광이 종이 쪽지 하나 남기지 않은 채 그의 방과 집에 서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기 때문이었다. 그 즉시 그녀는 은행을 그만두었다. 결국 올곧지 못한 요청을 했던 자신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물론 그녀를 잃은 상실감을 달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까?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적수로 쉽사리 단정지어버린 채 이 같은 자기 폐쇄의 치졸한 저항에 매달렸던 까닭은? 그는 어느새 품안의 온기로 인해서 따스해진 미광이의 액자를 책상 위에 조심 스레 세워 놓은 다음 방문밖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꼭두새벽의 괴괴한 정적만 이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어머니 역시 자식과의 대결을 마감할 수 있는 뾰족한 묘수를 발견해 내지 못했던 것일까. 마치 미광이를 잃은 뒤에도 선뜻 해 결책을 찾지 못하고 허둥대는 자신처럼? 그는 전등불을 끈 다음 침대에 다시 누웠다. 그러나 머리는 온통 잡념들로 들 끓고 있었다. 깊은 미로 속을 헤매는 막막한 느낌에 시달리던 그는 드디어 시인 하고야 말았다. 그가 지금 사고의 전환점에 서 있음을. 그는 오늘 밤 자정까지만 해도 어머니를 적대자로 여겼던 안일한 생각을 되새겨봐야 했다. 그리고 방금 전 방문을 사이에 둔 채 모자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을 때 불시에 그를 사로잡 았던 생각 - 그러니까 그들 모자가 미광이, 아니 기실은 광주 사태의 의미와 광 주 사람에 대한 편견 - 을 놓고 함께 공모자로 서 있는 듯한 새로운 자각에 대 해서도 심사 숙고해야 할 시점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장 선배가 미광이의 편집국 출현을 계기로 해서 그녀에 대한 미련을 털 어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던 그 순간 확신했었다. 미광이를 사랑해 주는 길만이 그가 미국 유학 한 달 만에 짐을 싸들고 귀국한 행동을 정당화해 주는 유일한 길이요, 광주의 치유를 위한 작은 고통 분담책이 될 수 있으리라고. 그러나 미광이의 사랑에 대한 내 확신은 언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녀와의 결혼 가능성을 저울질하면서 그가 기이한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은 그녀로부터 부친의 사망에 얽힌 비보를 전해 들었을 때부터였을 것 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사귄 지 일 년 남짓 지났던 작년 겨울 그녀는 그의 연정 을 신뢰했던 듯 부친의 진정한 사인이 자연사가 아님을 밝혔었다. "아니, 그렇다면 부친께서 사고라도 당하셨단 말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털어놓았었다. 광주 비극의 와중에 집 앞 차도에서 벌어지는 시위가 염려가 되는지라 이미 철시했던 꽃가게 문을 빠꼼히 열고 차도 께를 내다보려는 찰나 어른은 그만 차도 건너편에서 날아온 유탄이 심장에 박히 는 통에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얘기를 들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연인의 육친이 맞았던 비참한 최후에 대한 단순한 충격과 연민 때문만은 아니었다. 놀라움과 동정심 외에 찜찜한 감정의 찌끼와 기이한 두려움이 수반되었던 그 복합적인 느낌. 이는 어쩌면 광주의 비극을 바 라보는 '광주 사람 아닌' 그리고 '광주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의 복잡 다단하면서도 이중적인 느낌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단순히 광 주의 비극을 자초한 군부의 비열한 통치욕만을 향해서 욕설을 퍼붓고 삿대질하 는 것으로는 결코 후련해지지 않는 그 미묘한 느낌을 나는 과연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광주 사람에 대한 연민과 미안한 마음만으로는 깨끗이 지워지지 않았다. 이는 또한 그 사태의 근원적인 원인 제공자가 군부였다 손치 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그와 같은 도 다른 동족 상잔의 쟁투를 발발시키는 데 단 단히 한몫을 거든 셈인, 그래서 육이오 동란 외에 또 다른 동족 살인이라는 역 사의 부담을 이 나라 국민 모두에게 떠안겨 준 격인 광주 사람들의 너무도 순진 무구한 정외감에 대한 존경심과 이를 웃도는 아쉬움과도 연관이 있는 것일까. 경민은 혼돈에 빠진 채 반문했다. 이 같은 내 미묘한 감정은 힘겨루기에서 처 참한 패배자로 나가떨어졌던 광주 사람들의 우매하리만큼 순진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바라보는 서울내기 특유의 냉정하고 방관자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인 가? 아니면 이는 또한 줄곧 우리 집에서 식모살이요 점원살이를 도맡아했던 전 라도 사람들의 곤핍한 삶에 대한 경멸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와 미광이의 결혼을 전폭적으로 수락할 수도 있노라며 내 허를 찌 를 수도 있는 어머니의 극적인 회심을 상상하다 말고 난데없이 나를 엄습했던 그 불안감의 실체는 바로 광주 사체를 바라보는 복합적인 내 느낌과 연루되어 있단 말인가? 그, 그렇다면 나는 그녀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결코 털어버릴 수 없는 부친의 사망에 얽힌 슬픈 사연과 광주의 상처를 반쪽이나마 나눠 갖는 일이기도 한 그녀와의 결합을 내심 무서워하고 있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추악하면서도 영악한 자신의 실체에 정나미가 떨어졌지만 아울러 자신에게 최소한 진실했다는 사실에 기이한 안도감을 느꼈 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식속에 상반된 의식이 엇도는 바람에 혼돈을 느꼈다. 이 같은 증상을 두고 사람들은 정신 분열증의 초기 증세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 는 자신의 의식 흐름을 예의 주시하다 말고 드디어 시인했다. 윤미광을 향한 사 랑과 또한 그녀에게 발목이 잡혀버린 듯한 이중적이고도 모순된 느낌이야말로 바로 광주의 비극을 향한 그의 복합된 느낌에 다름 아님을. 그렇다면 이제 상황 은 분명해졌다. 그는 미광이와의 파경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를 어머니의 독선적 인 자식 사랑과 광주 사람에 대한 편견 탓으로 돌릴 속셈으로 이 어처구니없는 소극을 연출해 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모든 행동의 진의가 미심쩍 었다. 생각의 가닥을 여기까지 훑어 올라가던 그는 푹신한 침대마저 바늘방석처럼 느껴지는 바람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숨길이 막힌 듯한 갑갑증을 이기지 못한 그는 이 월 중순의 싸늘한 밤기운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그러 고도 답답증이 가시지 않자 그는 방안의 전등불을 있는 대로 다 켰다. 이제는 방문을 걸어 잠글 필요조차도 없을 터이기에 그는 방문을 마저 열 셈으로 방문 께로 걸어갔다. 중요한 것은 방문을 여닫는 따위의 하찮은 일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그가 미광이와 광주 문제에 대해서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사랑으 로 품어 안을 것인가 아니면 이처럼 이중적인 자기 모순을 의식 깊은 곳에 숨긴 채 어영부영 살아갈 것인가를 양단간에 결정짓는 문제였다. 때마침 그의 방문을 조심스레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남을 배려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란 그의 집에는 가정부 외에는 아버지밖에 없을 터였다. "아버지?" "그래 내다, 아비다." 어! 웬일이세요? 그러나 부친에 대한 반가운 마음만은 숨길 수 없어서 그는 방문을 냉큼 열었다. 놀랍게도 아버지의 손에는 맥주 두 병과 마른 안주가 놓여 있는 쟁반이 들려 있었다. 그는 아버지 못지않게 마실 것도 반가웠다. "니가 창문 여닫는 소리를 듣고는 어쩐지 네가 잠을 설치고 있는 것 같길래 느이 엄마 몰래 이걸 챙겨 들고 올라왔다. 들어가도 되겠냐?" "물론이죠. 아버지께서는 갈증을 달래 줄 선물까지 가져오셨잖아요?" 그는 콧날이 시큰했다. 성깔이 불 같은 마누라와 외곬수로 치닫는 자식 틈에 서 눈치보며 살아온 부친의 쇠잔한 모습이 안쓰러웠다. "얘. 차라리 뜨끈한 동태찌개에 밥을 말아먹는 게 낫지 않겠냐?" 아버지는 당신을 반기는 자식을 대면한 것으로도 기쁜 듯 활짝 웃었다. "요 며칠 동안 마음 고생이 대단했을 텐데. 이 애비가 한 잔 따라 주랴?" 그는 부친보다 먼저 맥주병을 냉큼 쥐고는 어른의 잔을 먼저 채워 드렸다. 부 자는 각기 얼굴을 외면한 채 맥주 잔을 비웠다. 체증으로 남아 있던 답답증이 시원한 맥주와 함께 내려가는 느낌에 그는 오랜만에 속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헌데 초저녁에 바람을 쏘이고 온 것 같던데. 기분은 좀 어떠냐? 이제 이틀만 지나면 병가도 끝날 텐데. 신문사에 출근해도 무방하겠냐?" 그는 산책에 대해서 부친이 알고 있는지가 내심 놀랐다. "속이 좁아 터진 아들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인들 편하셨겠습니까...." 그는 속절없는 심정 털어놓았댔자 어른의 심사만 아프게 할성싶어서 침묵했 다. 부자는 달리 할말도 없어서 맥주만을 들이켰다. "아이고, 깜박 잊을 뻔했구나. 사실은 맥주보다도 더 빨리 건네주고 싶었던 게 있어서 너를 급히 찾아왔는데...." 어른은 형편없는 기억력에 혀를 차면서 잠옷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었다. "그, 펴, 편지, 미, 미광이로부터 온 편지죠? 맞죠?" 그는 아버지의 손에서 거의 빼앗다시피 해서 편지를 받아 들었다. 그러나 그 는 이마를 찌푸렸다. 너덜너덜 찢겨진 편지의 곁봉투는 물론이고 이미 편지마저 삐죽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편지 봉투가 우선 그의 심사를 뒤틀었다. "얘. 오늘 오후에 온 편지가 그렇게 찢어진 건 복동이 짓이니 유념치 말아라. 그 녀석 종이만 보면 좋아서 앞발로 찢어발기지 않더냐. 게다가 느이 엄마나 나 모두 어제부터 미광이에게 궂은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았나 싶어서 그에를 찾아 다녔는데, 오늘 초저녁에는 너마저 집을 나갔길래 행여나 하는 마음에 그 편지 를 먼저 읽어보았으니 양해하거라." "아니, 어제부터 두 분이 미광이의 행방을 찾아다니셨다니. 웬일로요?" 그는 어머니까지 미광이를 찾아나섰다는 얘기가 선뜻 믿겨지지 않았다. 그렇 다면 무엇이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그러나 그는 그녀가 보내온 편지 내 용이 더 궁금했기에 반나마 찢겨 있는 봉투에서 미광이의 글발을 꺼내어 들었 다. 그는 미광이와의 재회를 위한 단서를 건네줄 수도 있는 그녀의 서신에 우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부친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나 자식 의 속내를 알아차린 부친은 마지막 잔을 급히 비우고도 방을 나서지는 않았다. "미안하다만 사실 그 편지는 어제 오후에 왔었다. 그애의 글을 읽은 느이 엄마 와 나는 편지 내용에 아연 실색했었다. 그애가 우리 집을 뛰쳐나갔던 기막힌 사 연을 알게 되니 안타까운 마음에 오늘 아침 일찌감치 은행을 찾아나섰던 거고. 물론 헛걸음을 쳤다만 말이다. 여하튼 미광이의 글을 읽은 뒤부터는 네 방에 있 다는 그 물건이 궁금하기 짝이 없더라. 결국 오늘 초저녁에 니가 슬며시 집을 나서길래 우리는 그틈에 비상 열쇠로 니 방에 들어와서 그 물건을 보지 않았겠 니?" "아아니, 제 방에 있다는 그 물건이 도대체 뭔데요?" 그는 어머니의 무지막지한 망치질에 다시 한 방 맞은 듯한 패배감에 어머니에 게 예의 질긴 적개심을 느꼈다. "니가 신문사 사람으로부터 빌어다 놓았다는 비디오 말이다." "뭐라구요? 부모님께서 광주 관련 비디오를 어떻게 찾아내셨는데요?" "아니 미광이에게 보여주려고 니가 비디오 세트에 꼽아 두었지 않았었니?" 그는 부친의 반문에 실소를 했다. 설마 그 비극의 극치를 어떻게 타도시 사람 도 아닌 미광이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혼사가 걸려 있는 날에. "그래, 네가 깜박 착각했던 것이로구나. 미광이가 그날 울면서 우리 집을 뛰쳐 나갔던 것처럼 우리도 끔찍한 내용이 목불인견이지라 얼마나 가슴이 에던지 원." 그는 자신의 실수를 부인하기도 무엇해서 비디오 세트 스위치를 눌렀다. 아! 그는 난데없이 튀어나온 총소리에 질겁하며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계엄군의 손에 들려 있는 차검한 총에서 총성이 터졌다. 소복 차림의 늙은 어머니가 자식 의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치며 통곡했다. 다시 계엄군이 방아쇠를 당겼다. 또 다른 여인이 상복을 입은 채 관을 쓸어안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또다시 총탄이 터졌다. 이제는 상복마저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한 노모와 아직도 애티가 나는 젊은 여인네가 함께 관을 붙들고 서러운 곡성을 토해내었다. 그 비디오는 한 장 면씩 교차하면서 인간의 잔학성과 비통함의 양극을 극명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그 뼈저린 현장의 절묘한 대비는 이 땅에서 불과 몇 년 전에 터졌던 동족 상잔 의 통한 너무도 생생하게 증언해 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에 대한 인간의 부연 설명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은 채.... 경민은 그제야 기억해내었다. 며칠 전 외신부 동료로부터 광주 항쟁 당시 현 지에 있었던 독일 기자가 취재해서 편집해 놓았던 문제의 비디오를 빌려다 놓았 었음을. 그는 그 무렵 미광이에게 고향 땅을 숨겨달라고 청해야 하는 떳떳치 못 한 느낌 때문에 광주의 참극을 담은 부담스러운 비디오 구경을 미광이의 방문 뒤로 미뤘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만 독어와 영어로 적힌 표제가 잘려 있는 문 제의 비디오를 미국 가수의 공연 실황이라고 깜박 착각한 채 그것을 그날 아침 일찍 미광이를 위해서 VTR 세트에 끼워 놓았던 모양이었다.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셈이었다. 이제 그는 윤미광의 생채기를 도려 파내 버림으로써 적어도 그의 삶으로부터 광주의 비극을 떼어내 버리고 싶었던 자신의 음험한 욕구를 직시해야 했다. 자 신을 위해 남의 진실을 왜곡하면서 타인을 조작하고자 했던 추한 음모를 직시하 는 일은 비통한 광주 관련 비디오를 보는 것 못지않게 괴로웠다. 그는 계엄군의 총탄이 아니라 양심의 총탄에 맞은 듯한 고통에 짓눌린 채 비디오 플레이어 스 위치를 까부수듯 껐다. "저 비디오를 보면서 목이 메었지. 유탄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가게문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이들이 비명 횡 사한 부친으로만 보이더라는 미광이의 글을 읽은 뒤여서 더욱 그랬겠지. 통곡하 는 여인들이 죄다 그애 모녀로만 보이더구나. 그애 착하더라. 광주를 영원히 잊 고서 부잣집 외며느리로 잘 살아보려고 양심과 고향을 배반했던 자신에게 우리 가족이 사람의 도리를 일깨워 주었다고 감사의 글까지 덧붙였으니 말이다. 이젠 광주 사람으로 꿋꿋이 살겠노라는 각오도 편지에 써 놓았었고." "아, 아버지... 이제 그, 그만하십시오." 부친의 얘기가 그를 단죄하는 질타로 느껴지자 그는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 보니 힘없는 국민들만 속아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정치 지도자들이 고 언론인들이고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서 사태의 내막을 감추려 들었다고 생각 하니 괘씸하고 말야. 원 세상에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다니." 경민은 바로 아버지가 조소하는 대상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 에 있었기에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국가 안보와 안녕과 질서 그리고 국가의 경제 발전을 위한다는 거대한 명복 아래서 광주의 진실을 왜곡하고 숨기며 이제 와서는 이나라 국민들에게 이 엄연한 사실마저도 영원히 망각하도록 부추기는 이들 속에 그 역시 버티고 있음을 이제는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었다. "나, 그만 내려가마. 미광이의 글 읽고 마음이 가라앉는 대로 안방으로 내려오 너라. 걸핏하면 방문 걸어 잠그는 소싯적 버릇을 못 버리는 너 때문에 속을 끓 이던 느이 엄마, 어제오늘 미광이 글 읽고 비디오 보면서 내리 섧게 울고 나더 니 고혈압 증세가 도진 모양이야. 방금 전에도 네게 사과해야겠다며 니 방안에 서 서성대더니만 차마 말문을 열지 못하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그냥 내려와 버렸더라. 지금은 냉수만 연신 들이켜면서 끙끙 앓아 누워 있고 말이다." 경민은 방금 전에 문 앞에서 서성대던 어머니의 불안한 발길의 의미를 뒤늦게 야 헤아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떻든 그들이 같은 자리에 서 있었음이 재 확인된 셈이었기에 낯은 뜨거웠다. 그가 부친에게 할 말을 잊은 채 비디오를 꺼 내 들고도 잠시 멈칫대는 사이 부친은 다시금 되돌아섰다. "그냥 참고로 알아두거라. 사실 느이 엄마 전라도 사람이다. 내리 삼 년 지속 되는 가뭄에 사경 답 다 날리고 병약한 아내마저 잃었던 홀아비 머슴이 단 손으 로 길렀던 불쌍한 여식이 바로 느이 엄마란 말이다. 느이 외조부 따라서 조치원 까지 올라와서 목숨 부지를 하다가 부산까지 피난갔다가 포목 장수로 부자가 된 느이 조부모댁 가게 점원으로 살다가 냉대 끝에 나와 결혼까지 했으니 시집살이 가 얼마나 심했겠냐. 느이 할머니헌테 전라도 개땅새라고 무시당하며 살더니만 언젠가부터는 느이 할머니 원망하다 말고 전라도 땅에 한을 품게 되더구나. 느 이 엄마 이해해 줘라. 결국 우리 모두 단 몇 대만 거슬러올라가면 다 고향을 떠 나 살아야 했던 불쌍한 떠돌이들이 아니었겠냐? 전라도 사람 경상도 사람 따로 없는 기라. 서울양반이셨던 느이 조부 어르신도 피난통에 경상도 마누라 만나시 는 바람에 반은 경상도 사람으로 사시지 않았겠냐? 이렇게 갈라지고 저렇게 찢 어져서 피타 삿대질하면서 살게 된 것도 너나 할 것 없이 시를 잘못 만나고 사 람 잘못 만나고 지긋지긋한 이 땅의 가난 탓이 아니더냐? 느이 엄마 용서해 줘 라." 지지리도 고생하며 자랐을 어머니의 사연에 놀란 그가 충격을 추슬렀을 때에 는 그의 부친은 이미 방을 나간 뒤였다. 경민은 그제야 사사건건 남편과 자식을 이기려고 기를 쓰던 어머니의 아집이 뿌리 깊은 열등감의 발로에 지나지 않았음 을 깨달았다. 그는 미광이의 편지에 볼을 비비면서 방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 다. 서러움이 울컥 목젖 위로 치솟으며 한 순간에 시야를 흐려놓았다. 미광이가 불쌍했다. 어머니의 가슴 아픈 유년기도 안쓰러웠다. 또한 광주 사람과 이나라 사람 모두가 서럽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손등으로 눈매를 훔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적어도 이 순간 그가 울어주어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다. 정녕 통곡해 주어야 할 위인은 바로 김경민 그 자신일 터였다. 침묵 속을 더듬으며 지은이 유덕희 1 안녕하세요. 희진이에요. 이렇게 기계에다 대고 말을 하자니 정말 어색해요. 하지만 용기를 내어 말을 하기로 작정했어요. 왜냐하면 벌써 두 번씩이나 성빈 씨의 녹음된 음 성만 듣고 전화를 끊자니 제가 너무 바보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더 는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용건이 있으시면 다음의 뚜 하는 소리를 들으신 후에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당황해 있다 가 뚜 하는 음향이 들리자마자 수화기를 놓아버리고 말거든요. 기계에게 말을 한다는 것이 전혀 익숙지 않아 그래요. 사실을 고백하자면 이렇게 전 화 녹음하는 게 첫 경험이에요. 영화에서는 가끔 보았지만 제가 직접 사용 해야 할 만한 경우가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아, 참 그러고 보니 제 용건은 한마디도 못했네요. 음... 너무나 뻔하잖아 요? 왜 갑자기 연락을 안 해 주시느냐는 것. 전화통에 불이 날 만큼 매일 전화해 주시다가 벌서 닷새째 뚝 끓어진 듯이 소식이 두절되고 보니 너무 나 이상한 거 있죠? 사흘까지는 마냥 기다리다가 오늘 아침엔 어리둥절한 기분까지 드는 거예요.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닌가. 제게 연락할 사이도 없 이 출장이나 간건 아닐까. 무슨 사고라도? 별별 생각이 다는 거예요. 그러 다가 겨우 전화해 봐야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어요. 성빈 씨의 전화번호를 제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 벌써 두 달 동안이나 한 번도 그 전화를 사용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런 모든 것이 이상하고 신기롭게 생각되었어 요. 어떻든 전 전화를 해보았고, 처음 해본 그 전화가 연결이 안 되었으며, 혼자 하숙하고 있다는 성빈 씨의 방 전화가 녹음기가 부착된 것이라는 게 또한 새로운 발견이었어요. 참, 제 목소리 어때요? 녹음된 목소리가 제 실 제 목소리랑 똑같나요? 전 아닌 것 같은데.... 하긴 뭐 성빈 씨는 제 목소릴 무조건 이쁘다 할 테니까 정확한 판단이라고 볼 순 없죠. 제 전화 목소리 들으신 후에 곧장 연락 주실 거죠? 너무 궁금하니까 소식 바로 줘야 해요. 만약 들어보고 제가 납득할 만한 사유가 아니면 혼날 줄 아세요. 그 동안 마다한 불갈비 정도는 사 줘야 할 거예요. 제가 너무 까불었나요? 이만 끓 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2 성빈 씨, 안녕하세요. 저 희진입니다. 설마 벌써 저를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그리고 이 전화가 잘못 걸린 전화 도 아니겠지요? 분명 성빈 씨의 음성이 녹음되어 있었으니 말예요. 어떻게 된 일일까?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지난 주일의 제 생활은 엉망이었습니다. 게다가 야간 근무에 걸려 들어서 성빈 씨의 전화를 못 받은 게 아닐까, 생 각되기도 하고....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과 엇갈려서 퇴근을 하면서, 지친 눈꺼풀을 치뜨며 어머니, 아버지, 동생 진호까지 의심하며, 왜 우리 집 전 화는 녹음되는 전화가 아닐까, 녹음이 된다면 성빈 씨가 "희진 씨, 성빈입 니다. 오수 일곱 시에 '채플린'에서 기다릴테니 꼭 나와 주십시오. 만약 못 나오게 된다면 그 전에 회사로 연락 주십시오. 연락이 없는 한 채플린에서 마냥 기다릴 테니 그리 아십시오."라는 녹음을 해놓을 텐데, 하고 공상해 봅니다. 밤새운 작업에 납처럼 무거워진 눈꺼풀을 감고는 있어도 잠은 쉬 들지 않아 이불 속에 누워 뒤척거리면서, "내 월급 다 갖다 드렸는데 우리 도 녹음되는 전화 사요!"라고 어머니께 소리지르는 자신을 상상하고는 제 풀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요. 제 편에서 성빈 씨에게 약속을 정할 수도 있으련만, 오래된 관습이 약속 같은 것도 꼭 남자가 먼저 해야 하는 걸로 굳어져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주는 주간 근무이므로 오후엔 만날 수 있습 니다. 수요일 저녁 일곱 시에 채플린에서 기다릴께요. 내일이 화요일이니까 제 전화 받았다는 연락을 하셔도 좋구요. 아니, 하셨으면 합니다. 만약 바 쁘셔서 못한다 하더라도 수요일 날 기다릴 테니 약속 잊으시면 안 돼요.... 안녕히 계세요. 잠깐만요, 이건 편지의 추신 같은 건데요. 덧붙이는 말. 밤늦게 제 목소리 시끄러웠나요? 아니면 자장가 같았나요? 달콤한 세레나 데 같지 않았어요? 호호.... 3 ...제가 누군지 벌써 짐작 하셨겠지요? 장희진입니다. 성까지 또렷하게 밝히고 싶어요. 장희진이 이것으로 세 번째 전화를 드 린다는 것을요. 성빈 씨는 수요일 날 채플린에 나오지 않으셨지요? 네, 저는 사십 분을 기다렸어요. 삼십 분쯤 기다렸을 때 저는 눈앞이 캄캄했어요. 그 이유는 너 무나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십 분만 더 기다리자고 자신을 인내 하다가 사십 분이 되자마자 다방 문을 박차고 나와버렸어요. 너무 분해서 눈물이 솟구칠 지경이었어요. 그대로 성빈 씨의 하숙집이 어딘지 수소문해 서 찾아가 따지고 싶었습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구요. 이럴 수도 있느 냐구 말예요. 하지만 이틀쯤 지나고 나자 제 화도 조금쯤 가라앉았습니다. 이렇게 전 화한다는 것 자체가 많이 풀 죽었다는 증거이지요. 참 많은 생각을 했었습 니다. 참 많은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더군요.... 예전에 내가 얼마나 도도했 던가 생각이 나고.... 그때가 그리워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서 속이 상했지만 이게 여자다워져 간다는 것인가 의아 스럽기도 하 였습니다. 성빈 씨의 마음을 갑자기 짐작할 수 없게 되면서 반대로 제 심정이 뚜렷 해지는 것이었어요. 아마 이 원망과 미움이 성빈 씨를 사랑...하게 된 탓이 아닐까 하구요. 성빈 씨가 제게 그런 마음을 열렬히 펼쳐 보였을 때 저는 분명히 코웃음 쳤습니다. 그 벌을 지금 받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성빈 씨 는 지나치게 짓궂은 분입니다. 그게 아니면 여자의 심리를 너무 모르거나 요. 여자란 도도하거나 잘난 척하게 되어 있어요. 그걸 귀엽게 봐 줄 마음 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건 아니겠지요? 이미 제 자존심은 여지없이 뭉개 져 버렸습니다. 성빈 씨는 그걸 이해해 주셔야 해요. 대꾸도 없는 전화통에 대고 세 번씩이나 전화한다는 게 쉬운 줄 아세요? 아니, 전혀 안 쉬워요. ...(침묵)... 절 꼭 이런 전화하게 만드는 저의가 무엇인가요? 저로선 도무지 짐작조 차 할 수가 없어요. 이젠 정말이지 겁이 납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성빈 씨가 제게 전화해 줄 것인지 알 수가 없어졌어요. 날마다 전화한다고 짜증 부렸던 그때가 요순시절이었나요? 그렇다면 미리 그렇다고 귀띔이라도 해 줬더라면 이렇게 당황하지는 않을 것 아녜요? 혹시 제가 건방을 떨었다면 그건 성빈 씨보다 연륜이 짧아 그런 것일 뿐입니다. 다시 얌전히 연락 기 다릴께요. 저를 애타게 만들지 마시고 내일이라도 전화해 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참! 편히 주무세요. 악몽 같은 거 시달리지 말구요. 혹시 술 먹고 늦게 다니나요? 술 너무 마시지 마세요. 희진이는 술먹는 사람 싫어한다구 요. 이제 진짜 끝이에요. 사랑이란 안녕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라는데요, 그래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으니까 역시 안녕이라고 할 수밖에. 이만 끊습 니다. 안녕.... 4 안녕하세요, 장희진입니다.... 제 목소리가 이미 성빈 씨 귀에 지긋지긋하게 들리지 않는지요? 저 역시 왜 이런 전화를 해야만 하는지, 제 자신인 견딜 수 없이 화가 납니다. 성빈 씨는 제가 전화만 안 하면 그것으로 만사가 끝이라고 생각하세요? 분명 그 런가요? 하지만 저로서는 그런 식의 결말을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돌연히 만나주지도 않고 침묵으로 눌러버린다는 것. 물론 성 빈씨에겐 분명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란 아무런 이유없는 행동을 할 순 없지 않나요? 그리고 전 그 까닭을 알아야 합니다. 설혹 성빈 씨의 신상에 무슨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성빈 씨는 제게 마땅히 해명을 해야 한 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가 한 달이나 고민한 끝에 얻은 결론인 데요, 성빈 씨가 무슨 말을 하든 받아들일 각오를 어느 정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제 전화는 조금쯤 반가운 게 아닐까요? 차마 용기가 안 나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면, 전 속이 쓰리고 아프더라도 참겠 다고 미리 약속 드리는 것이니까요. 네, 저는 이 한 달 동안 아주 파김치가 되어버렸어요. 이미 이 침묵의 무게에 짓눌려 반쯤 항복한 상태입니다. 성 빈 씨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어렴풋이 믿게 된 동시에 성빈 씨로부터 버림 을 받았다는 이 고약한 기분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해명을 해주셔야겠습 니다. 우리가 가장 좋을 때 - 전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 우린 내일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는데, 그 다음부터 갑자기 성빈 씨가 침묵하고 만나 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제가 어떻게 납득해야만 하는지 도와주실 수 없겠느 냐는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전 영문도 모르는 상태를 견뎌내기가 힘이 듭니다. 제 성격이 궁금한 것을 그대로 참지 못하는 탓도 없진 않아요. 그 리고 이런 성격조차 이제는 성빈 씨를 지겹게 만들겠지요? 절 쫓아다닐 때 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러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아요. 성빈 씨는 그간의 정리를 봐서라도 이유를 밝혀야 도리가 아닐까요? 제가 울고 매달 릴 만한 짓을 성빈 씨는 하셨던가요? 무엇이 두려워 절 못 만나는 것인가 요? 성빈 씨는 남자이고 어떤 경우든 저보다 우위에 있지 않나요? 가볍게 한 번 정도는 만나줄 수 있겠지요? 저도 구질구질한 여자의 이미지로 남게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성빈 씨가 절 우습게 보았건 말건 자존심과 오기가 남만큼은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화한 것만 해도 전 많은 손해를 보았다고 억울해 할 정도예요. 제가 더 이상 손해를 입게 하진 말아주세요. 또다시 연락 오길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려니 진짜 속이 상하네요. 제 눈이 나쁜가 요? 일간 안과에 한 번 가봐야겠어요. 조만간 만나지길 기원하면서 이만 끊겠어요. 시끄럽게 해드려 죄송해요. 5 저예요...희진이.... 오늘 저에게 전화가 오리라는 것 예상하셨겠지요? 지금 시간이 정확히 11시 27분 45초.... 밤 깊은 시간까지 성빈 씨가 전화를 못 받는 이유가 무 엇일까 의심스러워지면서, 성빈 씨는 다만 녹음기를 작동시켜 놓고 방에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제가 하는 얘기를 다 들을 것 같아요. 만약 방에 있다면 그렇게까지 저를 피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어요. 성 빈 씨가 해명을 하기 싫다면 제 변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라도 최소한 줘 야 하지 않나요? 오늘 낮의 일로 몹시 불쾌하셨나요? 하지만 제 입장을 조금만 이해한다 면 화만 낼 일은 아니지 않나요? 집으로 전화하면 언제나 출타 중이라는 신호만 울리고, 어떻든 만나서 이유를 밝혀야겠다는 제 궁금증을 참을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고, 성빈 씨가 H 무역상사에 다닌다고 얘기하던 것을 전 기억해 냈고, 전화번호를 뒤져 사무실을 알아냈어요.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앞에서 기다릴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지나치게 극단적이며 얌전한 처녀가 할 짓은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일단 전화를 돌린거예요. 그리고 제가 의심하던 일이 사실로 드러났다는 것을 비로소 확연히 깨달 았어요. 아, 정말이지 성빈 씨가 그런 목소리를 낼 줄이야! 빚쟁이가 전화 를 하면 그런 목소리가 나올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말하기 싫은 상대와 억지로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될 대 낼 것 같은 거북하고 성가신 듯한 목소 리.... 왜 제가 그런 목소리로 냉대를 당해야 하는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수 화기를 내동댕이치려다가 간신히 참았습니다. 성빈 씨는 가능한한 말의 단 어 숫자조차 줄이려는 듯 최소한의 대화를 마지못해 하더군요. 회사로 전 화하지 말라. 오늘 저녁 일곱 시에서 여덟시 사이에 집으로 연락해 주겠다. 전화를 끊고 난 뒤에 저는 성빈 씨의 음성에 담겨 있던 그 쌀쌀함, 얼음 같은 냉혹함에 온몸을 떨었습니다. 제가 일곱 시에서 여덟 시 사이에 집에 있지 않고 거리를 방황한 것은 성빈 씨의 이러한 처사가 너무나 분했기 때 문입니다. 제가 그런 대우를 당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참 많이 생각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역시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밤 열 시. 하지만 성빈 씨는 역시 전화를 하지 않 았더군요. 우리 어머니가 거짓말을 한다고 하진 않겠지요? 차라리 거짓말 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성빈 씨는 전화를 하지 않은 게 너무나 분명해요. 전화를 해줄 만한 최소한의 아량을 갖추고 있었다면 제게 그토록 차갑게 굴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러면서도 끝까지 성빈 씨를 믿어보고 싶었다고 한다면 제가 지나치게 어리석은 탓이거나 현실을 직시하길 두려워한다고 밖에 할 수 없겠지요? 아직도 많은 미련이 남아서, 성빈 씨는 나를 좋아한 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는데, 그것이 오늘 낮의 전화 한 통화로 산산이 깨 져버렸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사실을 깨닫는 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 다는 것, 그 이유를 밝혀 주길 거절하고 피하기만 하는 성빈 씨를 저는 원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이의 관계 혹은 연애 혹은 사건.... 어떤 표현도 합당한 것 같진 않지만 그것이 일방적으로 깨어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빈 씨가 일방적으로 저를 쫓아다녔었고, 제가 그에 응하기 시작한 순간 또한 일방 적으로 버려진 것이지요. 성빈 씨가 저를 쫓았을 때 저는 당연히 여자로서 의 경계심을 갖고 성빈 씨를 탐색하고 계산하였습니다. 그리고 괜찮겠다는 판단이 내려졌을 때야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연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자마 자 성빈 씨는 돌아섰어요. 네, 물론 사람의 마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건 인 정합니다. 싫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저도 알아요. 사람의 감정만큼 기기묘 묘한 것도 없지 않겠어요? 저는 그 감정을 붙들고 매달리려는 것은 아닙니 다. 다만 이러저러한 탓으로 마음이 변했다거나 어떻다는 해명만 해주시라 는 거지요. 그래야 이 답답하고 미칠 둣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 아요. 왜냐하면 도무지 저로서는 납득이 안 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저는 무엇이 잘못 됐는지 전혀 모르겠으며 제가 성빈 씨에게 혐오감을 일으킨 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으니까요. 성빈 씨가 제게 책임질 일이 있다고 저는 우기고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요? 저는 성빈 씨가 아닌 다른 남자와의 연애에서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 을까 겁이 나서 경계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이건 성빈 씨에게 부담을 줄려 고 하는 말이 아니지만, 제겐 성빈 씨가 처음 사귄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첫사랑이 장밋빛 추억으로 남기는커녕,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라면 제겐 너무 불행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의 도움은 주실 수 있으리라고 저는 믿고 싶어요. 저 역시 뒤가 산뜻하지 못한 여자라는 소릴 듣고 싶진 않아요. 그 말 자체가 여자를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여자로서의 허영심은, 헤어졌을 망정 분위기가 있는, 잊지 못할 여자, 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우선해서 저는 꼭 이 유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부탁드리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6 안녕하세요. 희진입니다. 우리 사이가 좋았을 때라면, 저예요, 희진이! 하고 응석부리듯 높은 목소 리를 낼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자니 마음속으로 싸늘한 비애가 스 쳐 지나갑니다.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하지만 성빈 씨를 괴롭히고자 이런 말을 하 는 건 아닙니다. 내 목소리가 떨려나오고 가끔씩 한숨 같은 게 새어나오는 것은 제 몸이 아파서이지 동정을 구하기 위해서 일부러 처량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니 오해를 마시기 바랍니다. 지난 밤에 좀 아팠습니다. 성빈 씨가 이유가 된 것은 뚜렷하지만, 그게 꼭 성빈 씨 탓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가면 서 저는 부엌에 있는 어머니께, 내게 전화 안 왔어? 하고 물었더랬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얘야, 제발 잊어버려라. 그 사람과 너는 아니다, 하는 것 입니다. 저는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성빈 씨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부터 숨김없이 어머니께 얘기해 왔었으므로, 어머니가 성빈 씨의 태도를 납득한다는 게 이상하였습니다. 엄마는 그 이유를 아세요? 하고 저는 따져 물었습니다. 그가 무엇 때문에 갑자기 절 멀리하지요? 어머니는 제게, 난 처음부터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 예감이 맞았던 거지. 넌 단념해야 한 다, 하였습니다. 그 대답은 성빈 씨의 침묵만큼이나 제겐 모호했어요. 서로 어울려야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네 짝이 아냐. 그걸 깨달았던 게지. 저는 엄마의 말을 전혀 승복할 수 없었을뿐더러 납득하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몹 시 화를 내며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일곱 살이 나 많아요. 키는 작고 뚱뚱해서 못생겼어요. 제가 바라는 샤프한 타입이 절 대 아니라구요. 엄만 엄마 딸이 얼마나 똑똑하고 예쁜지 모르시는 모양이 지만, 제가 지나가면 총각들은 모두 침을 삼킵니다. 날씬하며 쭉 뻗은 몸매 에, 일 미터 육십삼 센티의 키에, 물결치는 긴 머리에 예쁘고 선명한 붉은 입술을 가졌어요. 시골 읍내 여고에서는 일등으로 졸업을 했고 노래도 잘 불러요. 대학에 못 간 것은 순전히 환경탓이지 제 잘못은 아녜요. 지금 있 는 곳에서도 장희진 하면 어떤 아인가 알아줘요. 전 꿇릴 게 없어요. 그러 자 어머니는 우셨어요. 내 탓이다. 부모 탓이다. 우리 탓이다. 그 울음이 저 를 견딜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전 생각했지요. 그럴 리가 없어요. 성빈 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오직 있는 그래도의 제게 반해서 저를 쫓아오지 않았나요? 이제 와서 우리 아버지가 농부였으면, 우리 어머니 역시 볼 것 없는 시골 아낙 출신인데, 실농을 한데다가 두 아이가 공부를 잘하니 한 놈이라도 가 르쳐보자고 무작정 상경하여 아버지는 공사장 인부로, 어머니는 병원 청소 부로, 도시 변두리 삶을 열심히 이어가는 것을 존경은 못할 망정 비웃으며, 상대가 안 된다고 여기시는 건 아니지요? 그럴 리는 절대로 없다고 생각하 면서도 어머니의 눈물이 내 살을 가시처럼 파고드는 것이어서 저는 정말로 괴로웠습니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아침에 깨니 눈이 붓고 충혈이 된 데 다가 몹시 아팠습니다. 간신히 회사로 출근하였지만 종일 의무실에 누워 있다시피 하였어요. 의무실의 흰 메트리스 위에 누워 있자니 갖가지 생각 이 회오리치더군요. 처음 서울로 올라왔을 때의 막막한 상태로 다시 되돌 아간 기분이었어요. 서울 변두리에 방 두 칸짜리를 얻지 못해 방황하는 부 모님을 보면서 차마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말은 못하던 일.... 시골에서 일등 한 성적표만 굳게 믿고 여기저기 취직하려고 애써 뛰어다녀 봤지만, 하나 같이 월부책 외판원 자리여서 실망하던 일.... 절대로 외판원이 아니라는 자 리마다 일주일이 지나면 외판원으로 변하고 했었어요. 그런 일자리 말고는 은근히 유혹하던 알쏭알쏭한 밤의 아르바이트.... 고급 카페, 백만 원 운운, 미인이라고 몇 번이고 추켜세우던 말들.... 그러다 지금 들어오게 된 R 제 과는 비록 생산 공장일 망정 그룹이었고, 내가 익히 아는 핸섬한 남자 가 수가 TV 광고에 나오는 과자를 만드는 곳이었고....초콜릿, 캔디, 비스킷, 껌, 아이스크림 따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나를 유혹하기 충분했던 것이어서, 당분간 있어보겠어, 공연히 콧대까지 세워가며 입사 시험 치르고 들어왔었 지요. 그리고 사흘 간 바로 이 의무실 신세를 졌습니다. 아, 그 냄새! 초콜 릿이며 파이며 그 달큰한 원료들이 열과 향에 뒤섞여 종일 뿜어내는 냄새 와 연기와 기계의 굉음 사이에서 나는 견뎌내지 못하여, 토하고 속이 뒤집 혀 눈물을 흘리면 의무실로 실려오고 말았었지요. 언니들은 그런 나를, 누 구나 첨엔 그래, 예사롭지 않은 듯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그 생각을 하며 의무실에 누워 저도 몰래 흐르는 눈물을 훔쳤더랬습니다. 삼 년 전의 그 일.... 사흘을 견디던 석 달을 참고 석 달만 다니면 삼 년은 다닌다는 언니들의 말대로 저는 서울 공장에서 삼 년째.... 어느 누구보다 인정받는 고참이 되 었습니다. 그 동안 갖은 어려움도 견디고 상도 타고, 모범 근로자로서 청와 대 다과회에 초청도 받고 사 대항 노래자랑에도 나가고.... 처음의 절망감과 비참함은 극복하고, 한창 피어나는 물오르는 처녀로서의 콧대도 높이고 있 는 찰나에 성빈 씨와의 일이 다시 저를 맨 처음의 그 어두운 구렁 속으로 처박아 넣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픈 것 같아요. 지금도 여전히 몸이 아픕니다. 하지만 몸살 같은 것이거나 마음의 병이라거나 스트레스 정도이 겠지요. 걱정 마세요. 희진이는 엄살쟁이가 아니니까 거뜬히 일어날 것입니 다. 그리고 용감하니까 네 상처가 무엇이라고 얘기해 주어도 튼튼하게 견 뎌낼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의 눈물 때문에 제 얘기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 든 감이 없지 않지만 이 이야기 역시 새삼스럽진 않겠지요? 저는 성빈 씨 를 속이려 든 적은 없었습니다.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요. 늘 성빈 씨가 얘 기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니까요. 이만큼 말하고 나니 너무 많이 지껄여 서 제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조차 모르겠어요. 앞에 한 얘기를 이미 잊어버렸습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희진이는 어떤 아픔도 견뎌낼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정말 제게 대해 불쾌해 있지 않다면 해명이든 무어든 말할 기회를 주시라는 것이지요. 성빈 씨도 건강 주의하세요. 어찌나 힘이 없는 지 수화기가 천근같이 무거워요. 이만 끊습니다. 7 안녕하세요? 저요, 희진이. 전화를 하지 말까, 그래줄 수도 있어, 하는 건방진 생각을 안 한 건 아닙 니다. 그까짓 것 좀 궁금한 거 꿀꺽 삼켜버린다고 해서 죽는 건 아니겠고, 또 이유를 알게 된다고 해서 내게 특별나게 이익이 될 것도 아니라면 온갖 모멸과 멸시를 감수해 가면서 굳이 알려고 들 이유가 어디 있을까 하는 깨 달음이 없지도 않았지만, 오기 때문에라도 더 그만둘 수 없다는 생각이 지 배적이어서 결국 또 전화를 하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성빈 씨가 잘못 걸 린 거지요. 찰거머리 같은 여자이거나 맹꽁이 같은 여자에게 걸려들어서 삼척 동자도 뻔히 알 만한 상황을 저만은 모르겠다고 끝까지 해답을 달라 며 물고늘어지는 꼴인지도 모르지요. 어머니가 제 앞에서 눈물을 보이신 것이 제게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 다. 불쌍한 우리 어머니! 어머니나 아버지의 탓이라고는, 제 목에 칼이 들 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승복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만큼은 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당신 노동력 말고는 공짜로 얻은 것이 라고는 단 한푼도 없으신 분들이시지요. 허황된 것이라고는 동화책의 신데 렐라조차 믿지 않으시는 분이세요. 모든 것이 제가 할 나름이며 분수가 뚜 렷하세요. 그 분수 문제로 저와는 심한 의견 차이를 보이시지만, 전 세상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학교에서 배웠고 그것을 신념으로 하여 믿고 있습 니다. 그리고 제 바로 그 점을 어머니는 당신의 눈물로써 일깨워 주려고 하시지요. 저도 온몸으로 어머니와 싸우며 증명하려는 것이 그 점입니다. 그걸 증명해 줄 사람이 불행히도 성빈 씨밖에 없어서 그게 저를 안타깝게 합니다만. ....성빈 씨가 절 도와줄 수만 있다면 전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 렇다고 성빈 씨에게 결혼해 달라고 조르는 건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만난 지 세 번째 되는 날, 결혼 문제를 진지하게 거론한 것은 성빈 씨였지요? 자신은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싶으며 장난을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 다고요. 하지만 그때 전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결혼에 관해서라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던가요? 사흘 전 제가 아픈 중에 감정이 복받쳐서 뭐라고 횡설수설했는지 모르지 만 그 와중에서도 정작 못한 말이 있습니다. 성빈 씨에게서 전화가 뚝 떨 어진 이후부터 사실 저보다도 어머니가 더 노심 초사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어서, 어머니는 속을 태우시느라 아주 폭삭 늙으셨어요. 어머 니가 가장 걱정했던 일이 바로 여자인 제게 무슨 사고가 없나 하는 것이었 습니다. 그 질문을 할 때 우리 어머니가 딸인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어려워 하시던지! 그런데도 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어머니에게 무례하게 굴 었지요. 이 장희진이 바보가 아니라고 말예요. 비록 남자에게 채인 꼴이 되 고 말았지만 절대로 멍청이는 아니라구요. 그런데 성빈 씨를 만난 그 전철 을 타고 오면서 문득 묘한 생각이 떠오르는 거예요. 밤에, 공원 숲속에 갔 을 때 성빈씨가 키스하고 더듬고 하였을 때 성빈 씨는 괴로운 신음을 토하 며 참아주겠다고 한 것을 그때 저는 무슨 뜻인가를 전혀 몰랐다는 것을 말 입니다. 지금 이렇게 되고 보니 성빈 씨는 참으로 잘 참았다고 회심의 미 소를 지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여간 얄미운 기분이 드는 게 아니에요. 무슨 일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을 핑계로 끝까지 물고늘어질 까? 생각이 구름처럼 피어오르며 뒤엉키는 와중에, 저는 차라리 무슨 일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극단 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헤어지기 직전에 만났던 성빈 씨의 형님 내외분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동생이 제게 못된 짓을 저질렀으니 책임을 져 주셨으면 한다고 떼를 쓸 수 있을 테니까요. 은행원이신 성빈 씨 막내 형님이나 대학병원의 제약실에 근무하시는 형 수님을 어떻게 수소문해서 찾아간다 한들 성빈 씨에게 받은 냉대 이상 더 알아낼 것 같지 않습니다.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며 단념하라고 그러시겠 지요? 이유없이. 가만 생각해 보니 성빈 씨 형님의 생일 자리에서부터 우리들의 분위기는 이상해졌던 것 같아요. 형수님이 제게 어느 학교 출신이냐고 물었고 이어 어디에 근무하느냐, 아버지가 무엇하시냐? 꼬치꼬치 물으면서 분위기는 차 츰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요, 조금 이해가 갑니다. 성빈 씨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성빈 씨가 제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제 집의 전화번호와 만나줄 것인가 만나주지 않을 것인가, 함께 영화 구경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 교외로 기 차 타고 나갈 수 있겠는가, 무슨 음식을 잘먹는가,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좋아한 것은 제 눈이며 입술이며 빨려들 듯한 미 소이며, 가늘고 탄탄하게 뻗은 종아리와 엉덩이, 웃음소리, 쾌활한 목소리 따위였습니다. 그리고 또 제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붙잡을 수 없는 생각들, 환상과 공상이 범벅된 불투명한 미래 같은 것이었지요. 옛 기억들, 좋아하 는 가수나 배우들, 탐독하고 있는 책, 탐내고 있는 예쁜 블라우스며 구두까 지 성빈 씨는 질투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 지신이 대단히 근사하며 내 이름이 멋있고 소중한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형님 내외 분을 만나자마자 소중한 것을 모두 하찮은 것으로 전락해 버렸어요. 아무 도 내가 무엇을 멋지게 생각하는지 관심이 없었으며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수입, 학력이나 능력, 아버지의 재산 정도 따위,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것만 중시하였어요, 그리셔 저 역시 형인 득을 나왔을 때는 조금 불안한 기분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빈 씨에게 제 기분을 말하였 더니 성빈 씨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라고 펄쩍 뛰었어요. 바로 자신이 그런 경로를 거친 사람이라 누구보다 그런 것에 관해서는 이해가 깊다고 하였었 지요? 형제들이 모두 우수하여 좋은 대학에 척척 붙는 것에 관해 심한 열 등감에 빠져 살았으며, 결국 대학은 포기하고 상고를 나와 취직해서 2년이 나 다니고 있다가, 대학 나온 후배에게 멸시를 당하고는 그 길로 직장을 때려치우고 다시 공부하여 대학에 진학했었다는 이야기를 무슨 무용담 들 려주듯 얘기하였습니다. 저에게도 머리가 뛰어나니 결혼한 뒤에라도 대학 에 보내주겠다는 장담 비슷한 것을 하지 않았던가요? 그 어느 때보다 열렬 하고 뜨겁게 저를 껴안아주고 격려해 주었었는데.... 결국 그게 이유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으로선.... 만약에 저와 헤어진 그 다음날 누구에게선가, 병원장의 부인이시라는 큰 형수님이랄 수도 있겠지요. 좋은 아가씨가 중매 들어왔으며, 차마 제게 말 할 염치가 없어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것이라면, 전 해방시켜 드리고 싶어 요. 저도 이 의혹 속에서 해방되고 싶으니까요. 이 침묵의 고문이 그 무엇 보다도 저를 괴롭히는 탓입니다. 성빈 씨가 좋은 사람인 탓으로, 성빈 씨를 잃는다는 것이 제게도 서운한 일이지만, 모든 조건이 저보다 월등 나은 아 가씨를 택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있습니다. 제가 납득하고 또 훌륭한 여 자 친구로 남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의 우리들의 사귐을 비참한 것으로 만 드는 꼴은 면하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절 정말 이해 못하시는 건 아니 겠지요? 저는 진심으로 제 행복은 물론이겠지만, 성빈 씨의 행복도 바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안녕히 계세요. 8 설마 이 시간에도 성빈 씨가 집에 없다면, 성빈 씨는 외박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지금 시간이 새벽 한 시하고도 오십 육 분.... 두 시가 얼마 안 남았거든요. 그런데도 여전히 성빈 씨는 집에 없다는 듯 녹음기가 돌아 가고 있네요. 세상이란 참 편해졌지요? 받고 싶지 않은 전화는 이런 식으 로 처리하면 되니까요. 만나지 못한 채로 두 달이 지났습니다. 계절은 여 름.... 제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에요. 가난한 사람이 살기 좋은 계절이라 지 만, 그것은 옛말. 가난한 사람을 더욱 괴롭히는 계절이지요. 아침, 저녁 출퇴근하는 전철 안에서는 땀으로 목욕을 하게 되고, 집으로 돌아와도 시 원히 샤워할 곳도 없습니다. 우리 집은 목욕탕도 없는 반 지하 셋방인 데 다가, 앞집 담장이 창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어서 바람도 햇빛도 들어오지 않아요. 앞집 담장 위엔 화분들이 잔뜩 놓여 있고, 그 베란다엔 꽃들이 보 호받고 보살핌을 받고 햇빛도 공기도 마음껏 향유하지만 이 집에 사는 사 람들은 햇빛과 공기조차 아쉬움을 느낍니다. 꽃을 키우기는커녕 빨래조차 도 좁은 부엌 천장에 줄을 매고 눅눅히 말려야 하는 우리 가족.... 그 집 딸 인 내 존재의 가치를 비로소 똑똑히 재어보게 된 것이지요. 보름 동안이나 제가 전화를 하지 않은 것은 이런 각성 탓이 없지 않아 요. 제 부서의 담당 대리님께 -성빈 씨와 같은 학교 졸업생인 것만 알고는 조언을 요청하였지요. 그 분은 젊고 교사인 부인과 어린 딸이 있는 착실한 분이세요- 대충 예기를 하곤 남성 심리에 관해 주제넘은 질문을 하였더니, 폐일언하시고 저더러 얼른 다른 남자를 사귀어라, 그게 상책이라고 하셨어 요. 침묵의 이유 같은 건 따지려 하지 마라. 안 만나 주는 것으로 모든 것 은 명백하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명백한 그것은 변심? 그 이유는? 그러자 대리님은 세상은 완전히 밝혀져 있는게 아니라 밝혀지지 않는 부분이 더 많다고 부드럽게 웃으시더군요. 그 밝혀지지 않는 부분. 침묵의 미궁의 부 분이 저는 못 견디게 궁금해요. 알게 되어 괴롭다 해도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거지요. 대리님도 저를 속 시원히 해주진 않았으며, 또 한 언니. 그 언닌 우리처 럼 현장에 있지 않고 사무실 근무 대졸 사원이세요. 깔깔 웃으면서 성빈 씨를 자기에게 넘겨주지 않겠느냐며 어디까지나(?)를 강조한 농담만이 아 닌 진담을 강하게 비치더군요. 언닌 노처녀거든요. 선을 스무 번 넘게 보았 는데, 수준에 맞는 남자가 안 나오더라는 거예요. 길에 나가면 모조리 잘난 남자뿐인데 선 보러 다방으로 나온 남자들은 하나같이 수준 미달이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수준 미달일 수 있다는 것에 정신이 아찔하였습니다. 제 외모가 빼 어나게 아름답다 해도 전 어쩔 수 없는 여공이며 공순이이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왜 저는 그걸 몰랐을까요? 공순이라고 이마빼기에 써 붙이고 다니 지 않아서일까요? 입사한 지 이 년째 되는 해, 모범 근로자 표창장을 받고 연수원 견학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 생활관 담당의 영양사가 점심으로 스테이크를 구워 주면서 우리들을 돈가스도 먹어보지 못한 아주 불쌍한 인 종 취급하여서 웃었던 젓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식의 발상이 사회 밑바탕 엔 까려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린 전혀 별종이 아닌데, 가난을 이유로 별종 취급을 받는다는 고약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언니의 말을 들으면 이 사회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으며, 선 위에 있는 사람은 선 아래의 사람이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싫어함을 느 낄 수가 있습니다. 언젠가 성빈 씨가 대학시절의 데모 얘기를 한 적이 있 었지요? 제가 우리 공장에서의 임금 투쟁 얘기를 했더니, 그 얘기는 신나 게 들으면서도 우리들이 막대기 같은 송곳을 치켜들고, 블라우스를 벗은 채 싸웠다는 것에 관해서는 우울해 하였습니다. 성빈 씨가 알고 싶은 것은 나도 그 속에 끼여 있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나 자신은 그 속에 끼지 못 한 것을 지금도 수치스럽게 여기는데 성빈 씨는 다행스러워하였어요. 지금도 나는 부끄러워집니다. 나는 마치 미운 오리새끼인 양 착각하였지 요. 사실은 오리가 분명한데요. 백조가 잘못 오리 속에 섞여서 고생하고 있 을 뿐이라는 허황된 공상으로 자신을 속이며 살았습니다. 언젠가는 내가 오리가 아니라 백조인 것을 알고 오리 속의 나를 구해 줄 왕자님이 나타나 리라 여겼던 것입니다. 성빈 씨는 분명한 왕자님일 수 있었는데, 내가 백조 가 아니라 오리라는 것만 가르쳐준 셈이지요. 아니 백조인 줄 알았다가 오 리인 걸 알고는 당황하신 게 아닌지요? 왜냐하면 저 역시 그걸 인정하기가 어려워서 이토록 괴로웠던 것일 테니까요. 성빈 씨에게 묻고 싶은 것도 제 가 오리냐 백조냐 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대답을 성빈 씨는 할 수가 없고 저는 듣고 싶고... ...(침묵)... 제가 침묵하는 것은 목이 아파서라기보다, 이 침묵엔 인위적인 냄새가 짙어서, 안개 역시 드라이아이스로 뿌려진 것 같아요. 그 속을 저 혼자 한 없이 허우적거리며 헤매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런 저를 조롱하겠지요? 저 혼자 형체 없는 안개 속에서 모노 드라마를 하 는 것이겠지요. 9 안녕하세요, 성빈 씨. 희진입니다. 제 목소리가 여전히 생기가 넘치고 명랑해서 혹시 실망스럽진 않으세요? 실연을 당해서 죽고 싶을 만큼 비참해 있다면 성빈 씨 기분이 으쓱해질까 요? 하지만 우리와 같은 부류는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으니 매사에 용감 하고 명랑합니다. 제가 섬세하고 우아하며 상처받기 쉬운 성격이라고 생각 했다면 그건 성빈 씨의 착각입니다. 저는 들풀처럼 질기고 생명력이 강해 요. 아니 그렇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니까 스스로 터득한 생기 같은 것이 겠지요. 이 몇 달 동안 저는 많은 것을 깨우쳤습니다. 성빈 씨와의 연애가 절대 헛된 소모는 아니었더군요. 제 눈을 뜨게 했다고 할까요. 모르는 부분들, 세상의 감춰진 부분들,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것과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제가 미처 몰랐던 부분들이 세상엔 너무 많이 감춰져 있더군요. 참 많이 실망스러웠습니다. 참 많이 슬프고 우울했더랬어 요. 이곳에 들어온 언니들 중 태반이 육 개월을 넘기기 전에 사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여공으로서는 제대로 된 애인을 구할 수 없다는 것.... 이미 결혼 한 많은 언니들이 사실을 은폐하거나, 곧 결혼하게 되어 공장을 그만둔 언 니를 우연히 길에서 만났는데, 돌연히 파혼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 대개 그 남자들이 잘났을 때 그러하지요. 운동권인 대학생 오빠를 사 모한 경우에도 오빠들이 역시 운동권 출신 여대생을 택하는 것을 목격하지 요. 그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지만, 천만에요, 결혼을 전재 로 하기 전엔 무슨 얘기든 통하였어요. 우리 역시 문화에 굶주려서 영화도 책도 연극도 잠을 줄어가면서까지 보는걸요. 문제의 핵심은 그런 것이 아 닌 듯합니다. 사회의 보이지 않는 벽, 계급이라거나 신분을 뛰어넘기 위해 제 할 일 말고는 남의 일엔 철저히 무관심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 대학생이 되고자 희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아닙니다. 그 역시 자기 하나만을 위한 철저한 에고이즘임을 깨달았던 것 이지요. 이곳에서도 이기주의자가 얼마나 많은지! 사회가 썩었다, 고 감히 저는 단정 내리진 못하겠지만, 무언가 잘못 된 것 같고 이것이 여러 사람이 공모해서 잘못 도니 것이라면 저 하나쯤 비명 을 지른다고 해서 변할 리는 없겠지만, 그러나 이런 사회를 어떻게 받아들 여야 하는가는 분명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얻은 결론이에요. 저는 젊고, 젊어서 혈기 방자하므로, 아직은 사회의 악에 굴복해서 살아 갈 수는 없습니다. 옳게 살기 위해서 피 터지는 괴로움을 기꺼이 감당해야 하겠지요. 예전엔 제가 도저히 되고 싶지 않았던 인간들의 모습 -우리 아 버지와 같은 노동자, 우리어머니와 같은 가난한 아낙네, 행상인, 거지들- 이 바로 나이며 내 삶의 지표일 수 있다는 깨달음에 눈물이 가득 고여 왔 습니다. 못난 사람들을 우습게 여겼던 자신이 꽤나 꼴값 떨었던걸로 느껴 졌어요. 저만 그 부류에서 쏙 빠져나올 수 있는 걸로 여겼는데, 단지 빠져 나오는 것만으론 안 된다는 것을, 벽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지요. 저는 결 국 이 침묵에 대해 소리 지를 거예요. 이 침묵은 옳지 못하다! 바르지 못한 것을 은폐하려는 침묵이야말로 비겁하다! 악하다! 지금에 이르러서 생각해 보면 성빈 씨 역시 가엾다고 느껴집니다. 저 같 은 여자에게 이런 닦달을 당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안됐어요! 성빈 씨는 결코 상습범이 아니거든요. 순수하게 한 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쫓아왔는데, 그 여자가 자신과 나란하지 못했던 잘못밖에 없어요. 게다가 자신이 옹졸 하여 그것을 그렇다고 말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소심한 사람이지요. 그 렇지만 성빈 씨 같은 사람이 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소시민이며 묻혀 있는, 침묵하는 사람들이 테지요.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자신이 다치거나 손해 보기는 꺼리는 사람입니다. 성빈 씨도 이미 가진 것을 내놓고 고생할 생각은 없는 평범한 사람이지요. 사회란 힘있는 사람의 이권 게임 같은 것 이고 법도 있는 자 편이어서, 유형 무형의 손해를 입어야 하는 부류로 추 락당하는 일은 마땅히 경계해야 하겠지요? 그게 설혹 아주 작은 이익에 불 과할지라도 다른 편에 선다는 건 두려우실 테지요? 저 역시 그쪽 편의 사 람으로 착각하고 지금껏 살아온 셈이니까요. 그렇게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제 핸디캡을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제 부모님이 저를 정신적 으로 소중히 여겨주시고 제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에 가득 차 있었 던 탓이지요. 그리고 절망하기엔 너무 꽃다운 스물하나이구요. 이제 세상을 안개속에서 바라보는 일은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코끼리처럼 거대한 세상 의 다리 하나만을 보는 게 아니라 전체를 볼 수 있는 시야가 트인 탓이지 요. 저를 만났기 때문에 겪고 있는 이 불행에 관해서 성빈 씨에게 진정으 로 동정을 금치 못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한두 번 이상 더 전화하지 않게 될 것 같아요. 조만간 저의 지긋지긋한 전화질에서 해방될 것이며, 비 오는 날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불쑥 뛰어드는 여자 중에 이 장희진은 없 을 테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성빈 씨 가족 중 유일하게 만나뵌 형님 내 외분도 찾아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잘 주무세요. 10 안녕하세요? 장희진입니다. 이것이 제 마지막 전화입니다. 끝까지 한마디 변명이나 대꾸 없이 인내해 주시고 들어주신 성빈 씨에게 심심한 감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사실 얼마나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 을까요? 그 초인적인 참을성! 배운 사람들은 역시 인내력도 뛰어나요! 완강한 침묵을 지켜주신 탓으로 저는 그 무궁무진한 미로를 헤매며 갖가 지 해답을 찾고자 노력하였고, 그 때문에 많은 것을 알게 되어 또한 기쁘 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얻은 결론같은 것은 제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성빈 씨는 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바는 아닙니 다. 세상엔 사람이 많고 많으며 그 사는 방식도 많고 많습니다. 저는 제가 사는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미 해답이 나와 있는 삶의 방식들은 있는 자들을 위한 것들, 가진 자들을 위한 것들, 더 많 이 움켜쥐려는 자들의 것들이어서, 최소한 그것이 옳지 않다는 소리를 지 르는 것으로 제 삶은 시작하려 합니다. 그것이 제 행복을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회가 행복해지고 부드러워지고 따뜻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금이 없어야 하는데, 금을 없앤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요? 제가 그 금을 뛰어넘을 만큼 매력적이지 못해서 성빈 씨를 사로잡지 못 했다고 누군가가 말해 주었지만 그건 맞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정도 로는 어림도 없는 더 완강한 벽이며 침묵이며 지워지지 않는 금이었으니까 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지만, 눈감고 있지 않 는다는 것만으로 안심이 됩니다. 최소한 수렁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고 남 이 나처럼 수렁에 빠지는 것을 모르는 척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제 빚쟁이에게 덜미잡히는 듯한 불안에서 벗어나세요. 녹음버튼을 눌 러 놓지 마시고 안심하고 전화를 받으세요. 오랫동안 괴롭혀 드린 것 정말 죄송해요. 성빈 씨 잘못만도 아닌데, 거리에서 만나면 얼굴 딱딱히 굳히지 말고 미소라도 지어주세요. 지워버리고 싶은 추억이었다고 진저리치지는 말아주세요. 어느 한때 장희진이란 여자가 성빈 시 가슴을 차지하고 있었 던 일을 그리워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성빈 시를 미워하지 않 으며, 이런 일을 계기로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걸요. 오히려 사랑 하는 마음이 더 강해졌습니다. 이 사랑은 이기적인 좁은 사랑이 아니라 무 한히 넓은 사랑이에요. 건강하시고, 그 동안의 제 건방은 모두 용서하시고, 바라던 결혼도 하셔 서 지상의 모든 행복 누리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 꼬레 윤명혜 <기록> 한 신부가 있었다. 그는 포교를 위하여 세상의 끝까지라도 가는 열정을 가진 제수이트(Jesuit) 파의 신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의 끝에서 신도를 얻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 각오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건만. 그가 전도한 사람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장수가 조선 땅에 출병 명령을 받자 그 역시 왜군을 따라서 현해탄을 건넜다. 왜군의 진영에서 그가 겪은 일을 기록 에 남긴 건 당연한 일이었다. 칠 년 전쟁의 와중에서 왜군과 함께 움직였던 그 에게 조선인의 영혼을 구할 기회야 없었을 테고 왜병의 영혼을 얼마만큼 구했는 가, 그것은 필요할 때에 필요한 사람들이 들춰보리라. 조선 땅에서 그가 기록한 어떤 관찰도 심심한 날의 소일거리 이상으로는 우리 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십육 세기 말에 유럽에 간 한국인의 견해에 유럽 역사 가들이 그닥 관심 두지 않는 것처럼, 오해가 태바일 것이다. 구태여 흥미로운 것 을 하나 들춘다면 그림 한 장뿐. 왜군과 대치한 명나라 군사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가 명나라 군사라고 믿은 병사들은 명백히 명나라 변경 출신의 온갖 이민족 군대였다. 오랑캐와 오랑캐의 싸움에 원병으로 보내는 군대는 또 다른 오랑캐여 야 하는 것은 동서양이나 고금을 초월한 진리라고 생각해도 좋고 나라가 일어설 때에는 자국인이 군사로 싸우고, 나라가 망하려는 첫 조짐은 타국인을 군사로 써먹으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고 고개를 주억거려도 무방하다. 둘 다 사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설득력이 있다. 그 모두들 건너뛰어서, 신부가 귀국하는 배, 나가사키에서 유럽으로 돌아가는 화란인의 배와 거기에 탄 사람들의 일을 기록에 남겼다는 점에서만은 주님을 믿 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영광' 혹을 '할렐루야'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싶어진다. 그 중에서도 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 몇백 년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나가사키에는 노예 시장이 있었다. 그 시장에서 조선인 세 명이 화란 상인에 게 팔려 신부와 같은 배에 실렸다. 그 중 두 명은 인도의 고아에 내렸고 남은 한 명이 바다를 수없이 건너서 피렌체까지 갔다. 신부는 그의 이름은 안또니오 꼬레라 하였다. 안토니오 꼬레는 우여곡절 끝에 이탈리아 남부의 척박한 섬까지 흘러갔고 그곳에서 밭갈이하는 여자와 결혼하여 여생을 바쳤다. 그에 관한 기록은 오랫동안 법왕청의 문서 보관소에서 잠자고 있었다. 교회의 선교 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찾기 위하여 하 많은 사이사이 낙수를 견디어야 하는데, 바로 그런 낙수 중에서도 가장 작은 알갱이로 끼여 있 었다. 1983년에 그림 한 장이 나타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끈질긴 꼬레 (한국인) 기자 몇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꼬레의 후손이었다. 피붙이와는 관계없이 꼬레는 꼬레의 후손 아닌가. 그리고 또 동시대인이기도 했다. 사백 년 전의 참상을 역사책에서 배우지 않고도 몸으로 겪은 사람들, 전란과 죽음과 절 망을 두루 거쳐서 아직도 앞날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불확실한 삶 속에서 그들은 꼬레 할아버지의 흔적을 캐냈다. 저승의 바다를 건너서 다른 삶을 살고 간 꼬레 할아버지가 비명에 죽지 않고 늙었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감사하면서. 1 그는 오두막 흙담에 기대앉아 있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 무릎을 세워 팔로 깍지끼듯한 자세였으므로 그닥 자리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 그늘 속에 들어 있 었건만 햇볕에 바스러지는 밭을 바라보는 것이 어지러워서 가끔씩 눈을 깜박였 다. 저녁 햇살이라도 마지막 넘어가는 순간까지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는게 이곳 의 태양이었다. 게다가 며칠째 맹물 이외는 넘기지 못한 노인이었다. 굳이 오두막 밖으로 나오는 것이 태양을 보고 싶어서는 천만 아니었다. 태양 의 덕분으로 기르는 과일을 먹으면서도 이곳 사람들은 가능한 한 햇살을 피했 다. 집도 햇볕을 피하기 위하여 짓는 것이라서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토담집 안 은 써늘하기 마련이었다. 그 안에 누워 있는 편이 병든 노인에게는 맞춤할 일인 데 굳이 나오는 것은 집안에 있으면 문 밖으로 보이는 게 비탈진 밭뿐이라서였 다. 밖에 나와 앉았으면 하늘도 땅도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길도. 척박한 땅이 바 다 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경사지였으므로 거의 끝까지 가기 전까지는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땅 끝에 가서 서면 그제야 이곳이 섬이라는 것을 알 만 큼 숨바꼭질이 심한 땅이었다. 바다는 보이지 않아도 좋았다. 심지어 하늘조차. 그는 오로지 길을 내다보기 위하여 나앉았고 다른 것은 저절로 눈에 들어오는 것만 보았다. 절벽 끄트머리까지 밭을 갈아나간 아내도 눈에 들어오니까 무심히 보았을 뿐이었다. 시선이 좀 오래 머무르기는 했다. 그 여자는 땅에다 밭을 붙이고 하늘에다 머리를 두고 있었다. 언제나 함께 일 하였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그런 그림이 나온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누더기 에 가까운 옷을 걸친 늙은 여자가 하늘과 땅을 둘 다 가진 듯한 모습이 그의 눈 에 담겼다. 그녀는 돌아섰다. 진종일 그녀는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지치지도 않 고 쉬지도 않았다. 꼬레의 아내는 저 혼자 먹을 양식을 거두게 될 게 틀림없었다. 둘 다 잘 알았 다. 꼬레의 눈매는 가라앉아 푹 꺼져 있었으나 그닥 아내를 근심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도 한참 동안 양식을 갈 기운이 있어 보였다. 그것은 나이와 관계 없는 일이었다. 그가 나타나기 전 혼자서 일하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이고, 그 때처럼 젊어질 수가 없을 뿐이었다. 그녀가 몇 살인지조차 그는 몰랐다. 물어본 적도 없었다. 마지막 아이를 낳은 것이 십이 년 전이었으므로 제아무리 느루잡아도 어느 정도 이상으로 늙지는 않 았으리라 할 뿐. 허기야.... 자기의 나이조차 정확하게는 모를 노인이었다. 이곳에 서 낳은 첫 아이가 스물이 넘었으니 여기, 땅끝에서의 나이는 간단히 알 수 있 었다. 그와 함께 살게 되자 아내는 이내 배가 불러졌었다. 고향을 떠날 때에 몇 살이었던가도 알았다. 그가 모르는 것은 이곳까지 흘러오는 세월이 몇 해였던가 였다. 멀거니 앉아서 생각하니 눈 깜박할 사이 같기도 하고 일이십 년이 걸린 듯도 하였다. 자기가 무진년생이라는 것까지도 기억했다. 올해가 무슨 해인지만 안다면 나 이를 따져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육신의 나이가 육십 년씩 틀릴 리야 없으 니까. 갑자 을축.... 땅 끝에 그런 것은 없지만 그는 가만가만 중얼거려 보았다. 황당 하게도 오랜만에 떠올린 육갑 따지기가 자꾸 헛발질을 하여 그는 당황했다. 병 인, 정묘, 무진.... 겨우 무진년을 찾자 한숨까지 나왔다. 갑자부터 무진까지는 그 랬다. 그러나.... 임진, 계사.... 더 이어나가지 못하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늘어진 눈꺼풀이 경련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을 때,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 을 때, 그리고 결코 생각해서 안 되는 것에 부딪쳤을 때에 뒤따르는 습관이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노인이 도리수록 껍질이 굳어져서 수월했다. 하물며 잘 들리지 않는 재주는 구태여 애쓰지 않고도 저절로 얻어졌다. 그러나 노인이 될 수록 보이는 것이 많아졌다. 그것도 눈앞에 없는 것이 더 자주, 보다 똑똑하게 보이는 게 탈이었다. 젊어서는 꿈에나 보이던 것조차 벌건 대낮에 천연스레 나 타나곤 하였다. 육갑을 따지다가 걸려서 오만 것이 다 어른대자 그는 땅을 후볐다. 삭정이 같 은 손가락이 일부러 한 짓은 아니련만 하필 개미굴이었다. 날벼락을 맞은 개미 떼가 갈팡질팡 피난을 갔다. 그는 황급히 흙을 덮었다. 어지러웠다. 병이 심해지기 전까지는 헛것을 떨구어낼 기력이 있었다. 그런 것은 모두 전 생의 그림이라고, 자기가 유별나게 전생의 일까지 잘 기억할 따름이라고 머리를 흔들면 대개 떨어져나갔다. 그래도 안 될 때에는 묵묵히 견딜 힘이라도 있었다. 눈앞의 바다에 다른 바다가 겹치면 고개를 돌렸고 이승의 황톳길에 전생의 황톳 길이 겹치면 눈을 감았다. 길 위에 여인네 둘이 나타났다. 차츰 지껄이는 소리도 들렸다. 그들은 꼬레의 아내에게 소리쳐 인사하기까지 했다. 그 여자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에게도 소리 높여 노래하듯 지껄였는데 말할 것이 있다기보다 목청을 자랑할 기회를 놓 치지 않는 편이었다. 그녀와 매한가지로 누더기를 걸치고 그녀보다 운 나쁘게 손버릇 나쁜 남편까 지 가진 여인들이었지만 항상 명랑했다. 심지어 무시무시하게 싸울 때에도 명랑 한 여자들이었다. "오늘은 좀 어떠세요?" 한 여자는 그에게까지 인사를 했다. 그는 웃으려고 애썼다. 그의 표정에 익숙 한 여자들은 그의 찡그림을 미소라고 이해했다. 즐겁게 웃거나 싸우는 사람들은 운 좋게도 전생의 일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려 니 여겼다. 침울한 사람들을 보면 그 역시 시달리는 기억이 많은가 보다고 여겼 다. 사람들이 조상의 일에 대해 뇌까리는 것은 많이 들었지만 - 거의 틀림없이 지어낸 얘기거나 과장된 자랑거리만 골라서 -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전생의 일을 입에 담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전생과 이승의 거리는 비록 같은 육신에 실려 있더라도 조상과 후손의 간격보다 더 까마득히 먼 땅이었다. 이름은 물론 이려니와 성까지 달라지는 터. 안또니오 꼬레. 이승의 이름이었다. 제 이름 제가 짓는 사람은 없느니만치 안또니오 꼬레란 남이 지어 준 이름이 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이름인지조차도 처음에는 몰랐었다. 끝없이 귓전을 괴롭 히는 소음 중에서 별스럽게 다른 억양으로 도드라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 이 거듭되다 보니까 제 이름이 무언지 알게 되는 과정이 유년기였다. 이승의 유 년기가 몇 해가 걸렸는가 스스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꼬레가 아무래도 곧 죽을 것 같지?" 여인들은 오두막이 멀어지자 그를 입에 올렸다. 그가 일할 기력도 먹을 기력 도 없어져서 오두막 문간에 나와 있는 것을 인근 사람들이 며칠째 본 터였다. "안 그러면 그 사람이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겠어?" "마누라 혼자 일하니까 부득부득 나와서 보고 있는데...." 둘 다 잠깐 우울해졌다. 하나는 배를 타고 나가서 실종된 남편 생각을 했고 다른 하나는 밤새 술 마시고 싸우다가 늘어지게 자고 있을 남편 생각을 했다. 이방인인 꼬레가 죽음을 앞두고 혹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을 수 는 있겠지만 아무도 그가 전생을 돌이켜보고 있는 것까지는 몰랐다. 그는 죽고 나서도 또 다른 삶이 새삼스럽게 시작되리라는 것을 끔찍이도 잘 알았다. 그에게 소망이 있다면 단 하나, 내세에서는 이승의 일을 잊어버리기만 바랐다. 전생의 일을 기억하면서 이승의 삶을 견디어내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었 다. "사는 데도 늘 초연하더니 죽는 일에도 그렇게 보이네." 남편을 잃은 여인이 이내 쾌활해져서 말했다. "속이야 어쩐지 알 수 있나." 주정뱅이의 아내가 아직 부어 있는 볼을 일그러뜨렸다. 간밤에 남편에게 대들 었다가 그 꼴이 된 것도 잊어버리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그녀는 여태껏 자빠져 자는 남편 앞에 광주리를 동댕이치듯 내려놓았다. 다행히 남편은 깨지 않아서 더 이상 사단이 나지는 않았으나 대신 화가 풀리지도 않았다. 싸우는 것 외에 는 화를 풀 길이 없는 고단한 삶이었다. 꼬레 내외는 생전 싸우는 일도 없으니 속이 시커멓게 썩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겨우 마음이 풀렸다. 꼬레 역시 죽음이 두려웠다. 미지의 것보다도 한 번 당했던 일이기에 더 두려 웠다. 모르는 일에 용감한 척하기는 기실 쉬운 편이었다. 그리고 죽음보다 더 두 려운 것은 다음 번 삶까지 떠돌아다녀야 할 바다였다. 계절도 없고 햇수도 없고 끝없이 계속되는 바다. 다시 태어나는 곳이 고향 땅이 된다면 그 길을 되짚어가 야 할 판이나 차마 고향 쪽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고향에서 기다리는 내세의 삶이 전생의 것과 똑같다면 그 앞까지 실려간다 하더라도 그 땅에 내리 지 않으려고 몸부림칠 처지였다. 끝없이 바다를 헤매야 할지라도, 바다가 아니라 구천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구천이란.... 또다시 걸려서 그는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음성까지 귓전에 울렸 다. "구천을 헤매는 원혼이 어찌 너뿐이랴만...." 그건 어머니의 음성이었다. 누구를 묻을 때에 한 말이었을까.... 피폐한 땅 위 에 야트막히 드리워진 하늘 밑에서였다. 까마귀 떼는 유난히 사람에게 가깝게 날았다. 임진, 계사.... 두 해째에 그의 식구는 넷으로 줄었다. 그의 부모와 아들 아이 하나만 그의 곁에 남았다. 헛것을 물리치고 그는 길을 보았다. 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 쪽을 향해 밭을 갈아오는 아내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소생할 초목과 시들어 갈 초목을 구태여 가지까지 꺾어 보지 않고도 잘 아는 그녀였다. 살려낼 수 있는 가축과 그렇지 못한 것도.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였다. 간간이 고개를 들면 남편이 그림자처럼 담에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를 보살피는 수고가 다 객쩍은 짓이기에, 오히려 그를 성가시게 할 터임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밭갈이뿐이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땀에 젖은 등판에 와 닿았다. 천국의 바다처럼. 평생토록 섬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그녀는 천국의 하늘도 바로 머리 위의 하늘이리라 여겼다. 먹지 않아도 되고 일하지 않아도 되며 저 살던 땅을 내려다 보기만 하는 곳, 그 이상 천국에 무엇이 더 필요하랴. 2 전란의 초장에 죽은 가족들은 어마지두 당한 일이기에 차라리 쉽게 잊을 수 있었다. 아니, 죽은 사람들의 목구멍과 싸우노라고 비탄에 잠길 여지가 없었다. 죽은 자를 슬퍼할 수 있는 것은 그것 외에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몇 년 동안 굶주림으로 봉양한 부모와 굶겨서 기른 아들을 잃자 비로소 그도 비탄 외에는 할 일이 없어졌다. 이제 전쟁도 거지반 끝나가는가 보다고 저 살던 마을로 사람들이 되돌아오던 무렵이었다. 그 해에 그는 죽었다. 그것도 무수히 여러 번. 하나하나가 다 몸서리쳐지는 죽음이었다. 다 물러갔다던 왜병이 마을을 덮치자 빼앗아갈 것은 그닥 없었다. 사람들 외 에는. 그들이 골라내어 끌어간 것은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쓸모가 있을 만큼 나 이 먹은 아이들도. 노획물이 형편없어 분기 충천한 왜병들은 거추장스러운 노인 들을 마을과 함께 불태웠다. 불길로 뛰어들려는 그를 열두 살짜리 아들이 붙잡 았는지 그가 아들을 못 가게 잡았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모든 것은 꿈속에서 일 어난 일처럼 몽롱하게 엉키었다. 부모가 산 채로 화장당하는 것을 본 사람에게 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머리를 둘 곳이 없다는 것조차 훨씬 나중에야 알았다. 그 당장에는 그도 죽었다. 하늘이 쪼개져 내려앉았어야 했다. 넋이 빠져 끌려가며 그 소리밖에 되풀이할 게 없었다. 그랬어야 했다. 그때 그리 되었어야. 몇 날 며칠 후 배에 실릴 때에는 소리조차 끊어졌다. 살아남은 무리 중에서도 끝까지 끌려갈 기운이 있는 사람들만 배에 실렸다. 길바닥에 스며든 사람들보다 훨씬 밑도는 머릿수였다. 그의 아들은 이미 곁에 없었다. 제 죽음을 최초의 죽음으로 맞는 사람은 한 번 죽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죽 을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와 함께 배에 실린 사람들도 모두 그와 마찬가지 로 움직이는 시체에 불과했다. 바로 박히건 거꾸로 내려꽂히건. 배 안에서도 물 론 죽음은 또 있었다. 그러나, 시체가 죽는 것을 보고 시체에게 무슨 감정이 있 으랴. 숨을 거둔 시체와 포개져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왜병들이 까닭 모를 포악을 떨었다. 그들 역시 전쟁에 지쳐 있었다는 것을 시체들은 몰랐고 그들 역시 죽음의 공포에 쫓겨다녔다는 것 또한 몰랐다. 포악을 떠는 것만이 자기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방법이었다는 것도 시체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산 자가 시체를 무서워하지 시체는 더 이상 무섭지도 않았다. 숨이 끊어진 시체는 바다에 던져졌다. 개중에는 아직 숨을 쉬는 시체도 있었 건만 숨을 거둔 자나 거두지 못한 자나 비슷한 형국이었기에 가려내기가 쉽지는 않았다. 멀뚱이 눈을 뜬 쪽은 오히려 숨을 거둔 쪽에 많았다. 왜병들은 보는 것 도 듣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칼로 했으므로 서슴없이 칼끝을 밀어넣어 물어보았 다. 죽었니, 살았니? 감각을 다 잃어버린 사람들은 고작 흠칠 하는 정도였다. 그것도 여의치 않았 다. 모르겠다. 멀쩡히 숨을 쉬면서도 그 대답마저 못하는 사람이 왜병들의 가장 큰 놀잇감이 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 그것을 믿어야 군사가 된다. 죽는다는 것이 산다는 것보다 더 흔한 것. 그것을 알아야 용감한 군사가 된다. 그리고 어느 쪽이나 하찮은 것. 거기까지 닿기 전에 는 군사로서 살아남지 못한다. 지옥에는 사람이라는 종자가 아예 없었다. 고향 땅에서는 마지막 몇 해를 구태여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 모두가 눈 한번 깜짝할 찰나에 그에게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그림 한 장이었다. 지옥도. 선 후도 좌우도 상하도 없이 한꺼번에 빡빡이 들어차는 그 그림에는, 그러나, 실수 로라도 빠지는 것이 없었다. 그 그림에 빠진 것이라곤 사람뿐이었다. 이승에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혀는 차츰 조선말을 발음하기 거북해졌으나 그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갑자을축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아 갈팡 질팡하던 끝이라 그 지옥도가 덮쳐 왔다. 조선말 외의 말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그의 유년기는 유난히 길 었었다. 말 배우기는 어린애에게도 쉽지 않은데 머리 속에 다른 말이 들어 차 있는 사람에게는 끝내 완전해지지 않으면서도 시간이 몇 배나 더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귀가 어지간히 트인 다음에도 혀는 계속 느리고 부정확했는데 그나마 할 말이 별로 없던 탓이었다. 그런 꼴로라도 차츰 이곳의 말이 단순한 음향에서 조금씩 구별되어 말로 변하자 그가 머리 속에 담고 있던 생각은 그림이 되었다. 그 그림을 그는 이때까지 조선말이라고 믿고 있었다. 필요한 말보다 필요 없는 말을 더 많이 하는 이곳 사람들, 전생의 사람들 역 시 그랬을 터이지만 그것까지는 꼬레가 분명히 깨닫지 못하였다. 이곳 사람들은 일쑤 그를 벙어리 꼬레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가 듣는 데서도 그가 들어서는 안 될 말까지 거침없이 했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중년에 다시 통과한 유년의 암흑 이 어느 나라 말도 담지 못할 비밀을 그에게 열어 놓았다. 그는 사람들이 입에 담는 말보다 그 말을 하기 전의 심사를 먼저 알아들었다. 어떤 사람은 거짓말 외에는 하지 못하게끔 되어 있었고 대개 자신조차 속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본마음을 숨기기 위하여 다른 말만 한다는 것도 알았다. 쓰르라미 울 듯이 그냥 소리를 내야 하는 사람들이 기실 제일 많았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가 말이 아니고 머리에서 나오는 것도 말 되기는 부족하고 참 '말'이란 가슴에서 출발하 여 머리를 거쳐 목구멍으로 나와야 하는, 오르락내리락 복잡한 길을 모두 거쳐 야 하는 것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왜인들의 말은 단 하나, '나가사키'였다. 그 외의 모든 음향은 구별할 필요도 없이 욕설이었다. 개도 일없이 짖지는 않는데 왜병들은 아무 때 나 짖었다. 그 짖어대는 소리를 두 번 다시 듣지 않아도 좋게 된 것이 나가사키 였으므로 훗날까지 그가 왜인들의 말 중에서 그나마 잃어버리지 않았을 뿐. 나 가사키는 실상 끔찍한 곳이었다. 조선 땅을 가까이 보고 열려있다는 그곳이 세 상의 모든 바다로 내뱉는 아가리였다. 나가사키는 난전처럼 붐볐다. 난전에서 팔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이름이 난전 이라 붙었지만 조선의 난전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것. 사람 파는 장터가 가장 성 시였다. 그가 팔리는 사람이어서 그랬으려니.... 조선에서도 종을 사고 팔기는 하 였으나 짐승처럼 장터에서 팔지는 않았다. 짐승 중에서도 큰 짐승, 소까지도 그 렇게 마구잡이로 팔지는 않았다. 개, 돼지, 닭.... 농사꾼이 다 되어 몇 대가 지난지라 조상이 양반이라느니 따위 헛소리는 하지 도 않았건만 전란 중에 천민들이 비아냥치는 노래를 만들어낸 것을 듣고 쓴웃음 을 지은 기억이 났다. 돼지 팔아 석 냥 반, 개 팔아 두 냥 반, 양반 팔아 한 냥 반, 그런 양반이냐? 개돼지보다 못한 것이 나라 망할 때의 양반 꼴이니 장터에서 팔리는 양반 값 이 석 냥 반, 두 냥 반, 그 아래로 양반이었다. 양반 꼴에 어울리는 위업도 작태 도 없던 그였는지라 그 시장에 서서도 기껏 생각한 것.... 이승에서 죄를 많이 지 으면 내세에 축생으로 태어난다는 위협이 있었다. 옛말 버릴 데 하나 없이 그 는 전생의 죄값으로 축생이 되었다. 부모의 상을 당한 것만도 죄인이라고 얼굴 을 가리고 다니던 사람들. 축생이 되어서 그 죄값이 된다면 개돼지보다 더 천한 무엇이 되어도 무방했다. 아들의 피로 적셔진 땅, 그 땅에서 전해 내려오던 무슨 말이건 실상 그에게는 헛소리였다. 아들이 베어지는 꼴을 본 에미는 축생으로도 시원치 않고 도수장에 가야 할 축생이었다. 천한 짐승이 되는 것만으로는 갚을 길 없는 일이었다. 화란인의 의복과 용모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저승 사자를 닮았을까 단언하기는 어려웠다. 여자 옷으로도 남자 옷으로도 볼 수 없는 그의 옷은 마치 껍질처럼 켜켜로 덮여 있었고 검붉은 머리털과 수염은 태우다가 도로 꺼낸 듯하였다. 그는 시장에 나온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그의 눈은 누리끼리하고 불그죽죽했 다. 전혀 관심이 없는 듯이 스쳐지나가는 그의 눈빛은 조용했다. 놓치는 것이 하 나도 없을 듯한 눈이기도 했고 청맹과리라고 착각할 만한 눈이기도 했다. 그가 물건 주인의 길다란 잔소리에 짤막하게 귀찮은 듯이 대꾸할 때 그가 왜인들의 말을 안다는 것보다 그의 머리 속에 있을 법한 생각에 몸이 굳어졌다. 그는 자 기에게 관심이 있었다. 곁눈질조차 하지 않건만. 아, 그것은 바로 쇠전 거리에서 가끔 보던 늙은 소장수의 눈빛이었다. 나가사키에서 팔리는 사람들이 구태여 조선인만은 아니었으나 화란인은 조선 인 셋을 샀다. "조선 사람 값이 제일 싸다네." 생면부지의 조선인이건만 셋이 한 동아리가 되자 한 사내가 일러주었다. 그는 왜말을 아는 눈치였다. "먼 바다에 싣고 나가면 영락없이 죽는다는구먼." 그렇다면, 그건 화란인이 한 말이었을 게다. 병든 소를 제값받기 위하여 누구 나 팔 때에는 병을 숨긴다. 시장의 조선인들은 구태여 먼 바다까지 끌고가지 않 아도 오래 못 갈 모습들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그 말을 해준 사내 정도였다. 그 사내의 눈은 상처받은 짐승처럼 번쩍거렸다. 짐승 중에서도 산 짐승. 다른 사람 들은 모두 도수장 앞에서 무릎 꺾인 몰골이었는데 그만은 유독 가축 시장에 잘 못 섞인 산 짐승이었다. 그는 잇새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어디까지 끌고가건 내가 죽을 줄 아는가?" 자기를 다 죽은 사람으로 치부하고 있던 꼬레에게는 참으로 색다른 부르짖음 이었다. 죽고 살고가 제 손을 떠난 지 오래된 그에게 처음으로 약하디약한 꿈틀 거림이 일었다. 쓰라림과, 가엾이 여기는 한숨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종의 안 도감이. 무엇에 이끌린 듯이 그는 중얼거렸다. "댁네는 안 죽을 거요." 하늘도 깨지고 땅도 쪼개졌는데 저만은 살아남아야겠다는 그 사내의 턱없는 욕심이 구차스러워 보이기는커녕 그 반대였다. 그 사내만은 살아남아야 했다. 그 가 누구이건, 어디를 가건, 무엇이 되건. 그래, 염라국에 끌려가더라도. 알 수 없 는 노릇이었다. 누가 더 이상 죽건 아랑곳없는 때에 어떤 사람이 살아남기를 바 란다는 것은. 사내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딴청을 피웠다. "벙어리는 아니로구만." 훨씬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 생면부지의 사내가 살아남기를 바란 것은 그가 세상에서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3 소리지르지 않고서도 말을 건넬 수 있을 만한 거리가 되자 여인은 멈춰서서 땀을 닦았다. 동네 여자들이 전해 준 말을 남편에게 할 참이었다. 막 입을 떼려 다가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그새 해가 바뀌어서 반신이 뜨거운 양지 쪽에 나왔 건만 남편은 꼼짝 않고 있었다. 안또니오.... 연장을 내팽개치고 그녀는 달려가려 했다. 무릎이 후르르 떨리고 그에게 하려던 말은 다 사라지고 심지어 외마디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남편을 앉혀 두고 일에만 열중했었으나 그의 임종을 놓치리라는 예상은 하지도 않았었 다. 그녀에게 대답하기라도 하듯이 그는 천천히 한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그녀 는 한참 동안 바라보다 묵묵히 돌아섰다. 아내가 일하는 밭 옆에 하염없이 앉았 다가 슬그머니 잦아드는 것이 실상 그의 소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출은 적었으나 밭은 넓었고 그 밭을 가는 공력이 넓이의 몇 배나 되게끔 험한 땅이었다. 어서 한 번 더 다녀오려고 그녀는 서둘렀다. 몇 걸음 가서 그녀는 멈췄다. 햇볕이라도 피해 앉혔어야 했다. 그리고 뒤늦게 야 자기가 처음에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던가 생각났다. 동네 여자들이 전해 준 말은 아들애가 저녁 때 집에 오리라는 소식이었다. 열두 살짜리 아들은 섬 반대 쪽 지주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섬 반대편은 비옥했으므로 시장도, 교회도, 선 창도 모두 그쪽에 있었다. 다시 돌아서니 남편은 여전히 햇볕에 드러나 있었다. 그제야 왜 남편이 그늘 로 피해 들어가지 않는가 알고 결국 아무 소리 못하였다. 아들이 온다는 말까지 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만 길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집으로 오 는 길이. 길은 섬 가장자리를 휘돌 듯이 해변과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지형따라 오랜 세월 다져진 터인데 꼭 남편이 지금 앉은 그 자리에 있어야 야트막한 구릉 을 돌아서 불쑥 나타나는 아들의 모습을 제일 먼저 볼 수 있었다. 열두 살짜리는 가끔씩 타달타달 먼지를 일으키며 구릉을 돌아왔다. 대개는 빈 손이었지만 올리브유나 생선을 조금 들고 오는 때도 있었다. 무엇을 가지고 올 때에는 멀리서 보기에도 금방 알아채리만큼 발걸음부터 달랐다. 어려서부터 보 고 자란 어머니의 걸음새. 자식들에게 무언가 특별히 먹일 것을 가지고 있을 때 에는 그 걸음새가 다르게 마련이라 아이들이 신통히도 미리 알았다. 둥지 속의 새 새끼들이 알 듯이. 늙은 새는, 그러나, 그렇게 기쁘지가 않았다. 먹을 것을 들고 오는 기쁨을 알게 되자 아들은 빈손의 기쁨을 잃어버렸다. 가 만 놔두지 못하고 휘두르기만 해도 되는 기쁨을 빼앗기자 빈손일 때에는 그냥 늘어지게 마련이었다. 길에서 주운 작대기나 돌멩이를 내두르는 기쁨도 역시 사 라졌다. 쓸데없는 날갯짓을 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새끼 새가 자라면 날아가야지 에미에게 먹이를 물어주는 게 아니란다. 몇 번이고 그런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는 어머니였다. 어차피 날 아갈 터이므로 또 그런 것을 미리 일러준들 아들이 일단 잃어버린 빈손의 기쁨 을 되찾지는 못할 터였다. 기쁨과 자랑이 넘친 얼굴로 내미는 올리브유를 받을 때마다 마음이 쓰라렸으나 용케 참았다. 그것 외에는 기쁨이 남아 있지 않은 아 들에게서 그나마 앞질러 빼앗기보다는 잠든 아들의 머리카락을 한 번 만져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남몰래 새카만 고수머리를 만질 때마다 그녀는 울적해졌다. 그 나마의 기쁨조차 차츰 고통스러워져서 날아가버린 큰아들도 곱슬거리는 머리칼 이 유난히 새카맣고 부드러웠었다. 둘 다 옳았다. 단지 나이가 다를 뿐이었다. 집을 떠난 새도 일정한 기간 동안은 집 주위를 맴돌고 들락거리지 차마 멀리 떠 나지는 못하는 때가 있다. 그 시기를 구순하게 넘겨야 멀리 날아가서도 버틸 만 한 힘이 날개 죽지에 붙지 않던가. 큰아들이 땅끝으로 향한 길에 나타나지 않은 지는 벌써 여러 해 되었다. 열두 살짜리가 가끔씩 형의 안부를 전해 주기는 하였다. 고깃배를 탈 때에는 직접 만 나는 일도 꽤 자주 되리만큼 선창에 들락날락하였는데 장사치의 배를 타게 된 이후로는 남에게서 들은 소식을 전해 주었다. 고깃배를 타던 얼마 전까지만 해 도 집에 가는 동생에게 생선을 들려보낸 적도 있었으나 그 자신은 오지 않았다. 아우 시켜 보낸 생선을 받으면 자기가 기다리는 것이 죽은 생선이 아니라 아 들이라고 여겼었다. 멀리 가는 배를 타기 시작하자 그녀는 아들을 기다리는 대 신에 아들의 소식만 기다렸다. 건강하고, 잘 웃고, 열심히 산다는 소식만. 그녀가 알기로도 나이 먹은 아들이 아버지를 피하는 것은 그닥 드문 일이 아 니었다. 꼭 주정뱅이 망나니를 애비로 둔 자식들만 뛰쳐나가는 게 아닌 이상 아들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큰아들의 냉정함은 여느 경우를 지나쳤다. 집 떠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아버지를 감싸고 도는 아들이 달리 없었기에 더욱 두드러진 변화였다. 집 떠나기 전의 유난스러움이나 그 이유의 냉담함이나 둘 다 당연한 것이었다. 이방인 꼬레의 아들로서는, 여느 남자들과 비슷한 아버 지를 가졌다면 - 주정뱅이 아버지이건 부지런한 아버지이건 둘 다 흔히 볼 수 있는 남자들이었다. - 아들 역시 여느 아들들과 비슷한 나이에 자연스럽게 조금 씩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나가지만 그의 아버지는 무엇한 가지도 여느 남자들과 닮은 점이 없었다 .연한 심장을 가진 시절에는 그렇기에 더욱 아버지 앞을 가로 막아서려고 덧없는 몸부림을 하다가 어느 날 아침 돌연히 떠나버리는 것.... 피치 못할 과정이었다.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 그보다도 더 까마득한 옛날부터, 아마도 사람이 배를 타기 시작한 무렵부터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배를 띄우던 바다에 있었던 섬인지 라 이 섬의 사람들은 별스럽게 생긴 사람들을 보고도 그닥 놀라지 않았다. 배를 탈 줄 아는 건 모두 사람이라고 여겼다는 편이 옳을 게다. 그러나 이방인이라는 말이 그의 아버지처럼 딱 들어맞는 경우가 달리 없었다. 아프리카 인도 아라비 아 인도 심지어 인도네시아 인도 그의 아버지처럼 터무니없는 이방인은 아니었 다. 그들보다 훨씬 더 먼 곳에서 그들의 나라를 다 거쳐서 흘러온 사람이 꼬레 였다. 그는 모든 세계의 바깥에서 온 사람이었다. 배를 타고 몇몇 해를 다녀도 그런 사람은 보지 못하고, 사람은커녕 그곳에서 온 물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 게 그를 세상의 바깥에서 왔다고 치부하지 않으랴. 생김새나 말씨가 다른 이방 이라면 이내 섞일 수 있는 일이었다. 행동거지가 다르다 해도 그닥 문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 어째서 그는 생김새나 말씨나 행동이나 따위를 훌쩍 뛰어넘어서 애초부터 다른 씨앗이었는지, 이 섬의 여인에 게서 태어난 아들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다르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무엇 이 다른지조차 모를때에는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아들만큼의 견문도 없는 여인은 사람과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그리 수고스럽 게 복잡히 분류하지 않았다. 그녀가 분명하게 구분하는 인종은 단 두 가지였다. 부자 인종과 가난한 인종. 자기의 몫이 무엇인가는 날 때부터 하나님이 정해 놓 은 것이니까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으나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것을 모를 수도 없었다. 부자 인종은 겉보기가 얼마든지 다르니까, 또 그들의 생각을 잘 알 만큼 가까이 대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최소한 가난뱅이 인종은 다 같았다. 외양까지 그랬다. 타고난 빛깔이 무엇이건 그들은 결국 흙빛에 물들 고 나이 먹어 주름살이 파일수록 살결마저 똑같고 걸치고 있는 옷은 더더군다나 너나 할 것 없이 비슷한 누더기였다. 피렌체에서 온 거지와 아프리카에서 온 거 지가 무엇이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꼬레가 아프리카의 끄트머리에 있는지 에스 파니아의 섬인지 알지도 못했지만 설사 그것을 안들 달라질 것은 터럭만큼도 없 었다. 조리 있게 말로 표현하지는 못했으나 여인은 아들의 갈등을 잘 알았다. 농사 꾼 여자가 땅을 알 듯이. 아들이 벗어나지 못하여 몸부림치는 것은 먼데서 온 이방인의 아들이라는 것보다 실상 그 가난뱅이 인종이었다. 왜 모르랴. 이 섬의 남자들이 누구나 젊어 한때 가지는 꿈, 그리고 어른이 되 어서도 벗어나기 어려워서 시달리는 꿈, 대개는 술로 달래거나 처자식에게 화풀 이로 달래는 꿈. 그 꿈을 남편이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만 그가 이방인이었다. 남자들이 그럴 수밖에 없음을 왜 모르랴만 이방인 남편이 그녀에게는 다행스러 웠다. 그녀가 지긋지긋하게 보고 듣는 남자들.... 소심한 남자들은 제 술값을 벌 만큼은 꿈지럭거렸다. 뻔뻔한 남자들은 새끼들 먹일 빵까지도 여자에게서 빼앗 아 보태었다. 그보다 용기 있는 사내들은 도둑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아 까운 사내들은 배를 타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이 배를 타기 시작했을 때에 그녀는 일찌감치 내다보고 있었다. 도리 없 는 일이었다. 어떤 종류에도 속하지 않고 묵묵히 일만 하는 남자란 쉬운 게 아 니었다. 남편은 이방인이니까 그럴 수 있었다. 다른 사내들과 어울리는 일이 없 으니까. 그러나 아들은 이곳 사람이었다. 이곳에 없는 것이 바다를 건너면 어딘 가에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 이곳 사내였다. 똑같이 바다를 보고 있어도 이곳 사 내들은 끊임없이 바다와 나눌 말이 많았다. 어딘가에서 떠나와 기진맥진하여 이 곳에 와 닿은 남편은 텅 빈 눈빛으로만 바다를 보았다. 아무 말 없이, 벙어리 꼬 레라는 별명이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남편이 너한테는 무슨 말을 해?" 여자들은 가끔 궁금히 여겼다. "마누라한테 말이 무슨 필요가 있어? 다른 거나 잘하면 되지." 무슨 화제이건 꼭 킬킬거리며 끝막음하는 여자도 있었다. 꼬레의 아내는 조용 히 대답했다. "뭐든지 다 잘해. 화내는 것과 때리는 것만 빼놓고는." 그들을 되받아치기 위하여 한 말이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말수가 적다는 게 놀림감이 되다니.... 수다스러운 남자일수록 여자들의 수다에 화를 내게 마련이었 다. 남자끼리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간간이 술집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으레 남 보다 자기가 더 떠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들이 마주쳤을 경우였다. 꼬레는 밖에서야 물론이었지만 집에서도 거의 언제나 듣기만 했다. 그에게는 마음 내킬 만큼 떠들어도 좋았다. 말이 되건 안되건. 끄덕이거나 도리질을 하는게 보통이었 지만 가끔은 '그래'거나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것조차 대개는 '그래'였다. "마음껏 떠들어도 화내지 않고 게다가 틀린 소리를 해도 당장에는 무어라고 하지 않아." 틀린 소리를 하고 나면 말한 사람이 먼저 알게 마련이라고까지는 실토하지 않 았다. 하니까 나중에라고 남편이 무어라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제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일단은 반대하고 보는 게 남자들인데...." 그 소리를 한 여자는 틀린 것이라고 끝까지 주장하는 성질이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도 있었다. 언제인가 그녀가 아뭇소리 안 하고 있을 때에 그가 불쑥 "그래."라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놀랐고 다음에는 의심했다. 마을 여자들과 비슷한 종류의 의심을. 그는 언제나 적당한 간격을 두 고 그 대답을 할 뿐이지 아내가 무슨 소리를 하거나 듣지 않는 건 아닐까? 아니 면 알아듣지 못하는 건 아닐까? 아니, 그녀는 결국 도리질을 했다. 그는 항상 다 른 소리를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평생을 바다소리가 밑바탕에 깔린 채 살아온 그녀였기에 그럴 수도 있으리라고 이해했다. 여자도 차츰 말수가 적어졌다. 4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배 밑창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은 소리로만 구분이 되었다. 머리 위에서 발소리가 끊기면 깊은 밤이고 덧붙여서 바다가 순조로운 밤이었다. 그럴 때일수록 바람을 타고 가는 배는 빠른지 느린지조차 모르게 조용했다. 밤 낮없는 어두움속에 갇혀 있는 그들로서는 견딜 수 없이 배가 울렁거릴 때에 배 가 빨리 가는 줄만 알았다. 그들은 항상 자고 있었고 또 항상 깨어 있었는데 그 렇게 조용한 밤, 배가 아무 데로도 가지 않는 것처럼 평온할 때에야 셋 다 깨어 있게 마련이었다. 조용한 것이 더 불안했다. 물소리조차 머리 위에서 났다. 깨어 있음을 서로 번연히 알건만 대답하는 목소리가 없자 같은 목소리를 되풀 이했다. "명부의 어느 구석에 처박을 것인가?" 셋 중에서 비교적 곱상하게 생겼던 사내의 음성이었다. 심성도 고운 듯 보였 었다. 그가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에 한숨이 나왔으나 그래도 맞장 구치지 않았다. 비탄은 맞장구를 받으면 견딜 수 없이 곤두박질하는 법. 배에 실리기 전, 하필이면 뱃머리에 달린 장식이 사람 얼굴임에 이것이 저승 길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머리칼을 술렁술렁 풀어헤친 여자의 얼굴이 앞대 가리에서 물길을 가르고 가는 배라니 달리 보일 여지가 없었다. 그 물귀신이 이 끌고 가는 배에 어울리게 저승 사자들은 키들거리고 소리지르고 그들을 배 밑창 에 처넣었다. 어둠 속에 처박히니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 계속 남아 있었다. 훨씬 나중에야 서양 배들은 앞머리에 짐승 대가리가 되었건 사람 머리가 되었건 만들 어 붙여 색깔까지 곱게 입혀 장식하는 습관이 있는 것을 알았지만 최초의 것이 여자 얼굴이니 물귀신으로 보였다. 그 섬뜩한 건 이빨이 몇 개 안 남은 뱃사람 의 입 속에서 유난히 붉어 보이던 혓바닥보다 더했다. "어디로 가긴! 설마 산 사람을 잡아먹기야 할까." 험상궂은 사내가 툭 내뱉었다. 그러려니 했지만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사내는 끊임없이 자기가 '산 사람'임을 내세웠다. 누군가가 줄곧 주장하지 않 으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캄캄한 상자 속에 담겨서, 물밑에 잠겨서 어디로 가 는 것인가 그에게는 의심의 여지도 없는 일이었다. 저승길. 그 말을 입밖에 내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기가 저승길을 가면 갔지 '산 사람'의 발목을 잡아 당기는 짓은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귀신이 되어서도 해야 할 일은 남아 있었다. 꿈과 생시의 구별조차 남 에게 묻지 않고는 모르는 형편이었고 자신을 이미 귀신으로 치부하고 있었건만 그래도 분명한 것이 간혹 있었다. 저승길을 혼자 가는 것. 아무리 막막해도 '산 사람'을 떼쳐 놓고 가야 하는 길. 저승 가는 길이란 멀디멀다고 노인네들은 눈앞에 본 듯이 근심하기가 예사였 다. 당해 보니 그들이 옳았다. 관 속에 노자를 넣어 주는 것도 보았다. 강을 건 너지 못하면 헤매게 된다고 노인들은 자손들에게 뱃삯을 넣어야 한다고 가르쳤 다. 이 배의 저승 사자는 뱃삯을 받는 대신에 돈을 치른 게 다를 뿐이었다. 그에 게는 가르칠 자손도 없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노인들이 손자들에게 가르친 다음 말은 잊지 못하였다. 여름철 낮잠 자다 개꿈에 잡히더 라고.... 그들은 타일렀다. 꿈에 아무리 얕은 개울일 망정 홀딱 건너버리면 그것 으로 갈림길이라고. 과연 그런 꿈을 꾸기는 하였으나 하도 생시에 타이름을 많 이 들었기에 개울 건너다가 말고 아차, 이걸 건너면 깨어나지 못한다더라, 소스 라쳐 잠을 깨곤 하였다. 딱 한 번, 고뿔에 열이 심하여 차가운 물이 싫지 않았던 일이 있었다. 그러자 세상 뜬지 오래 된 할아버지가 돌연 나타나서 호통을 치더 니 지팡이로 손자를 때려 돌려세웠다. 때려눕히지 않아도 '산 사람' 스스로가 저승 타령에 물들지 않아 안도한 탓일 까. 아니면 귀신도 혼자서는 외로운 탓일까.... 잠든 줄도 미처 모르고 꿈을 꾸었 다. 어지간한 꿈은 꾸면서도 이미 이게 꿈이려니, 상당히 눅지근한 그였는데 그 걸 구별하지 못하게 된 것이 여러 해 전부터였다. 생시에 당하는 일을 두고 이 게 꿈이려니, 꿈이려니, 아무리 읊어보아도 결코 깨어나지 않으니까 무슨 일을 당해도 꿈이 아님을 알아야 했다. 아버지가 강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는 다급하게 뛰어들었다. 자 기가 헤엄에 능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한없는 수렁 속 으로 빠져들었다. 물귀신 생각도 그제야 들었다. 꿈이라고 치부하지 못하는 대신에 그는 고기가 되려고 버둥거렸다. 퍼덕거리 다가 어느 결에 겨우 물 위로 한 번 떠올랐다. 아버지는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강 건너편에 올라 있었다. 물귀신이 그의 발목을 잡아들이고 그는 고기가 되지 못했다.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다가 겨우 그는 버둥거리던 몸짓을 그쳤다. 고기가 될 수 없으면 시신이 된다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자 매사가 지극히 간단해졌다. 그는 시신이 되었다. 물에 퉁퉁 불은 몸이 되자 그제부터는 다시 빠지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갔다. 그가 제 시신을 따라서, 제 시신을 내 려다보며 계속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면서도 괴이쩍을 까닭이 없었다. 무언가에 걸려 곤두박질하기 전까지는. 요동을 심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가 부딪쳤던 궤짝이 그 위에 얹힌 궤짝을 떨 구어내렸다. 배 밑창에는 궤짝이 많았다. 그것 역시 화란인들이 동방에서 산 물 건이었다. 궤짝이 사람 위에 떨어진 게 아니라 물건이 물건 위에 떨어진 것뿐이 었다. 진땀에 젖은 귓전에는 계속 물소리가 났다. 물 흐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물이 아우성치며 부르는 소리였다. 그는 부르는 대로 가야 했다. 그는 널빤지를 두들 겼다. 그러나 견고한 관 속에서 벗어날 길이라곤 없었다. 죽음으로 가는 길마저 막혀 있었다. 시신이 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데도. 그의 발광을 두 사내는 오랫동안 내버려두었다. 번갈아 하는 짓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대개 시신처럼 널브러져 있었던 편이었다. "됐소. 이제 그만하시오." 겨우 참견이 나온 것은 그가 더 이상 무슨 짓을 할 수 없을 무렵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가야 하나...." 발광을 멈추고 그는 그예 물었다. 누구에게건 물어야 했다. 그리고 그럴 경우 에 누가 되었건 대답할 책임이 있었다. 험상궂은 사내가 그로서는 믿겨지지 않으리만치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돌렸 다. "지금 문득 생각이 났소." "...." "당신까지 못 견딘다면 이제 끝이구나 여기다가 문득 든 생각이오." 그랬다. 그는 항상 가장 조용한 사람이었다. 몸부림할 때에는 몰랐는데 머리 한 귀퉁이가 그제야 끈적끈적했다. "자기네들 시조가 궤짝에 실려 왔다는 허황된 옛날 얘기가 가끔 있소. 들어보 았소?" "...." "궤짝 타령만 있는 줄 아시오? 알에서 나왔다고도 하지 않소. 그런 소리 흘려 들으면서 어지간히 미친 사람들도 많다고 여기지 않았더랬소?" 내용은 여하간에 그의 계속 차분한 음성에 놀라운 효과가 있었다. "그게 사실인가 보오." 사내는 터무니없게도 킥킥 웃기까지 했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이 암흑 속에서 누군가 웃음소리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궤짝이 뭐요? 배요, 결국. 옛날 사람들이 바다에 나타난 배를 궤짝으로 보지 않았겠소?" 다른 사내가 곁에서 짤막한 한숨을 지었다. "어디에서 왔건.... 제 발로 나선 사람보다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쫓기기 전에 야 바다에 궤짝을 띄웠겠소?" 사내의 음성이 확고해졌다. "또, 우리처럼 맹랑하게 잡혀서 흘러온 사람인들 없었겠소?" 무얼로 그를 막으랴. 그는 여전히 '산 사람' 얘기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가 문에서 떠받드는 시조들이 결국 이런 사람들이었다고? 그로서는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비약이었지만 그의 확신을 꺾을 생각은 없었다. 너는 그렇게 되어라. 나 는? 설령 네 비약이 사실이라 해도, 그 사실이 이루어진다 해도, 삶의 고통 뿐 아니라 죽음의 고통조차 이토록 수렁인데 어찌하여 사람들은 대대손손 물릴 자 손을 말하는가? 그는 검다 쓰다 대꾸도 없이 픽 돌아누웠다. 그러나.... 사내의 이야기가 머리 속에서 다르게 풀려나갔다. 그들은 어느 피안에서 흘러온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은 저승길을 다 거쳐서 조 선 땅에 온 사람들인가?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떠났던 옛 사람들 중 아직 까지 저승을 헤매고 있는 이가 얼마나 더 많을 것인가? 전설에서는 그들의 전생 을 고작 용궁이라거나 부처의 나라라고 얼버무리기가 예사였다. '산 사람'의 꿈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살아있는 동안은 꿈에 시달려야 할 뿐, 그가 시달려야 하는 꿈은 모두 지나간 기억이지 한치 앞의 일도 아니었다. "나는 아무 곳에도 가 닿고 싶지 않소." 그는 조금 전의 꿈 이야기를 띄엄띄엄 꺼냈다. 꿈에 본 아버지가 실상은 불에 타서 죽었노라는 말을 할 때에는 유난히 힘이 들었으나 까마득한 기억을 더듬도 록 그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 지옥을 끌고다니며 어디에 가 발을 붙이겠소?" 곱상한 사내는 '산 사람'보다 죽을 사람 쪽에 이끌리듯 간단히 대답했다. "다행이오. 이제 아버님은 불을 끄고 피안에 가 닿으셨구려." 너무나 고마워서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더듬더듬 손에 걸리는 대로 옷깃을 잡으니 이번의 말소리는 달랐다. "댁은 계속 흘러갔다니 아직 줄을 때가 되지 않은 모양이오." 무슨 말을 더 하랴. 한배 새끼들처럼 배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갇혀서 그들은 서로 서로의 탯줄이 끊기지 않도록 잡아주었다. 누구건 하나가 죽는다면 나머지 둘도 그 독이 퍼져서 살아남지 못할 일이었다. 태양과 바람.... 문득 갑판 위로 불려나간 그들은 어미 소의 배에서 떨구어진 새끼들처럼 눈이 부시고 다리가 떨려서 휘청거렸다. 빛과 바람은 그대로 기적이었다. 세상에 그런 것이 있다니! 저승의 졸개 같던 뱃사람들이 자기들을 관 속에 처넣은 것을 잊어버리고 거기에서 꺼내 준 은인이 라 감사의 일념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방인들을 사들여서 골치 썩히지 않고 길들이는 수법이었음을 그들이 알 턱은 없었다. 설령 알았다 할지라도 감사할 기력밖에 없었고. 상인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채찍의 위협도 없이, 간단히 그들을 길들였다. 훗 날, 배가 머무는 곳에서 산다는 사람들을 대뜸 배 밑창에 처넣는 것을 보고야 진상을 깨달았으나 충실한 머슴이 되어 있던 그로서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5 가장 그를 깔보고 못살게 굴던 사람까지도 말했다. 벙어리 꼬레는 천국에 가 리라고. 남편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아내가 당황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남편 은 천국으로 갈 것인데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욕심에서 나 오는 짓이었다. 혼자 남아서, 혼자 일하고 혼자 먹어야 한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에게만 걸린 문제였다. 남편을 위로한다기보다 자기를 타이르기 위하여 그 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누구든지 먼저 천국에 간 사람이 기다리며 되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요." 그가 끄덕인 것은 아내의 간절한 눈빛에 대답한 것이었다. 아내의 말은 알아 듣기 어려웠다. 이번에는. 기다리다니! 이곳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 뿔뿔이 괴로 운 여행을 떠난다는 것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모르는 것이 나았다. 그것을 알면서 사느라고 그는 종종 식은땀을 흘렸다. 식은땀을 흘리지 않으려 면 쉴새없이 더운 땀을 흘려야 했다. 이 섬에서 꼬레처럼 미친 듯이 일만 하는 사내는 없었다. 처자식을 먹이기 위하여 일에 미쳤다고 부러워하는 건 여자들이었다. 못난 사 내라고 흉보는 건 남자들이기 쉬웠다. 그렇게 일에 미쳐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 는 점에서만 의견이 일치하였다. 꼬레의 의견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왜 그렇게 일만 하는 거요?" 저 자신도 일에 미친 사람이건만 아내가 물을 정도였다. "힘드니까." 아내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엄청난 고통을 잊으려면 쉴새없이 다른 고통에 매달려야 했다. 때없이 찾아오 는 굶주림마저 그에게는 다행스러웠다. 위장의 고통만큼 확실하게 쓰라린 것은 드물었다. 굶주릴 때에 그의 머리 속은 가장 말갛게 개었다. 배고프다는 생각 외 에는 아무 잡념이 없었으므로. 먹을 것이 부족할 때에 아이들은 물론이려니와 아내에게도 먼저 먹이려 드는 때에는 아내가 감히 무어라고 말리기 어려운 가장의 권위가 그에게 있었다. 배 고픔을 참지 못하는 건 으레 남자들이라고 여겨온 그녀로서도 순순히 따를 만 큼. 침을 튀겨 떠드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손발 다 보태어서도 아내를 완전히 휘 어잡지 못하는 게 남자들인데 꼬레의 아내가 아무리 억척스러워도 말없는 남편 에게 순종하는 것을 이웃 사람들은 늘 궁금히 여겼다. 아내 역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천주님께 영광으로 돌리고 말았다. 그녀가 끝내 모른 것은 남편이 천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천주님이 선함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아 예 천주님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남편이건만 꼬레의 아내도 이웃 사람 들도 그가 천국에 가리라고 믿었다. 안또니오라는 이름을 얻을 때에 덤으로 세례까지 받았으나 그 이름을 이해하 지 못했듯이 그 의식조차 꼬레는 이해하지 못했다. 즉, 유아 세례와 똑같았다. 세상이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는 몇 가지가 더 붙건 궁 금해 하지 않으므로 아무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을 뿐. 사람들이 모두 그가 천국 에 가리라고 믿으면 그렇게 믿으라고 내버려둘 뿐. "이방인의 영혼은 참으로 완악하오." 신부는 늙은 화란 상인에게 한숨지으며 실토했다. 나가사키를 떠나서 참으로 여러 해 만에 귀향하는 길이건만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늙은 상인은 예의 바르게 눈을 껌벅였다. 평생을 장삿길 위에서 보낸 노회한 상인은 영혼에 관해서라면 모르겠으나 이방인에 관해서는 신부보다도 제후보다 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다루는 방법도. 군대와 함께 들어가는 이 방이라면 어디건 비슷했다. 그러나 맨몸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방에서 지켜야할 첫 수칙은 그 땅에 닿는 순간부터 자기가 이방인임을 한시도 잊지 말고 원주민 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보답은 틀림없이 왔다. 원주민을 이방인 으로 보는 한 가닥 마음조차 깨끗이 몰아내기만 한다면. 그닥 쉬운 일은 아니었 으나 '돈'이라는 우상을 섬기기 위해서는 그것부터 해야 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부에게 그런 발설을 할 수는 없는 일.... 예의상으로나, 이득이 없다는 점으로 나. 상대방이 납득할 가망이 없다는 점으로나. 물론 그는 신부를 좋아했다. 존경하기도 하였다. 그가 추구하는 재물을 그의 목숨과는 결코 바꾸지 않을 터이니까. 재물이 우상인 것을 그도 인정했고 신부 는 목숨을 열 번 내놓더라도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을 터이니까 상인 역시 하나 님을 항상 믿고 있었다. 팔려가는 조선인 노예에게 그가 지극한 관심과 친절을 보인것조차 상인은 우 호적으로 받아들였다. 동방의 전도에 미련이 많이 남을 줄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노예에게 전도하기란 얼마나 간단한 일이랴. 초기의 기독교가 로마에서 노예들을 먼저 개종시켰다는 것이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불쌍한 사람들이오." 조선 땅에 갔었던 신부는 그들이 얼마나 불쌍하게 지난 몇 해를 살아남았는가 누누이 역설하며 주인의 고나대함을 희망했다. 상인은 끄덕였다. 그들이 어떻게 죽었고 어떻게 끌려갔고 어떻게 노예 시장에 섰는가를 신부처럼 그림 그리듯이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달리 없었다. 그는 여느 신부처럼 기록에만 충실한 게 아니라 그림 솜씨까지 뛰어난 사람이었다. 전란의 참상을 그려내다 보면 겉 으로 엄격하고 가슴에는 열정이 가득 찬 신부가 가끔 말이 막힐 만한 장면도 있 었다. 상인은 미상불 감동하였다. 나이 탓인지 이번에 귀국하면 아들만 내보내야 겠다고 작심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진 탓도 있었다. 조선인 노예들이 이제까지 본 어느 노예들보다 말썽 피우지 않고 움직이는 것도 한 이유였다. 둘은 처음부 터 심성이 온유해 보였으나 조금 의심쩍었던 나머지 한 명까지 그랬다. "조선인들을 그렇게 가까이 보시다니, 신부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왜군 진영에 있었노라는 대답이었다. 그러기에 그가 가는 곳마다 아비 규환을 목도할 수 있었노라고. 화란 상인은 무덤덤히 말했다. "전쟁이란 그런 거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신부가 동방 전도에 실패한 것도 도리 없는 일이었다는 생각 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불쌍한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을진대, 그 와군 진영에서 그닥 큰 성과를 보았을성부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왜군의 장수를 전도하여 그의 죽지 밑에서 움직였다면. "왜군 장수는 충성된 신자였습니까?" 신부는 물론 그것을 보증했다. 정벌의 목적이 관철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패전 의 책임을 모면할 수 없게 된 왜군 장수는 이제까지 그 이방인들의 풍습에 따르 면 당연히 할복하여 자살해야 할 것을 거부하였노라고. 패전의 책임을 물어 참 형에 처한다면 감수하겠지만 하나님이 주신 목숨을 내 손으로 끊는 죄를 범하지 는 못하겠노라고. "아...." 상인은 주억거렸다. "그들의 전통으로는 치욕적인 일이었겠군요?" "그렇지요. 패장이 할복을 거부하다니.... 앞날이 끊기는 치욕이지요." 대신 살아남았지. 득실이 반반이거나 그래도 득이 많은 편.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당연히 살아남는 편을 어떤 치욕과도 바꾸었을 상인이 웅크린 미소를 지었다. 양순한 조선 노예들이 신부를 어떻게 판단하였는가 알았다면 화란 상인이 배 를 움켜쥐고 몰래 웃었을 일이었다. 그들은 신부의 기묘한 복장을 보고 저승 사 자에도 품계가 달리 있는가 보다 정도로 치워버렸다. 신부가 그것을 모른 것은 다행이었다. 착한 신부가 이방인의 터무니없는 오해를 알았으면 무어라 기도하 였을까....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 저들의 무지를 눈뜨게 해주소서? 아마도 몰랐던 게 약이었다. 지쳐서 동방을 뒤로 하던 그가 그들의 오해를 알았더라면 화란 상인처럼 웃을 기력도 없었을 터였다. 몰랐으니까 마지막 동방 전도를 그 들에게 쏟았다. 왜말을 할 줄 아는 신부였기에 왜말을 아는 조선인을 통하여 전도하기는 쉬웠 다. 즉, 그들은 무슨 말이건 들었고 무엇이건 시키는 대로 했다. 상인이 시키는 일을 다한 것처럼, 다른 배꾼들의 말도 다 들은 것처럼. 동방에서 가장 전도하기 쉬운 사람들이었다. 신부의 친절한과 가련히 여김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심이 었으나 설령 그가 불친절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복종했을 터였다. 왜군의 영혼 을 구하려다가 조선인의 영혼도 덤으로 구하려는 것을 알았던들 아무 차이도 없 었을 게다. 그들의 운명이 복종해야 하는 것임에 화란인의 종인 그들을 신부는 주님의 종이라고 불렀다. 누구의 종이건 매일반이었다. 신부의 왜말도 원치 않 았고 조선인의 왜말도 그닥 나을바 없었으므로 어지간한 것은 각자 편할 대로 생각하였다. 왜말을 아는 조선인이 제멋대로 생각한 것을 다른 조선인들이 무조 건 받아들였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저승 사라자는 오해는 차츰 벗겨졌지만 최소한 품계가 다른 문제가 남아 있었 다. 상인과 신부는 어떻게 다른가? 간단히 대답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험상 궂은 사내였다. "상인은 왜인들에게 총을 팔고 그 대신에 물건을 사가지고 가네." 어디에서나 상인은 그렇다. 그 물건이 바로 자기들이라는 것..... 그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물주가 누구인가?" "그렇다는 말이지. 도둑놈과 장사치가 어떻게 손을 잡았건....." 도무지 왜인들에 대해서는 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들이었기에 피차 어물어 물했다. "신부는?" 사내의 대답이 애매했다. "신부도 사람을 사는 모양인데......" "무얼 팔고?" "글세, 예수를 팔아서 사람을 사는 상인 같기도 하고....." 둘다 알아듣지 못하여 묵묵히 바라보자 그는 에라, 모르겠다. 내친 김에 호언 장담했다. 틀려도 무방한 문제였다. "아무려나 그 사람한테는 예수가 굉장히 귀한 눈치이던데 그걸 팔아서 사람을 산다니 그만 아닌가?" 일련 그럴싸한 얘기였다. 왜인들이 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 함부로 다룬 것은 거저 빼앗아갔기 때문이고 화란인이 왜인들보다는 그들을 낫게 대우하는 것은 제 돈을 치르고 산 까닭이 있으니 세상의 귀물인 예수를 팔아서까지 그들 을 사려는 신부가 그들에게 친절한 것까지 아귀가 딱 맞는 일이었다. 해사는 사내가 의심이 많았다. "그렇게 사람을 사서 무엇에 쓴다던가?" 더더군다나 예수가 무슨 '귀물'이 아니라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자 그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죽을 사람을 판다는 것은 아예 꿈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로 황당한 일이거나 조상의 묘를 팔아먹는 것만큼 무도한 일이었다. 그리고 예수를 팔 수 있는 임자가 누구인가도. "상관 있나? 예수도 우리처럼 자꾸 다시 팔리는 모양이니....." 험상궂은 사내는 껄껄 웃었다. 한 번 팔린 그들을 누구 몇 번 다시 사건 그 것은 저희들끼리 상의할 일이지 그들의 소관이 아니었다. 그들을 명심할 것은 우선 명보존밖에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예수가 하도 이리저리 팔려서 임자 다툼이나 안 하나 모르겠다." 6 아들이 고깃배를 타러 나갈 때에 꼬레의 아내는 선뜻 단념했으나 꼬레는 말리 려고 들었다. 그날이 평생 가장 말을 많이 한 날이었다. 어눌하게 이어지는 아버 지의 말을 듣는다기보다 얼굴을 뻔히 바라보던 아들이 비웃듯이 실쭉 웃었기에 더욱 더듬거렸다. 아들이 그런 적은 없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다시 맛본 육친 의 기쁨과 세상의 고통을 물려주었다는 죄스러움 때문에 착잡한 대로 그나마 몇 마디 하는 말은 언제나 아들에게였고 아들 역시 더듬거리는 아버지를 탓하지 않 았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우리는 바다에서 야식을 건져 먹었어요." 마치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 듯 그의 말씨는 유난히 빨랐다. 그가 잽싸게 던 진 '우리'라는 말에서 아버지는 깨끗이 밀려났다. 그의 흙빛 피부가 더욱 검어지 자 아들은 슬그머니 외면하더니 바다에 눈길을 보냈다. "이 섬에서 태어난 사내들은 낳자마자 바다물빛이 들게 마련이구요." 그들은 땅 끝에 서 있었다. 꼬레도 하릴없이 바다를 보았다. 세상의 어느 바다 보다도 아름다운 빛깔이기는 했다. 그는 모든 바다가 서로 통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바다가 모두 여기 같지는 않다." 엉성하게 자란 아버지의 수염이 희끗희끗 해풍에 퍼들거렸다. 아들은 그것조 차 마뜩지 않았다. 늙은 염소의 수염과도 닮았다. 그는 수염 대신 솜털이 빳빳한 턱을 치켜들고 다그쳐 물었다. 바다에는 모든 것이 다 있는데 땅에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 파슬파슬 부서지 는 욕지기 나는 흙? 햇빛까지도 그 위에서는 지저분한 빛깔을 내었다. "비옥한 땅에는 어디나 지주가 있구요."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아들이 왜 갑자기 표변했는지 그제야 알았다. 그 해의 소출은 어느 때보다도 형편없었다. 온 가족이 다 나서서 햇빛 아래서 건 달빛 아래서건 섬 바대편 지주의 일을 거들지 않으면 넘기기 어려운 기근이 었다. 왼 섬의 물은 모두 그쪽의 샘으로만 솟아나듯이 물 걱정이 없는 곳이라 가물 때일수록 농사가 잘되어 지주의 농장은 햇빛 아래에서 그림 같고 달빛 아 래에서는 사뭇 꿈같이 올리브 천지였다. 수확기에 그처럼 일손이 많이 필요한 일도 흔치 않았고 기근 덕분에 그토록 품값이 헐한 것도 늙은 지주의 평생토록 처음 당하는 횡재였다. 지주의 안마당에는 돌이 깔려서 맨발이 뜨거웠다. 개미떼처럼 끌어다 모은 올 리브가 산을 이루었다. 분수대의 물길조차 어느때보다도 더 높았다. 그는 물길 만 보면 갈증을 느껴다. 배고픔은 시욱지처럼 견딜 수 있는 꼬레였지만 갈증은 유난스러운 처지였다. 아내는 그가 너무 땀을 흘리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말하곤 하였다. 가까운 샘이 마른 지는 오래 되었고 어렵사리 먼 걸음에 길어오는 마실 물이 오두막 선반에 신주 단지처럼 올라있는 생각을 하자 분수에 입을 대고 그 물을 다 들이켜고 싶었다. 흙 한 점 튀지 않은 하얀 옷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지주 영감이 그늘에서 있 었다. 들고 있는 지팡이마저 이름난 오입쟁이답게 멋부려 가눌 줄 알았다. 그는 일 감독을 나온 게 아니라 집안에 있기가 답답하여 나왔을 뿐이었다. 일 감독이 야 젊은 하인들의 소임이었다. 언제나 가장 힘세고 건장한 사내들의 몫은 다른 사람들의 일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주인이 그림자처럼 나와 서 있을 때에는 하 인들도 유난히 멋을 부리며 꽥꽥거리고 설쳐대었다. 젊은 처녀들도 일은 일대로 하면서 꼬댁거리기는 마찬가지었다. 지주 영감의 눈이 가끔씩 깨끗한 처녀애들에게 멎었다. 처녀들도 그것을 번연 히 아니까 유난히 목덜미나 발목에 힘을 주었다. 땀을 씻느라고 손을 올리는 동 장마저 아무도 보지 않을 때와는 다르게 움직였다. 아무리 오래 겪어도 익숙해 지지 않는 것이 여인네들과 뒤섞여서 하는 일이었다. 그는 땅갓만 내려다보고 자루를 날랐다. 왜 갑자기 지게가 아쉬웠을까? 한쪽 어깨에만 무거운 짐을 걸치 면 늘 몸이 비뚤어졌다. 그러나 지게 생각은 처음이었다. 지주가 들고 있는 지팡 이가 흡사 지게 작대기로 보였다. 아들도 힘에 겨운 짐을 묵묵히 날랐다. 유달리 자루를 많이 채우는 것이나 땅 갓만 보고 가는 구부정한 자세나 깔축없이 꼬레의 아들이었다. 그는 아들의 남 루한 옷 밑으로 구릿빛 종아리가 매끈한 것을 볼 때마다 갈증도 있었다. 그는 문득 편편히 않은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지주의 짓무른 눈이 처녀들을 뒤쫓다가 곧장 그들 부자에게 와 꽂혔다. 맹렬한 적개심이 튀어나오는 눈동자였 다. 그것도 자기가 아니라 아들에게였다. 그는 엉겁결에 처녀들 쪽으로 눈을 주 었다. 혹시.... 아니, 아무도 꼬레의 아들에게 별스러운 눈길을 흘리는 처녀가 없 었다. 착각인가 보다가 다시 눈을 땅으로 떨구는데 지게 작대기가 쓱 앞으로 나오더 니 구릿빛 종아리에 얽혔다. 아들이 쓰러지고 아구리를 놓친 자루가 마냥 풀리 자 올리브 열매는 사방에 쏟아져 나왔다. 아들이 걸려서 넘어졌던 지팡이를 늙 은이는 무심코 잘못 내밀었다는 듯이 하품을 하며 거두어들였다. 하품하느라고 더욱 쭈그러든 눈꺼풀 사이로 자그마하나마 흡족한 빛이 새어 나왔다. 늙은이는 유유하게 하얀 칠을 한 집으로 들어갔다. 늘어지게 낮잠을 잘 시간이었다. 아들을 곤혹한 빛으로 흩어진 올리브를 내려다보다가 지주의 뒷모습을 바라보 다가 허리를 굽혔다. 잘 익은 올리브는 멀리도 굴러갔고 그것을 주워담으려고 두리번거리는 그의 모습이 처녀애들에게는 여간 재미있는게 아니었다. 매실보다 작은 알갱이를 일일이 주워담는 동안에 아들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곤혹함이 짜증으로 짜증이 적개심으로 바뀌는 것조차 한창 나이 처녀들에게는 구경거리였 다. 아들에게 자기가 본 것을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노망한 늙은이는 몸놀림조차 굼뜬 법이라고 믿게끔 놓아두었어야 했다. "내가 뭐 잘못했나요?" 그때 간단하게 노인이 실수했다고만 말했어야 했다. "분명히 일부러 넘어뜨렸어요." 진종일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아들은 새삼스레 씨근거렸다. "네가 부러웠겠지." "예?" 돌아가는 길은 달이 밝았다. 달이 밝을 때에는 약초가 잘 보인다고 아내는 가 끔 주저앉아 꾸무적거렸다. 아버지와 아들은 느릿느릿 걸었다. 바다를 끼고. 지친 발길. 파도도 달 밝은 밤에는 요사스럽게 부서졌다. 약초가 잘 보일 만도 했다. "내가 부럽다니요?" 아들의 놀란 얼굴이 보름달을 정면으로 받았다. "그는 부자인 데다가..... 없는 게 없잖아요?" 깊숙이 파인 검은 눈은 종일 일에 시달리고 먹은 것은 그닥없고 달빛까지 받 아서 더 깊었다. 검은 고수머리도 더 검었다. 넓은 이마 역시 다 잘 보였다. 어 느 애비이건 아들의 손에 무엇인가 쥐어주고 싶지 않으랴. 더구나 그것 한 가지 밖에 손에 쥔 것이 없는 아들에게. "아무리 부자라도 죽지." 아들은 얼른 알아듣지 못하였다. 힘겹게 살려고 저마다 발버둥질치는데 아버 지는 왜 죽는 소리를 내놓을까. 좀 짜증스러운 눈치였다. 달빛에 비친 아버지의 얼굴이 유난히 늙어 보여서인지 그는 조심조심 항의했다. "그게 무슨 대답이 돼요?" "넌 젊었지 않니?" 아들의 용기를 북돋워 주려는 그답지 않는 시도가 잘못이었다. 아들은 지나 치리만큼 잘 알아들었다. 참으로 지나칠 정도로. 나머지 길을 침묵 속에서 걷던 아들이 집 앞에 다 와서야 입을 열었다. "자기가 죽은 다음에도 내가 오래오래 살아 있을 것이 억울했군요?" 아이의 음성에 실렸으나 그건 철 이르게 눈뜬 사내의 분노였다. "고약한 늙은이다." "고약하고, 정직하고...." 그는 허겁지겁 말하려고 했다. 그 늙은이도 죽고 애비도 죽은 다음에 아들이 오래오래 살아남는다는 생각을 하면 피로도 분노도 모두 사라진다고. 자기에게 는 그것 외에 달리 기쁨이 없다고. 죽을 때에 아들이 지켜봐 주는 것만이 살아 있는 희망이라고. 아들이 먼저 뇌까렸다. 착 가라앉은 침울한 음성이었다. "산적이 되는 사람들을 이제야 이해하겠어요." 그리고 선언했다. 의논이 아니었다. 이미 얘기가 다 끝났으니 내일 가기만 하 면 된다고 아버지가 아니라 늙은 영감쟁이를 바라보는 듯한 태도로. 그는 눌변을 짜내어서라도 설득하려고 들었다. 이제껏 입을 다물었던 사연, 그 가 겪은 바다의 무서움까지도 다 털어놓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너무 길고 너무 가두어 놓았던 사연이었기에 가뜩이나 부족한 말재주로 어떻게 건드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집채만한 파도도 부서진 뱃머리도 눈앞에 똑똑히 보이건만, 기껏 시작한다는 게 바다에서나 땅에서나 쉬운 일은 없다는 소리부터 나왔다. 아들은 대뜸 분개했다. "내가 언제 힘든 일에 불평한 적이 있었나요?" 그랬다. 맞는 말이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아들은 일에 절어서 살았고 아이답지 않게 군소리조차 안했다. 부모에게서 보고 배운 게 그것뿐이었다. "바다에 나가도 선주가 있고 선장도 있고......" 지주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려는 것조차 잘못 짚었다. "바다의 주인은 없어요. 선주건 선장이건 재주껏 바다에서 건져 먹을 뿐이에 요." 그는 마지막 호소를 내밀었다. "바다에 나가는 그때부터 목숨을 바다에 맡기는 건 어떡하니?" 다른 것은 실상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아들을 만류하는 까닭은 그것 하나였 다. 죽음을 그닥 두려워하지 않는 이곳 사내들의 말버릇을 잘 알지만 그건 술집 에 앉아서 하는 수작이고 평생을 먼 바다만 다니던 배꾼들도 얼마나 두려워하는 지 그는 똑똑히 말할 참이었다. 이곳 사내들의 본을 떠서 아들이 아버지를 겁쟁 이라고 경멸해도 상관없었다. 연민 때문이었는지 아들은 그닥 비웃지 않고 선선히 대답했다. "네. 그 생각을 제일 먼저 했어요." "그런데도....." "그러니까 나가려는 거예요. 풍랑에 휩쓸리면 선주이건 나건 똑같이 목숨 하나 예요." 숨이 막혔다. 아들의 얼굴이 눈이 부셨다. 늙은 지주가 질투한 것은 당연했다. "그건..... 네 말이 맞다." 어느새 그는 목이 잠겼다. "어디서 그런 것까지 배웠니? 내 아들아." "꼭 같은 얘기예요. 풍랑이 덮치면 나이도 상관없어지니까 늙은이들의 심통이 없는 게 바다 아녜요.?" 풍랑이 덮치는 순간은 그렇다. 그러나 바다가 고요해지면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 소리를 아들에게 할 수가 없었다. 젊은 애에게 늙은이의 지혜를 가 르쳐 주는 것은 그가 앞으로 살아야 할 세월을 지레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이었다. 마치, 전쟁을 기억하면서 이승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처럼. 중년의 눈으 로 유년기를 보낸 꼬레는 그런 경우의 무력함을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옳다. 가거라." 그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애비에게서 그를 떼어놓는 것이 나았다. 침묵 속에서 배우는 것은 종종 더 지울 수 없이 남는 법. 가라 마라 하지 않아도 갈 셈이었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색다른 모습에 주춤했 다. 언제나 벌레처럼 땅을 파는 것 외에는 모르는 아버지였고 무엇 하나 그에게 자랑이 될 거리가 없는 이방인 아버지.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이지요?" "꼬레." 7 그 배에 실린 사람들, 아니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영육 구분할 것 없이 가련한 하나님의 아들로 똑같이 밀어붙인 것은 폭풍의 바다였다. 갑판이 기울어 주르륵 미끄러지면 주종의 구별도 없이 한데 엉킨 덩어리였고 부서진 돛대는 늙은이와 젊은이를 한꺼번에 덮쳤다. 저승의 배는 볼품없는 궤짝, 하시라도 깨어질 관, 모 두의 관이었다. 누구만의 관이 아니라 모두의 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저승 사 자란 것은 이미 없었다. 상인도 신부도 배꾼들도 등급따라 각각 다른 저승 사자 려니 여겼던 그들이 실상 그렇게 괴악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임을 그제야 분명 히 알았다. 아직은 살아 있는 사람과 사람이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만났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그 엄청나게 달리 쓰이는 두 가지 외침 이 같은 뜻이 되는 순간이었다. 누가 어느 나라 말로 소리 질러도 누구건 다 알 아들었다. 고향의 해안을 떠난 이후로 그는 처음으로 살려고 애썼다. 공포에 떨면서, 아 직은 살아 있다는 쓰라린 기쁨 속에서, 세상의 종말에 누구나 같은 분량으로 나 누어 가져야 하는 운명을 보고서야 겨우 생명이 되살아났다. 폭풍은 산고와 같았다. 씻은 듯 깨끗해진 바다에 볼품없는 꼴로 겨우 운신하 는 배였지만 그 배의 사람들이 모두 한배 새끼들처럼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한배 새끼 형제들도 여러 층이었다. 열병에 시달리는 늙은 상인을 간 호하면서 꼬레는 그가 살아나기를 바랐다. 제 집 문턱을 밟을 때까지 만이라도 살아 있기를, 거친 배꾼들보다 그래도 그의 손길이 섬세했는가, 혹은 눈썰미였던 가, 어느 나라말도 아닌 신음을 그가 잘 알아듣고 무엇이 어떻게 불편한지 제일 먼저 알았기에 환자 시중은 저절로 그의 소임이 되었다. 바다건 배에 대해서건 그닥 아는 바 없는 그였기에 그로서도 다행이었다. 정신이 들면 가끔 상인의 눈이 그에게 와서 멎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갈 얼굴인 듯이. 그 비슷한 눈길을 많이 보았던 꼬레였다. 그런데도 이 런저런 참혹한 죽음이 아니라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눈길이 먼저 떠올랐다. "할아버지도 내가 닦아 드렸지요." 저절로 새어나온 조선말에 상인은 눈을 껌벅였다. 할아버지의 눈도 그랬다. 그 제야 상인이 무척 노인임을 알았다. 그의 아들인 젊은 상인이 장년이었음에도 그 연로한 때까지는 그가 늙었는지 젊었는지조차 염두에 없었다. "살아계신 날까지는 잡수셔야지요." 먹을 것에 도리질하던 노인이 그가 후후 불어가며 내민 숟갈에 입을 벌렸다. 옳지, 옳지.... 그렇게 한 번만 더.... 며칠 후, 상인은 그의 손을 잡고 죽었다. 임종의 노인이 퍼들거리자 그가 급히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잡는 힘은 놀랄 만큼 강했으나 퍼들거리던 것이 멈추었 다. 아버지의 시신을 수장한 후 젊은 상인은 신부에게 말했다. "노예들을 해방시키렵니다." 주님께 영광을.... 신부는 벌떡 일어났다. 언제나 그들에게 관대하기를 고인에 게 역설하던 신부였다. 젊은 상인은 피로하여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원하기도 했고... 나도 이번에 돌아가면 장사를 그만둘까 합니다." 그러나 바다 위에서 그들을 해방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애초에 그들을 산 곳이 그들의 고향도 아니었다. 짐승 같은 왜인들 의 손에서 그들을 사준 것만도 이미 자비의 시작이었다. "적당한 때에, 그들이 원하는 곳에서...." 배가 닿은 곳은 인도의 고아였다. 서양 사람들이 많고 그 중에서도 화란인이 많았다. 배는 고아에 꽤 오래 머물러 있었다. 손볼 일도 많았고 장사에 걸리는 일도 많았다. 꼬레는 그 동안 내내 배 안에 머물렀다. 아무도 데리고 내릴 일이 없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짐을 부리느라고 바쁠 때를 제하고는 한가하게 눈앞의 땅을 바라보 는 것이 일이었다. 바다 위에서 보면 어느 땅이 그렇지 않으랴만 고아는 유독 그림 같은 곳이었다. 그림 같으니만치 막상 내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바라보면 그뿐이었다. 다른 조선인들은 땅에 발이라도 대어보고 싶어서 들썽거렸다. 한 번이라도 흙 을 밟고 싶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소원은 뜻밖에 순순히 받아 들여져서 상인과 함께 작은 배는 육지를 향하여 멀어졌고 조선인들은 뱃전에 서 있는 꼬레에게 연신 손을 흔들었다. 그는 그들이 짐이라도 지고 돌아오리라고 여겼다. 육지에 내렸던 후에는 항상 짐이 늘어나는 게 상인의 일과였다. 고아는 불타의 나라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 하였다. 어디에서 들었는지 조선 인 동료가 마지막으로 가르쳐 준 일이었다. 그 소리 때문에 고아가 더 그림같고 더 아득하게 보인것도 사실이었다. 자기가 얼마큼이나 멀리 왔는가를 더 이상 실감하게 할 도리는 없었다. 조선인들이 탄 작은 배는 드디어 육지에 가 닿았고 그들은 그림 속으로 사라 졌다. 상인은 다시 튀어나왔는데 조선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짐은 있었다. 그 리고 인도인들도 있었다. 신부의 말도 화란인의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그는 며칠 동안 우왕좌왕 하면서 그들을 기다렸으나 자세한 경위를 알 도리가 없었다. 돛을 올리고 배가 떠나는 것을 알자 그는 절망적인 눈으로 고아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차츰 멀어 지고 급기야 바다 밑으로 잠기기까지는 무척 오래 걸렸다. 경위를 몰랐으나 그 들을 다시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외견상 아무 변화 없이 배꾼들의 일을 거들었으나 그는 고개를 들이 않았다. 누구의 얼굴도 견디기 어려웠다. 배 안에 그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두 번 다시 폭풍을 무서워 하지 않았다. 폭풍은 아무리 무서워도 결국은 간다. 가끔은 죽기도 한다. 네가 죽는 것은 네 죽음이고 내가 죽는 것은 내 죽음이다. 동시에 죽어도 결국 네 몫 따로 내 몫 따로다. 훨씬 훗날에 신부가 말하기로는 그들이 해방되었다는 것이었다. 해방되었다는 게 어떤 뜻인지 잘 몰랐다. 그게 살았다는 소리인지 죽었다는 소리인지 물으려 다가 신부의 표정을 보자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분명히 그들은 고아에 살아 있 는 가 보다. 신부가 알기로는. 그러면 되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고아에 전쟁도 없고 기근도 없고 열병도 돌지 않기만 바랄 따름이었다. 열병까지 근심 해야 했던 게 고아를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가 겪은 탓이었다. 열병의 초기에는 생각할 기력이 있었다. 내내 조선인들의 일을 머리에 떠올렸 다. 그들이 자기에게 아무 소리 안 해주고 사라진 것으로 미루어서 그들이 꾸민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도망을 가려면 함께 가거나, 그게 여의치 않더 라도 귀띔을 하고 가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도망갈 까닭이 없었다. 늙은 화란 상인이 죽은 이후 그들은 종 취급을 받지도 않았었다. 거의 여느 뱃사람들과 마 찬가지였다. 또, 아무도 그들을 찾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도 그들이 도망간 게 아 니라 어떤 이유로건 고아에 '남겨진'것이었다. 그것도 화란 상인의 손으로. 어떻게 남겨졌을까? 상인이 그들에게 해를 끼쳤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그 들은 왜인들과는 달리 무슨 까닭이 있기 전에는 해를 끼치지 않았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귀중히 여겼고 분명히 조선인들은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종이었다. '남긴' 것은 '버린' 게 아니다. 그럼 어떻게 남겼을까? 고아를 떠나는 배 안에는 인도에서 사들인 물건이 가득했다. 나가사키에서 실 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왜인들에게는 총을 팔러 갔지 그닥 사올 것이 없었다. 사는 것은 다른 곳에서 할 예정이었다. 처음부터. 조선인이 둘 사라진 것은 물건을 많이 산 곳이다. 그는 조선인들이 팔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아무 저항 없이 열병에 몸을 내맡겼다. 돈을 주고 자기들을 샀으니 어디에서 되팔건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 었다. 그에게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었다. 어찌하여 그에게 남은 마지막 사람을 앗아가는가? 배안에 있는 것들은 사람도 아니었다. 부, 모, 형, 제.... 먼저 간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도 특별히 더 보태지는 고통이 아니었다. 심지어 아들아이조차도. 아들은 헛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나타 났다. 아들은 수없이 다시 베어졌다. 황톳길에 비실비실 쓰러진 아들의 몸 위에 번득이던 것은 햇빛이기도 했고 칼빛이기도 했다. 혼수 상태에 빠진 그를 두고 뱃사람들 사이에서는 야릇한 소문이 돌았다. 그 가 고아에서 악령에 씌었다고. 악령도 열병도 그를 삼키지 못하고 배앝아내자 그는 더 이상 조선인 동료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 - 산 사람이건 죽은 사람이건 -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대로 가슴에 묻어 다져야 할 일. 무덤을 다지듯이. 8 아무것도 손에 든 게 없어서 소년의 팔은 맥없이 늘어졌다. 게다가 몇 달 만 에 나타난 형이 길가 술집 앞에 흠씬 취한 모습으로 그에게 손짓했다. "잘 있었니, 꼬마야?" 그 대답을 대신하여 동생은 재빨리 말했다. 집에 가는 길이라고. 아버지가 곧 죽을 것 같다고. "아버지는 이미 옛날에 죽은 사람이야." 형은 아우의 누더기를 지긋지긋한 눈치로 바라보았고 아우는 형의 손에 들려 있는 싸구려 술병에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사람의 뱃속에서마저 익어야 하는 술 냄새..... "언제 왔어?" "멀리 갔었지. 넌 들어도 몰라." 형제는 계속 다른 말을 했다. "집에 가지 않겠어?" "며칠 있으면 또 간다. 그러지 않아도 너를 한 번 볼 생각이었지." 그는 동생의 머리통을 쓰다듬기까지 했다. 그 자상한 손길에 내맡기고 싶으리 만치 서러운 편안함도 있었고 달아나고 싶으리만치 불쾌감도 치밀었다. 그는 머 리를 흔들어서 형의 손을 털어내었다. 조금쯤 미안해서 머뭇거리는데 형은 노여 워하는 대신에 키들키들 웃었다. "그렇구나. 너도 다 컸는데 잊어버리고 있었다. 꼬마야, 아니, 아저씨."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건만 그는 음성까지 낮추었다. "사내가 나이 먹으면 식구들의 살이 징그러워지지. 그렇지 않니?" 무슨 소리인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여 동생은 냉정하게 말했다. "집에 가야겠어." "앉아라." 형은 동생보다 더 쌀쌀맞게 말했다. 전혀 취한 기색도 아니었다. "앉아. 아버지는 기다릴 거야, 너 가기까지는. 그 정도는 나도 아버지를 잘 안 다." 동생은 잠시 더 버티었다. "모르겠니? 내가 너보다 몇 해만큼 아버지를 잘 아는지?" 그건 사실이었다. 형이 집을 떠난 것은 열두 살보다 몇 해나 더 지나서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보지 않은 몇 해 덕분에 더 아버지를 잘 안다는 것도?" "....." "보지 않아도 언제나 알 수 있다. 지금 모습까지도, 틀림없이." 동생은 그제야 앉았다. 형은 껄껄거렸다. "꼬레..... 꼬레 형제를 위해서...." 그는 술병을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시더니 아우에게 내밀었다. 제 입술에 묻은 술방울은 혀로 핥았다. 아우가 기겁을 해서 몸을 뒤로 물렸다. "제 밥벌이하는 놈은 다 한몫 사내야. 그런데, 너....." 그닥 강권하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대신 미간을 모으더니 심각하게 묻는 꼴 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꼬레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니?" 어디 있는가고? 여기에 둘씩이나 있지 않은가. 집에도 있고. 어이가 없어서 그 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꼬레는 세상의 끝에 있다더라." 형은 취했거나 돌았거나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두 가지가 겹쳤는지도 몰랐다. 제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찾아 헤맨다는 바보는 옛날 얘기에서도 없었다. 너는 어디 있니? 나는 여기 있다. 아무리 팔짝팔짝 뛰어도 대답은 한 가지, 나는 여기. 배를 타고 나가더라도 대 답은 같은 터였다. 나는 여기 나는 저기 있다고 말하는 건 술에 취하거나 돌지 않으면 할 말이 못 되었다. 더더군다나 세상의 끝에 있다니..... 그는 술병을 힐끗 보았다. 형이 자기를 다 자란 사내 취급을 해준 것에 용기를 얻어서 그는 미친 척하고 물어보았다. "형은 지금 어디 있는 거야?" 그는 다음 순간 안심했다. 크게 웃기까지 했다. 형의 대답인 즉슨, "여기." 무심코 대답했다가 아우가 어설프나마 사내 같은 웃음을 터트리자 형도 실소 했다. 십 년 연하의 동생에게 당하고도 즐거운 눈치였다. "그래. 꼬레가 꼬레에게 묻는다. 꼬레는 어디 있다고 생각하니?" 아우는 교활했다. "꼬레가 가는 곳에." 나무랄 데 없는 대답에 형은 더욱 관대하게 기지개를 켰다. 아우가 방심한 것 이 실수였다. 자기의 대답에 적이 만족하여 마음을 놓고 있을 때에 형은 고양이 처럼 사납게 팔을 거두어들이더니 말했다. "그래, 꼬레야, 너는 그걸로 족하다. 더 이상 알려고 들지 말아라." 형의 횡설수설을 피하여 일어날 짬을 찾았으나 무엇인가가 그를 잡아당기고 놓아주지 않았다. "세상을 보면 길을 잃는다. 너는 여기 살아라. 아버지처럼 땅을 파며." 아우는 불안해졌다. 저 역시 몇 해만 지나면 형처럼 배를 타고 나가려니, 막연 하나마 형이 집을 떠난 나이를 손꼽고 있던터였다. "왕을 보고 싶니? 번쩍이는 높은 사람들을 보고 싶니?" 그런 것도 있었다. "왕도 귀족도 모두 색다른 하인을 좋아하지. 모자 장식 새털처럼 자랑하고 싶 은 거야. 너 아니? 아라비아 노예나 인도 노예가 왕처럼 치장하고 있는 것을?" 그런 것도 멋있으리라고 여기던 아우였다. "늙은 노예를 번쩍거리게 닦아서 자랑하는 왕이란 없지 그럼, 늙은 노예들은 어떻게 될까?" 동생의 눈에 스며드는 의혹을 보자 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세상에서 본 것 을 아우에게 모두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키들거렸다. "아라비아나 인도의 왕은 아마 백인 노예를 장식해서 뽐내고 좋아할 게다. 우 습지? 동생은 조바심이 나서 일어났다. 이제 형이 무슨 알을 하건 귀담아듣지 않을 셈이었다. "그래, 가거라. 꼬레는 세상의 끝에 있다. 꼬레를 보러 가거라. 땅끝으로." 자기 집터를 누구나 땅끝이라고 부르고 있음에 형의 말은 아귀가 딱 맞았다. 그러나 형은 무엇인가 자기에게 숨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터덜터덜 집으로 가면 서 죽어가는 아버지보다 정신없는 형이 더 뒤꼭지를 잡아당기듯 마음이 쓰였다. 땅끝이 싫어서 반대편으로 옮아앉았다가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결국은 아주 떠 나버릴 형. 과연 그가 말한 세상의 끝이 땅끝인가? 그리고 왜 아라비아나 인도 의 노예 타령이 나왔을까? 그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버지가 먼 곳에서 온 사 람이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아라비아나 인도까지 거쳐서 왔다고 다른 사 람들이 말하던 것을 기억해냈다. 아버지가 아직 기운이 있어서 대답할 수 있기 만 바랬다. 그는 서둘렀다. 9 석양볕에 온통 내맡긴 그의 몸에서도 땀도 힘겹게 났다. 다시 집 앞까지 온 아내가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가 마시도록 도와주고 나서 남은 물은 자기가 마 셨다. 그리고 곁에 앉았다. "처음 만났을 때하고 꼭 같군요." "...." "다른 건, 그때에는 당신이 받아서 마셨지요." 아내는 푸스스 웃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것은 꼭 같고."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땅끝까지 헤매다가 겨우 한 자락 앉을 곳을 찾은게 여 기였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척박한 땅을 아무도 탐내지 않는 흙투성이 여자가 기를 쓰며 갈고 있었다. 그때 여자가 무엇을 물었더라.... 그래, 물을 주고 나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고 물었다. 그는 이제야 대답했다. "아무도 나를 탐내지 않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소." 세상에! 아내는 놀랐다. 여자들의 경우라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아는 터였 다. 남자들은 자유로운 게 아니었던가? 욕심 하나만 버리면, 아니, 굶주림을 두 려워하지만 않으면. 조용한 꼬레의 사내를 하인으로 탐내는 사람은 끝내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색다른 풍모가 지나치게 동떨어졌던가. 색색깔로 고루 맞추어서 하인들을 지니 고 싶어하는 왕들조차 그에게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표정이 마음에 들 지 않았는지도. 피렌체까지 와서야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하나도 나타났다. 화란인과 비슷한 고장에서 온 청년은, 이방인 하인을 구색 맞추어 장식하는 부호가 아니 라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꼬레를 그리고 싶어했다. 아마 그의 표정이 마 음에 든 눈치였다. 화란인도 신부도 기꺼이 응낙했다. 그는 시키는 대로 서 있었다. 묵묵히 서 있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화가가 꼬 레를 그리는 동안에 그는 화가를 건네보았다. 젊은 화가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 그림을 어쩌자는 것인지 도대체 왜 흥미를 느끼는 건지 일체 궁금해하지 않은 채. "참 그리기 힘든 얼굴이오." 화가는 수염을 꼬으며 화란인에게 말했다. "몹시 사연이 많은 사람이겠지요?" "그렇지요, 물론." 상인이 달리 할 일도 없었기에 꼬레의 사연을 심심파적으로 늘어놓으려고 하 자 화가는 말렸다. "아니, 그만두시오. 그것을 찾아내는 게 내 일 같소." 아무려나.... 상인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상인이 이해하기 힘든 종류의 사람이 있다면 바로 화가였다. 왕이나 부호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성당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성당의 그 리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상인들이 목숨을 걸고 바다에 나가 돈을 버는 것보다 나은 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농부나 하인, 술집의 주정뱅이들을 그리는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누가 그 돈을 치르는가? 오로지 호기심이나 신기함 때문에 자기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그림을 더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갔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림을, 누구도 돈을 지 불하지 않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니 그건 상당히 고약한 운명이었다. "그에게 그렇게 관심이 있다면 데리고 가도 좋소." 상인은 급히 덧붙였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그를 해방시켰으니까 돈을 치를 필요는 없소이다." 화가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림이 필요하지 저 사람이 필요한 건 아니오." "신부님 같은 말을 하시는구려. 사람의 영혼을 구하지 육신에는 관심이 없는 분처럼...." 화가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 그는 영혼을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그 린 귀부인들은 모두 똑같은 얼굴이었고 왕들을 또 그들대로 똑같았다. 그들이 돈을 치르고 요구하는 그림은 육신의 그림이었으므로 그리고 그들의 육신은 모 두 똑같았으므로. "그래, 그는 어떤 영혼을 가지고 있소?" "우리가 모르는 영혼이오." 상인이 침묵할 차례였다. 그제야 좀 납득이 갔다. 왜 아무도 그를 하인으로 원 하지 않았던가를. 그를 해방시킨 것은 사실이었으되 누구건 관대한 주인이 그를 원하면 대가 없이 물려주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낯선 세계에 떨어진 이방인은 거리에서 해방되는 것보다 보호자를 구하여 해방되어야 했다. 누가 되건 꼬레는 주인에게 충성할 사람인데 왜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았을까? 상인은 혼자 끄덕 였다. 그리고 좀 난감해지기도 했다. 그는 곧 피렌체를 떠날 예정이었다. 꼬레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문득 화가가 상인에게 물었다. "그가 우리말을 알아듣소?" "잘 모를 거요. 더구나 우리끼리 얘기하는 건 전혀...." 화가는 그러나 꼬레가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표정에 변 화라고는 일체 없는데, 애당초 표정이 없는 얼굴인데, 고개를 다시 들어서 볼 때 마다 먼저 그은 획이 잘못 나갔다고 느껴지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그림이 끝나자 상인은 그림과 모델을 번갈아 보았다. 옷차림 외에는 그닥 닮은 점이 없다는 듯한 눈치였다. "이게 그의 영혼을 그린 것이구려." 화가는 조금 불만스럽게 대답했다. "남의 영혼을 그리려 들면, 결국 내 영혼밖에 못 그리는 거요." 지극히 외교적인 대답이었다. 그 화가가 또한 외교관이기도 하다는 것을 염두 에 두고 상인은 절도 있는 미소를 지었다. 화가가 그린 그의 초상화는 퍽이나 생각이 많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아마 그 당시에 화가 자신에게 여러 갈래 복잡한 생각이 많았던 듯. 꼬레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 버렸다. 기억할 수도 없었던 것이, 난감하게 해방되어 땅끝까지 오게 된 경로조차 아물아물한 처지였다. 이제 아내가 간간이 이야기하는 것을 알아듣기도 힘에 부쳤다. 아내는 지나간 이야기를 불쑥 한 가지씩 생각나면 웅얼거렸다. 사람이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은 이야기. 그 안에 듣지 않는 사연이 실상 하나나 있던가. 겨우 그의 쇠약한 몸이 햇살에서 해방되었다. 땅 끝에 가면 태양이 바닷물 속 으로 잠기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집 앞에서 보면 언제나 땅끝 너머로 사라지는 게 태양이었다.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으면서 태양이 보이지 않는 짧은 시간이 하루 중 제일 편안한 때였다. 구릉 뒤에서 열두 살짜리 아들이 나타났다. "오네요." 꼬레의 아내는 일어섰다. 꼬레도 보았다. 그 길에는 아직 햇빛이 비치고 있었 다. 아들의 몸은 무척 조그맣게 보였다. 막상 걷자면 좀 걸리는 거리였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는 기다려야겠네요." 꼬레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들은 집 쪽으로 걸어왔다. 타달타달, 꾸준히 그 자 그마한 몸은 세상의 끝까지라도 걸어갈 수 있을 듯 보였다. 그리고 조금씩 크게 다가왔다. 아내는 그예 그를 맞으러 나섰다. 노인이 평생을 두고 기다리던 것이 오는 중이었다. 전생과 이승의 모든 그림 이 다 스러지자 마지막으로 남는 그림. 표정 없는 노인의 얼굴이 심하게 실룩거 렸다. 살아 있는 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것, 거의 미소 같은 것이 그의 얼굴에 실 렸다. 편안하게, 지극히 편안하게 죽는다는 것이 이토록 평화로운 일이라니! <그림> 1983년 가을, 런던의 소더미 경매장에 개인 소장품으로 오래 묻혀 있던 루벤 스의 그림이 한 장 나왔다. 제목은 [한복을 입은 남자]였다. 런던 주재 한국 기자들은 부랴부랴 센트.제임스 궁전 가까이에 있는 경매장으 로 가면서 내심 투덜거렸다. 교통 체증이 심했기 때문에 앙앙불락이기도 했으나 그 해 가을 두 가지나 되는 대형 참사로 세계의 뉴스를 코리아가 장식하는 바람 에 '한복'정도에는 둔감해져서 그게 무어 큰 기사 거리가 되랴 지레 짐작하고 있 었다. 보나마나 루벤스의 무식 소치로 비스름한 무슨 옷을 어떤 사내가 피자마 처럼 걸치고 있는 것이려니..... 그림을 보자 기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건 [한복을 입은 남자]가 아니라 [한 국인]이었다. 취재 기사를 사진과 함께 본사로 전송하고도 그들은 어리둥절했다. 16세기에 태어나서 17세기에 죽은 루벤스가 어디에서 어떻게 만난 사람일까? 어디에나 집요한 기자들이 한둘은 있게 마련이었다. 외신 기자들은 고작 그림 의 전소유자가 누구라든가 누구에게 얼마에 낙찰되었는가를 취재하고 그 미스터 리를 현굴하는 숱한 다른 미스터리와 함께 잊어버리기 시작할 때에 본사의 다른 기자들은 미스터리를 뒤쫓았다.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을 증명해 내야 직성이 풀리는 기자들. 백과사전에 '기자'를 설명하는 구절에 적합할 만한 기자들. 루벤스의 생몰 연대 중 전반부가 임진왜란과 일치한 게 단서였다. 그리고 역 사에 밝은 사람들은 병자호란 때 포로들이 나가사키에서 팔렸다는 것까지 알았 다. 그 당시에 일본에서는 서양상인에게서 총을 샀다는 것도. 그것까지는 모두 심증이었다. 그 다음, 소서행장을 따라서 한국 땅을 밟았던 신부의 기록이 들춰졌다. 그는 같은 배로 화란 상인과 함께 돌아갔고 배 안의 조선인 세 명에 대한 기록까지 빼지 않았다. 둘은 고아에 내렸고 안또니오.꼬레는 끝까지 갔다. 피렌체에서였다. 루벤스와 맞닥뜨린 것은. 증명해 낸 사실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기사는 국내 신문 에도 났지만 교포들이 많이 사는 북미 내륙의 영어판 한국 신문에도 났다. 얼마 후, 북미 대륙에 살고 있는 어느 이탈리아 계 이민이 신문사로 편지를 보냈다. 그의 이름은 '꼬레'였다. 예이 지은이 이혜숙 동사무소 잡역부 김씨는 비닐 포대에 담긴 10.3Kg의 양곡이 짐받이에 달랑 비 끄러매진 자전거를 끌고 언덕길 밑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좁고 지저분한 골목 길이 한가운데로 뱀처럼 구불구불 기어올라간,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산동네를 올려다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가파르고 꼬불거리는 골목길 맨 꼭대기까지 쌀 실은 자전거를 끌고 올라갈 생각을 하니 머리부터 장딴지까지 당기는 것이었 다. 점심때가 채 되기 전이라 자전거 뒤를 밀어줄 만한 아이들은 죄 학교에 가 있고, 길에는 빙과 부스러기를 빨아먹다 구경 삼아 바라보고 섰는 코흘리개 몇 밖에 없었다. "저리 비켜라. 다친다." 김씨는, 어느새 옆에 붙어 손으로 자전거 바퀴를 돌려보는 꼬마를 밀어내고 한숨을 한 번 쉰 다음 자전거를 밀며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제기랄, 오뉴월 삼복도 아닌데 날씨는 왜 이리 더워? 하느님도 노망인가? 양력으로도 유월 초순이니 더워질 만도 하건만 심사가 사나우니 아무데나 심 통이 부러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김씨가 제말은 일이 하기 싫어 꾀를 피우거 나, 하긴 하면서도 불평에 가득 차 남 보기 민망하게 제 신세를 들볶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구청에서 지정해 준 생계 보호 대상자들에게 매달 나오는 구 호 양곡은 본인이나 주변 사람이 동회까지 와서 타가기도 하였지만, 지금 찾아 가는 오씨 할머니처럼 본인이 들고 갈 수가 없거나 달리 타다 줄 사람도 없을 때에는 천상 동사무소에서 직접 전달해야 하는데, 그 일을 자신이 하는 데 대해 서는 김씨도 아무 불만이 없었다. 오씨 할머니 사는 산동네보다 오히려 더 가풀 막지고 높은 곳까지도 겨울이면 빙판길에 자빠져가며 군소리 한마디 없이 가져 다주곤 하였다. 김씨 자신도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입장에서, 남의 부모한테 잘 하는 것이 곧 내 부모에게도 잘하는 것이란 인생관을 일찌감치 터득한 터였으니 까. 그런데 유독 이 오씨 할머니를 찾아갈 때만 심사를 편치 않은 이유는 뭘까. 오씨 할머니는 거택 보호자였다. 나이가 육십오 세가 넘었고, 호적상 자식이 없고 생활 능력도 없음이 인정되면 거택 보호대상자로 지정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런 노인들에게는 국가에서 매달 한 말 가웃의 쌀과 두어 되 가량의 보리쌀, 그리고 삼만원쯤 되는 생계 보조비를 지급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씨 할머니는 호적상으로만 자식이 없을 뿐 실제로는 아들과 함께 살 고 있으리란 것이 동 담당의 짐작이었다. 원래 누군가로부터 생계 보호자 지정 신청이 들어오면 동사무소에서는 서류상 으로만 심사를 하는 게 아니라, 직접 본인을 찾아가서 실제와 서류상의 사실이 일치하는가 여부를 조사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맨 처음 오씨 할머니를 찾아 가보고 온 동 담당 말이, 그 할머니에 대해 거택 보호 지정 신청을 한, 자칭 먼 저 동네에 같이 살았던 이웃 사람이라는 박복만이라는 청년의 생김새가 그 할머 니와 너무도 비슷해 보이더란 거였다. - 생김새뿐 아니라 말하는 투에다 학처럼 모가지 길쭉한 것까지 닮았더라구. 그렇게 서두를 꺼내놓자 옆자리 사람들도 한두 마디씩 거들었다. - 그럼 혹시 모자간 아냐? 생모가 아들 호적에 안 오르는 수도 있지, 왜. 내연 관계에서 낳은 아이는 보통 호적상 본 부인이 낳은 걸로 출생 신고를 하는 게 통례였잖아. 요즘은 간 큰 여자들이 가끔 결혼도 안 하고 애를 낳아서는 제 앞 으로 입적을 시키기도 한다지만. - 글세, 나도 대뜸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그래서 할머니한테 이리저리 유도 심문을 해봤지만 이 노인네가 미리 교육을 단단히 받은 모양이라, 박복만이가 먼저 살던 동네에서 한집에 세 들어 있던 사람이라고 아주 딱 잡아떼는 거야. - 집주인한테도 확인을 해보지 그랬어? 한 지붕 밑에서 같이 사는 사람은 눈 치가 뻔할 텐데. - 안집 아줌마까지도 그 할머니가 거기서 혼자 살고 있다고 하더라니까. - 어이, 그럼 그게 사실인가 보지, 뭐. 세상엔 서로 닮은 사람들도 있기 마련 이니까. - 아니래두 그러네. 멀쩡한 남이라면 왜 박복만이 티셔츠가 그 노인네 방 앞 빨랫줄에 걸려 있어? 박복만이가 나 만날 때 입고 있던 옷인데 색깔하고 무늬가 하도 유치해서 저절로 기억이 되었던 거야. 그래 내가 옳다 되었다 하고 박복만 이 티셔츠가 왜 할먼네 방 앞에 걸려 있느냐고 따졌지. - 그랬더니? - 그럼 뭐 얘긴 끝난거 아냐? - 말도 마. 그러니까 글세 저만치서 딴전 부리는 척하고 있던 주인집 아줌마 가 쭈르르 달려오더니 그게 자기 남편 옷이라는 거야. 그 아줌마는 적어도 나이 가 쉰은 훨씬 넘었겠던데 그래 육십이 가까운 영감태기가 그런 알록달록한 티셔 츠를 입겠어? 서커스 광대도 아니고 말야. - 그 아줌마 차라리 아들 옷이라고나 둘러댈 거지. - 그럴 수야 있나. 소문난 딸부잣집인데. 떠들썩한 웃음 끝에 누군가가 말했었다. - 그것도 다 어려운 사람끼리 상부 상조하는 정신에서 서로 감싸주잔 수작 아 냐. 웬만하면 눈감아주지 뭘 그래. 당신 주머니에서 그 노인네 생계 보조비가 나 가는 것도 아니고 한데. - 글세, 그런 생각이 틀렸다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 제 주머니 돈 한푼은 아끼 면서 공꺼라면 그저 못 먹는 놈이 병신이라는 식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나라에 서 나온다고 그게 어디 공꺼야? 다 내 주머니에서 나간 세금이지. 그러나 오씨 할머니와 박복만이는 호적뿐 아니라 주민등록까지 완전히 따로 되어 있는 서류상 완벽한 남인데다가 주변 사람들까지 그처럼 그 둘이 모자간이 아님을 보장한 셈이어서 결국 거택 보호자로 지정받았다. 그까짓 주민등록이야 얼마든지 따로 할 수 있는 건데, 뭘. 하지만 김씨가 화가 나는 것은, 받아먹을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다리힘 빼9가 며 매달 곡식 자루를 날라다 줘야 한다는 이유때문은 아니었다. 만약에 김씨 자 신이 오씨 할머니네 안집 아줌마였더라도 그 아줌마와 똑같이 했을 듯싶게, 가 난한 사람들끼리 그 정도 일에 서로 눈을 감아준다는 데엔 이의가 없었다. 설사 자기가 낸 세금이 오씨 할머니 같은 사람들의 생계 보조비로 나가고 있다고 하 더라도, 김씨 자신이 그 할머니보다 형편이 조금이라도 나은 게 사실인 이상 불 우 이웃 도왔다고 생각하면 그만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런 일을 결정짓고 처 리하는 데에 서류가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 있었다. 따지고 보면 얼마든 지 조작이 가능한 한낱 종이 조각이 아닌가. 사람들이 지나치게 도장 찍힌 종이 만을 맹신하기 때문에 세상에는 사기꾼이 날뛰고, 정작 국가의 생계보호를 받아 야 할 사람들이 외면당하는 일이 생겨나는 것이다. 김씨가 살고 있는 무허가 철 거민촌에 비닐 움막을 짓고 사는 지씨 할머니의 경우가 그랬다. 지씨 할머니는 호적상으로는 아들 둘에 딸까지 하나 있었지만 실제로는 돌봐 줄 사람 하나 없이 늙은 몸으로 남의 집 일이나 해주면서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고 있었다. 근래는 몸에 병까지 들어 누가 일을 시키지도 않으니 가난한 이웃 의 도움으로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는 형편이었다. 그 할머니는 오씨 할머니 와 정반대로 자기 소생은 없이 남편이 밖에서 낳아 들인 자식들을 입적한 경우 였다. 오직 이혼당하는 것만이 무서워 남편이 두집 살림하는 것을 묵인했는데, 남편이 죽고 나자 여자와 그 여자의 소생들은 전혀 지씨 할머니를 돌보지 않았 을 뿐 아니라 돈 한푼 주지 않고 거리로 내몰았다. 할머니가 이혼을 해주지 않 아 저희들 생모가 호적에 오르지 못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그 동네 동사무소 에서도 사정을 뻔히 알지만 호적상 자식이 셋씩이나 있고, 그 자식들이 모두 부 양 능력이 있으니 어째 볼 도리가 없다는 거였다. 김씨는 자기가 낸 세금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쓰인다면 그 대상이 오씨 할 머니보다 지씨 할머니가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씨 할머니는 비록 좁고 우중충한 산동네일 망정 어엿이 연탄 때는 방에서 아들의 부양을 받고 있지 않 은가. 그렇게 생각하면 지씨 할머니에게 갈 것을 오씨 할머니가 가로채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에 그만 오씨 할머니가 미워지기까지 하는 4것이었다. 김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드디어 자전거를 오씨 할머니가 세들어 사는 집 대 문 앞까지 끌어올렸다. 시멘트 블록으로 얼기설기 엮어 여러 가구가 세 들어 사 는 집. 다 삭은 철대문은 돌쩌귀가 빠져 달아나기라도 했는지 기우뚱 씰그러진 채 열어젖혀져 있었다. 마치 좀도둑더러, 어디 집어갈 게 있으면 맘대로 집어가 보라고 약이라도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김씨는 텅빈 듯 인적이 없는 댓 발자 국 거리도 안 되는 마당을 가로질러 제일 구석진 곳에 있는 오씨 할머니 방 앞 으로 쌀자루를 메고 갔다. 땟국 흐르는 판자문 앞 시멘트 바닥에 쌀자루를 내려 놓고 판자문을 밀었다. "이 집에 아무도 없나?" 혼잣소리를 흘리며 어둠침침한 부엌 바닥을 내려다본 김씨는 대번 욱 하는 성 질이 치받쳤다. 방문 바로 앞 부엌 바닥에, 펼쳐진 신문지 한 장 크기로 누런 포 대 종이를 깔아놓았는데 그 위에 허옇게 널려 있는 것은 분명 보리쌀이 아닌가. 먹고 남은 보리쌀을 벌레 나지 말라고 펴 널어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김씨의 눈앞에 하루 두 끼 죽이나마 끓여 먹는지 마는지 하면서 병든 몸으로 늘어져 있 는 지씨 할머니의 몰골이 어른거리는 순간, 입에서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런 제에기, 쌀밥만 먹고 살 팔자라 보리쌀은 숫제 안 먹는다고 내놓은 건 가? 정작 구호 양곡 타 먹어야 할 사람은 보리쌀도 차례가 안 가 굶어늘어졌고 호적 가지고 사기 친 사람은 살판난 세상일세." 혼잣소리로 궁시렁거리면서 보리쌀이 널린 바로 옆에 양곡 자루를 툭 떨구듯 들여 놓았다. 그리고는 문을 닫고 돌아서려던 참인데 갑자기 아무도 없는 듯싶 던 방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미닫이로 된 방문이 벼락치듯 열렸다. 이어서 마치 깨진 꽹과리를 두들겨대는 것만치나 시끄럽고 째지는 목소리가 그 안에서 쏟아져나왔다. "그래, 내가 내 속으로 낳은 아들을 아들 아니라고 했다. 왜. 에미면 제대로 에 미 대접을 받았어야지, 호적에도 못 올라간 에미가 무슨 에미여?" 김씨는 처음엔 놀랍고 다음 순간에 기가 찼다. 노인네의 도가 넘은 뻔뻔스러 움에 화가 치민 건 너무나 당연했다. 불현듯 지씨 할머니 생각이 났다. 그저 남 의 첩질이나 하는 덧들은 모조리 독종 아니면 낯짝이 양푼 밑바닥이라니까. "이 할머니 말하는 것 좀 보게. 아니 제 처신이 떳떳했으면 왜 자식 호적에 못 올라? 뒷구멍으로 호박씨나 까면서 산 걸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그게 무슨 자랑이 라구. 한마디로 남의 남편...." 그러나 김씨는 말끝도 채 못 맺고 억 소리를 지르며 뒤로 한 발 물러서야 했 다. 할머니가 풀어해쳐진 하얀 머리털을 날리며 방구석에 놓였던 빗자루를 거꾸 로 들고 방 밖으로 뛰쳐나왔던 것이다. "그게 어디 내 탓이냐? 삼팔선 탓이지. 잠깐 피했다 오겠다고 내려갔다가 삼 팔선이 막혀 못 올라온 신랑 찾아 육이오 때 혼자 내려와 천신만고 십 년 만에 찾고 보니 남의 서방이더라." 할머니가 눈을 하얗게 흡뜨고 빗자루로 삿대질을 해대는 바람에 김씨는 어, 이 소리를 연발하며 마당 가운데로 밀려나왔다. 맨발로 마당까지 따라나온 할머 니가 갑자기 빗자루를 내던지며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지지리 복도 없는 년. 자식인지 애물 단진지 낳아서는 애비라고 호적 에만 덜렁 올려놓고 죽어서 혼자 몸에 손발이 터지도록 길러냈더니이...." 이이 소리를 한없이 길게 빼던 할머니가 드디어 자신의 앙가슴과 시멘트 바닥 을 번갈아치며 대성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마구 땅에 뒹굴었다. 숨까 지 꺽꺽 막히는 것이 금방 무슨 큰일을 치르게 될 것만 같았다. 김씨가 어쩔 줄 을 몰라 진땀을 쭉 흘린 채 허 참 소리만 연발하며 우리에 갇힌 곰처럼 할머니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데, 솔기 잇는 부업거리인 수출용 스웨터가 꾹꾹 쟁여진 비닐 자루를 머리에 이고 문안으로 들어서던 안집 아줌마가 기겁을 해서 머리에 인 것을 내던지고 달려들었다. "할머니, 할머니 왜 또 이러세요. 아무리 마음이 아프시더라도 몸은 상하지 않 게 해야죠. 네? 할머니...." 안집 아줌마는 사뭇 울먹이고 있었다. 몸부림치는 할머니를 끌어안고 손을 주 무른다 등을 쓸어준다 한참 부산을 떤 끝에 할머니가 비로소 긴 한숨을 내쉬더 니 잔뜩 쉰 목소리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글세 그눔이 저 죽으려고 환장을 한 거지 뭐겠수. 내가 그렇게 굶어 죽으면 죽었지 치사하게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그깟 쌀 안 타 먹겠다고 했건만 기어이 일을 꾸미더니.... 에구 에구 날 정말 자식 하나 없는 늙은일 만들구우.... 당최 쌀 이구 보리구 뭐가 목구멍에 넘어가야 먹지이.... 이제 다 소용없으니 도로 가져 가. 도로 가져가라고요...." 주인 여자가 갑자기 도끼눈을 뜨고 김씨를 노려보았다. "아저씨가 대체 뭐라고 했길래 할머니가 이래요?" "아니 내가 뭘, 나는 그냥...." 김씨는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쳐 대문 밖으로 물러 나왔다. 얼핏 생 각에 자신이 별로 잘못한 일은 없는 것 같은데 할머니 하는 꼴을 보니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기도 해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 대문 안팎에 옹기종기 둘러서 있던 동네 여자들도 슬며시 비난의 눈길을 보내는 듯하여 김씨 는 얼굴도 못 들고 비스듬히 세워 둔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다. 자전거에 올라앉 아 페달을 밟으려다 말고 아무래도 궁금증을 이길 수 없어 누구에게랄 것 없이 한마디 물었다. "혹시 저 할머니 아들이 무슨 일이라도 당했나요?" 모두들 한숨을 쉬거나 혀를 차는 속에서 나이 지긋한 부인네가 나지막이 대꾸 했다. "며칠 전에 공사판 비계를 올라가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었다우. 착실한 젊은이였는데, 에그 그저 가난이 웬수지. 나이 서른이 넘도록 장가도 못 가고 공 사판이나 떠돌면서 홀어머니 모시느라 애쓰더니...." 부인네가 손등으로 눈을 가렸고 누군가 콧물을 훌쩍 들이마셨다. 김씨는 황황 히 그 자리를 떴다. 그 뒷덜미에 동네 아낙네들의 뒷공론이 쏟아졌다. - 얼마나 정이 깊었으면 젊은 여자가 혼자 삼팔선을 넘었을까? - 결혼한 지 석 달도 못 돼서 헤어졌대요. 처음엔 며칠 피해있다가 올 줄만 알았지 신랑이 삼팔선을 다신 못 넘어올 줄이야 생각인들 했겠어? 그땐 그렇게 생이별한 사람들도 많았다면서? - 그러니 십 년 동안 수절하면서 찾아 헤맨 남편을 다시 만났을 때, 아무리 남의 남편이 되어 있기로 피차 어떻게 그냥 헤어질 수가 있었겠어. 어쩌다 보니 애까지 낳게 되었겠지. - 그런데 죽을 사람이 저 죽을 예감이라도 있었을까? 여태 가만 있다가 바로 석 달 전엔가 동사무소에다 자기 어머닐 거택 보호자 신청을 했다잖아. - 그러게나 말이야. 자기 죽은 다음에 자기 어머니 목구멍에 풀칠할 마련을 해놓은 셈이 되었으니.... 빈 자전거로 내려가는 길이건만 김씨는 페달을 밟은 두 다리가 납덩어리도 단 것처럼 무거웠다. 이제 저 할머니는 서류상으로나 실제 상황으로나 나무랄 데 없는 거택 보호 대상자인가. 그러다가 죄스러운 생각에 얼른 머리를 흔드는 김씨의 눈앞에 문득 조그만 보퉁이 하나를 들고 피난민 틈에 섞여 삼팔선을 넘은 애젊은 새댁의 모 습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진 순가, 김씨의 몸이 갑자기 자전거와 함께 공중으로 솟았다가 중심을 못 잡고 나가떨어졌다. 잠시 후 김씨는 몸 여기 저기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모질게 갈아붙여 찢어진 천 사이로 드러난 피흐르는 정강이를 문지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노라니 바로 눈앞 길 위에 뾰족 솟아오른 돌멩이가 보인다. 김씨는 눈앞의 돌멩이를 욕한다 는 게 깨닫고 보니 엉뚱한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의 삼팔선. 훈풍 지은이 조양희 1 주남숙이 서울을 떠나 다소리에 도착한 것은 정월 대보름을 하루 앞둔 날이 다. 신명나게 불어대는 날라리와 징소리가 들린다. 승객들이 흩어진 정류장은 한 산하나 건너 공터는 부산스럽다. 구경꾼들이 에워싼 곳은 장고에 맞춰 덩더쿵덩 더쿵 춤판을 벌이고 있다. 그 주변으로 늘어앉은 아낙들은 딱 벌린 가랑이 사이 로 산나물들을 차고앉아 입김을 술술 뿜어낸다. "보이소예, 서울 아즈마씨요. 이 산나물 사 갖고 가이소예. 쌉쌉하고예, 구수한 맛은 참말로 몬 잊을 끼라예." 부어오른 손가락으로 시래기 한 줄기를 쑥 뽑아 다듬는 모습은 마치 아낙의 사타구니를 호비작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헤헤, 피부가 우째 그리 고분교." 부럼 파는 아주머니가 손바닥에 비벼 깐 콩을 넙죽한 입 속으로 날름 털어 넣 는다. 남숙이 발걸음을 머뭇거리자 아주머니는 콩깍지를 앞섶에다 털어 버리고 뽀얀 콩을 내민다. "아이고, 곱기도 해라." 말할 때 누우런 금니가 보인다. 부럼을 넣은 누르무레한 봉투를 받아 쥔 남숙은 아주머니에게 농장을 묻는다. 정희의 자세한 설명으로 그곳을 알고 있으나 한 번 더 확답을 듣고 곧장 뻗은 행길을 바라본다. 며칠 전 입춘이 지나간 날씨가 매운 바람 끝에 봄입김이 숨어 있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아침나절에 봄볕을 쬐인 산과 들 그리고 농가들은 남숙에게 낯설지 않은 정경으로 다가온다. 왠지 농장을 생각하면 가슴에 치닫는 희망이 솟구치는 것이다. 그녀가 꾀하는 일들이 족히 이루어질 예감으로 아주머니가 일러준 그 길 쪽을 주시한다. 정희는 애영의 가정교사로 집안에 맞아들인 여대생이다. 애영은 무남독녀라는 너울 탓인지 남숙의 눈에는 아직 철없는 딸로만 여겨진다. 중학 입시를 낙방하 고 보니 그녀는 애영에 대한 애처로움만이 가슴에 고여드는 것이다. 자기 탓이 라고 상심하는 남숙에게 묘안을 제시해 준 것은 정희였다. 다소리가 고향인 정 희는 이 고장의 중학교 교장이 인척이라 했다. 시골 학교라 한자리 정도 있을지 모르니 애영을 잠시 다소리 중학교에 입학을 시켰다가 서울로 전학을 하면 어떻 겠냐고 했다. 타향이지만 정희의 집에 묵게 하여 그녀의 여동생들과 어울리게 된다면 외롭게 자라는 애영에게 그리 나쁠 것이 없다고 남숙을 위로해 주었다. 그 제안이 남숙을 움직이게 한 것은 사실이나 다소리로 오게 된 이유는 또다른 동기가 있다. 구라파에 체류 중인 장성욱의 귀국은 뜻밖이었고, 다소리에 돌아와 있다고 하 는 전화 속의 그의 음성은 우울한 남숙의 가슴을 묘하게 흔들어 놓고 말았다. 남숙은 멀리 성욱의 농장이 보이는 행길에 서서 그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은연 기다린다. 나물 파는 여자들의 입에 발린 찬사를 귀로 흘리며 공터에 모인 사람 들의 눈길을 살핀다. 봉투에서 두 알의 호두를 꺼내 쥔다. 손바닥을 비비면 딱딱 한 껍질이 서로 닿아 달그닥거리는 소리가 난다. 남숙은 자동차가 뜸하게 지나 가는 신작로를 그대로 걷는다. 머얼리 자오록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지 프가 남숙의 어깨에 닿을 듯이 끽, 하고 멈춘다. 그리고 차문이 열린다. "타시죠." 성욱의 굵직한 목소리가 열린 차문을 통하여 새어나온다. 남숙은 텁수룩한 그 의 턱수염을 보자 주춤했으나 그 목소리에 이끌려 운전석 옆자리에 앉는다. 안 은 따뜻하다. 남숙은 설렘과 반가움을 달래며 부럼이 든 봉투를 껴안는다. "이제야 오시는 겁니까?" 성욱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띄우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을 그렇게 말한다. 할 말을 잠시 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남숙에게 대화의 공백을 두지 않고 성욱은 말한다. 그와는 2년의 공백이 있었으나 언제나 만났던 것처럼 느껴진다. 덴마크에서 돌아온 지 한 달 남짓 되었고 부친이 일구워 놓은 농장을 맡고 있다 고 얘기한다. 농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목장이라고 이 부분에서는 말을 강조한 다. 그 동안 선진국에서 연구해 온 목축과 낙농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해 보 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닷새 동안 진통을 계속 겪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송아지를 낳은 젖소를 돌보아 준 수의사를 자택까지 배행하고 돌아오는 길이라 말한다. "애쓰셨군요." 결국 입을 때는 그녀를 보고 잠시 성욱의 눈길이 그곳에 멈춘다. 바람에 발갛 게 상기된 남숙의 코끝을 더듬다가 얼른 시선을 거두고는 어색한 낯으로 턱수염 을 손등으로 슬쩍 문댄다. 걸어 놓은 시동으로 엷은 파동이 그들을 떨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기아를 잡 고 있는 성욱의 손등은 경련을 일으킨 듯하다. N자를 그으며 지프를 서서히 앞 으로 나아가게 하는 성욱을 보며 그의 전공이 목축이나 낙농 쪽보다 연극을 하 는 편이 더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한다. 전에도 이런 상상을 가끔 남숙은 했다. 그는 남성다운 체구에 수려한 얼굴과 유머를 구사하는 말과 동작이 무척 개성적 이어서 마치 관객 앞에 선 배우를 연상케 한다. "뭐가 좀 달라졌나요?" "외모로 봐선 그래요." "그럴 수밖에. 살도 찌고 동물들하고 어울리니 닯아가는 거죠." 거리낌없이 소탈하게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건가, 하고 스스로 반문해 보는 남숙은 그를 본다. 2년 만의 재회를 눈으로 만끽하며 그의 일거일동을 그림을 그리듯 마음의 화폭에다 새긴다. "동물들은 무디고 게을러 보이지만 의외로 예민해요. 거짓을 모르잖습니까. 알 아줘야 할 존재들인데 인간은 모르는 척하는 겁니다.: 이대로 나아가다는 우리 나라 호랑이조차도 수입해야 할 실정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렇네요." 대답을 짧게 해놓고 보니 마음은 엉뚱한 곳에 있는 것 같아 성욱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녀는 갇혀진 듯한 이 작은 차안에서 이대로 달리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없다. "남숙 씬 조금도 변하신 게 없군요. 여전히 세련되고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일 년이 넘었는데도 말입니다." "정확히는 1년 7개월이구요." 그녀는 동그랗게 뜬눈으로 답했다. 2 1968년 파리에서의 일이었다. 센 강변의 마로니에가 누우렇게 변색이 된 가을 의 오후였다. 남숙은 모처럼 상쾌한 기분에 젖어 샹젤리제의 '코코' 카페에서 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손꼽히는 무역 회사의 중역으로 있던 그녀의 남편이 파리의 지사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 그녀가 지망했던 미용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파리의 '라몽드' 미용 학원에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 수업에 열중하고 있 었다. 그날은 여성의 머리 손질부터 피부의 노화방지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필 기 시험을 마치고 앞으로 치르게 될 실기 시험의 일정을 배정받고 돌아오는 길 이었다. 매번 시험 때면 경험하는 일이지만 필기 시험에는 언어의 장벽에 부딪 쳤다. 그러나 실기는 달랐다. 재빠르고 날랜 동양인의 손끝의 감각과 뛰어난 개 인의 창의력을 인정받았다. 그것으로 모자란 부분을 보탠다면 낙제는 면할 것이 었다. 오랜만에 강박감에서 풀려나는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커피의 향기를 즐기 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일거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망과 야심은 미용업을 개업하는 일뿐이었다. 남숙의 그 계획을 묵묵히 밀어주는 남편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었다. '한센' 호텔 사장이 얼마 후 파 리로 오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만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파리를 찾는 한 국의 명사들 가운데 한 번쯤은 이들 부부의 영접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 였다. 그러한 사교는 이곳 파리라는 독특한 조건 때문에 남편의 사업과 매우 깊 은 연관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만을 생각해 보더라도 한센 사장에게 모름 지기 훈훈한 대접을 해야만 할 것이었다. 호텔 지하 1층의 아케이드 쪽으로 난 에스컬레이터 뒤편에 십평 남짓한 공간과 그 옆 민속품 가게를 인수받을 계획이 었다. 그런 다음 바로 그곳을 합하여 '주미셀'이라는 헤어 뷰티 숍을 여는 것이 었다. 그녀는 물론이고 호텔 측에서도 이득이 되는 거래였다. 이미 남편에 의해 구두로 합의를 보았던 일을 정식으로 마무리를 해두는 절호의 기회가 한센 사장 의 이번 파리 방문이었다. 손가방을 열었다. 아침에 남편이 아파트를 나서기 전에 던져준 일간 신문을 꺼내 펼쳤다. 고국의 소식은 물밀 듯이 터지는 대학가의 데모가 유행 감기처럼 전국에 퍼져 일부 대학은 휴강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월남으로 파견되는 맹호 부대와 전쟁터로 지원해 가는 비둘기 부대들을 한 꺼번에 잔뜩 실은 거대한 기선이 부산 부두에서 마악 오색 종이를 터뜨리며 민 심들을 부채질하는 큼지막한 사진이 실려 있었다. 1970년 오사카 국제 무역 박 람회가 열릴 예정이라는 선전이 언뜻 보였다. 항공 산업이 국항에서 민항으로 넘어가자 엑스포 오사카 때문에 앞으로의 민항공의 발전은 눈부실 거라는 내용 이 실렸다. 서울로 가자면 여전히 일본을 거쳐야 하니 그녀는 답답했다. 고국 소 식은 그녀에게 별로 흥미로움을 안겨주지 못했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신문을 펼쳐 뒤적이는 것은 한국에 대한 특별한 관심보다 친모에 맡기고 온 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보려는 무의식의 몸짓인지도 몰랐다. 노상 카페는 붐볐다. 개를 앞세워 거리를 배회하는 여자들이 꽤 눈에 띄었다. 그리고 볕에 굶주린 사람들은 양지를 찾고 있었다. 거리의 어디선가 햇빛이 뚫 리면 그곳엔 다정한 연인의 입김들이 모였다. 여기는 지나다니는 각 사람 저마 다 독특한 개성미를 구경할 수 있으며 이 호기심은 그녀의 직업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노상에 나와서 차를 마실 때는 즐거웠다. 코코는 이 즐거움을 만끽하는 데 안성맞춤의 장소여서 자주 들리는 곳이었다. 또 그녀와 절친한 후배가 코코 카페와 가까운 '라데팡스'에서 살고 있어서 남숙은 학원이 끝나는 대로 그녀를 만나러 이곳에 오곤 했다. 오늘은 필기 시험만 있어서 라데팡스로 곧바로 가기가 다소 이른 것 같아 오 른쪽으로 개선문이 보이는 테이블에 혼자 앉았다. 이 거리의 사람들이 함께 숨 쉬며 지켜온 파리라는 도시를 한없이 음미했다. 건물 주인의 애정 어린 눈길이 한동안 머무르는 곳이나, 혹은 무심코 던지는 시선을 머물게 하는 창가, 계단의 손잡이, 문설주, 그리고 그냥 스쳐버릴 수 없는 천장의 속삭임 등은 아르 누보 양식이라는 것이었다. 이 양식이 돌 위에다 인간의 부드러운 마음을 새겨 조화 를 이루고 있는 편안함 때문인지 파리지엔들은 그토록 애착심을 가지고 긍지를 보이면서 애써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옛것에다 끊임없이 창조하여 또 다른 아름다움을 추구해 내는 힘이 파리를 지 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남숙은 실로 오랜만에 긴장과 갑갑함의 올가미에서 풀려나는 느낌을 받았다. 커피를 가져다주던, 영화배우처럼 핸섬한 신사의 더 필요한 것이 없느냐는 물음 을 거절하고 그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라데팡스로 가 볼 생각이어서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실례지만 그 신문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의 등뒤에서 남자의 한국말이 들렸다. "한국 신문 본 지가 오래 돼 나서요." 소리나는 곳으로 청년이 거기에 서 있었다. 남숙은 그저 고개를 다소 내리며 접었던 신문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돌려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남숙은 이 말을 남겨 놓고 코코를 떠났다. 며칠 전 성욱은 우연하게 이 노상 카페에서 그녀를 먼발치로 보게 되었다. 그 순간 한국 여성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예감은 맞아들었다. 성욱은 적중했다는 일종의 쾌감 때문에 기뻤다. 그녀의 보유스럼한 살결 위에 새겨진 까만 눈썹과 속눈썹의 또렷한 눈망울이 성욱의 눈에 포착되었을 때는 승리감마저 맛보았다. 화장기 없는 깨끗한 그런 얼굴이었다. 그녀의 도톰한 입에서 한국말이 새어나왔다. 한국을 떠나온 지 퍽 오래 되어서일까. 먼 이국 땅에서 같은 나라의 여성을 만났다. 게다가 그녀는 젊 고 아름다운 여자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며칠을 이 시각에 나와 기다리다 비로 소 오늘 그녀를 만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를 만났다는 기쁨으로 성욱은 온몸이 가볍게 들어 올려지는 듯 느껴졌다. 이런 감정으로 남 숙의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런 표정으로 성욱이 밝은 성품을 지녔으며 볕에 그을은 거무스 름한 피부에 연한 곱슬머리의 청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남숙은 제일 먼저 성 욱의 머리를 흘끗 훔쳐보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이런 곱슬머리의 컷은 좀 신경 을 써야 할 것이며 곱슬한 길이를 염두에 두면서 잘라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목덜미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한 부분의 머리 길이가 같지 않 더라도 잘 나타나지 않는 이점도 있다고 쓰여 있는 필기 시험의 문제가 떠올랐 다. 그래서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누르고 있었다. 후배 아파트엘 가면 성욱의 얘 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웃음을 참았다. 성욱은 서울의 S대학 축산과를 나와 군복무 후 덴마크에서 낙농학을 전공하는 유학생이라고 남숙에게 밝혔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 미개척 분야에 종사할 것 이라 하며 그녀가 묻지도 않는 얘기를 슬슬 껴냈다. 그들은 건물이 늘어선 거리 를 빠져 나와 시야가 확 트인 콩코르트 광장 앞의 건널목에서 걸음을 멈췄다. 'ALLER'의 초록 신호판을 바라보며 르와얄 거리로 걸었다. 새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유럽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곳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고 말하며 바지 뒷주 머니에서 비주룩이 빠져나온 관광 안내책과 파리의 시내 지도를 꺼내어 보여주 는 성욱의 움직임은 조금도 부담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성욱의 짙은 눈썹은 고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고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배짱이 두둑 한 성품 같았다. 남숙은 우뚝한 콧등을 따라 내려온 적당한 크기의 야무진 입 모양을 미남 쪽보다 뚝심있고 의협심이 강한 쪽으로 보고 싶었다. 푸르스름한 진바지에 목이 올라온 투박한 구두를 신었으며 상의로는 붉은 색이 도는 넉넉한 점퍼를 걸친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곱슬머리만 빼고는 많이 봤던 인상 같았다. 어디서였을까. 꼭 만났던 얼굴인 것처럼 느꼈다. 노상의 코코 카페였을까. 남숙 은 반문해 보는 자신이 또 다른 엄격한 자신에게 들킨 것 같아 내심 쑥스러웠 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를 줄곧 바라보며 그가 얘기하고 있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었더라도 따라왔을 겁니다." "혹시 그게 취미가 아니에요?" 남숙은 그가 유학생의 외로움을 호소하는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짓궂게 반문했 다. 성욱은 곱슬머리를 긁적이며 어떻게 눈치를 채셨냐고 다시 물어왔다. "그런 사람이 왠지 좋아지거든요." 남숙은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보니 이 말에 책임 있는 행동까지 포함된 것 같 아 뜨끔했다. 실은 여자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 다니는 남자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욱은 다르다고 느껴지는 감정을 그에게 굳이 감추려는 저의를 알 수 없었다. "그럼 아주 잘됐군요. 좋아하는 사람을 여기서 만날 수 있다는 건 보통 인연이 아닌데 말입니다." 성욱은 말을 하면서 그의 턱언저리를 슬쩍 비벼댔다. 남숙은 덫에 걸려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덫으로 걸어가고 싶은 욕구를 느꼈 다. 성욱은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려는지 한쪽 어깨를 쓱 올렸다. 그는 종이에 적힌 주소를 남숙 앞으로 내밀면서 대학교 은사인 교수의 집 주소라고 밝혔다. 현재 거기에 여장을 풀고 있으나 지금 그 교수는 세미나 관계로 한국을 다녀온 다는 바람에 졸지에 미아가 됐다는 그의 표정은 정작 미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를 만나게 되어 미아의 신세를 모면하게 되었으니 신이 자기를 버릴 리가 없다며 도리어 유쾌하게 웃는 것이었다. 남숙은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깜박 잊고 있었다는 듯 공중전화 박스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빨간 유리창 살에 갇힌 듯이 성욱에게 손가락으로 다이얼을 돌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라데 팡스의 후배는 오기 전에 반드시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고서 여태 신호를 받지 않고 있었다. 남숙은 망설임 없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결코 작은 키는 아 니나 큰 키도 아닌 성욱의 곁에 있다는 느낌은 편안함을 주었다. 언젠가 외로움 같은 건 구세대의 허영에 불과한 것이라고 후배에게 말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여태까지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젠 그것이 아닌 듯도 싶어진다. 그의 옆에 불과한 시간 남짓 함께 있는 동안 여지없이 부서지고 마는 자신의 완벽하 다고 생각했던 벽을 체험하며 왠지 씁씁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토 록 똘똘 뭉쳐졌던 아집은 언제 어디서부터 새로이 움트고 있었을까. 나는 왜 이 남자의 주변에서 멀어지지 못하는 것일까. 그녀는 결혼한 자신을 전혀 잊고 있 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아예 아이까지 있다는 현실을 잊고 싶었다. 그들은 파리의 시내 지도를 펴 들고 메트로(지하철) 입구의 계단 앞에 잠시 서 있었다. 그녀는 줄기를 타고 올라간 초롱꽃 무늬 의 조각과 조개 껍질 무늬 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성욱을 찬찬히 주시했다. "확실히 북쪽하고는 건축 형식의 차이가 있군요. 여성스럽다고 할까." "가축을 기르세요?" 목젖을 삼키며 말하는 성욱에게 불쑥 이렇게 묻는 엉뚱한 자신이 적이 놀라웠 다. 그래서 훗, 하며 입을 가리고 웃고 말았다. "글쎄요. 가축보다는 사랑을 찾는데요?" 아직 미혼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어야 하는 그의 말이 남숙의 마음에 걸렸다. 이즈음에서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성욱이 괜찮다면 자연스럽 게 함께 있고 싶었다. 남숙은 참으로 모를 일이 사람의 마음이라 생각하고 어처 구니없는 자신의 행동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주 저 없이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 메트로를 탔다. 그러나 아파트로 돌아간다 해도 이 시각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린다는 것은 남숙에게 너무 무의미했다. 이를테면 동반자이긴 하나 결혼이라는 굴레 때 문에 애정이 없더라도 한 거처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고 남숙은 마음으로 중얼거 렸다. 남숙은 대체로 낮 한 때는 라테팡스의 후배와 어울렸다. 뜻이 맞으면 영화 관과 오페라 하우스를 찾고 간간이 화랑에서 열리는 미술 전람회에도 가곤 했 다. 별달리 약속이 없는 날에는 노상 카페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다가 백화점이 나 그 지하에 가서 찬거리를 사기도 했다. 중학 입시 때문에 함께 있어주지 못 하는 딸아이에게 편지를 보내며 아이가 흥미를 느끼는 물건이 눈에 띄면 그것들 을 부치곤 했다. 그러나 늘 애영에겐 보고 싶은 마음만큼 미안하고 측은한 마음 이 들었다. 물질로 에미의 마음을 대변할 수 없다는 허전함에 사로잡힐 때면 울 적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몽마르트 언덕으로 오르곤 했다. 후배와 함께 그리로 가는 날이면 고풍스러운 카페에 파리지엔들과 둘러앉아 흔쾌하게 맥주를 들이켜 거나 그녀 혼자일 때에는 광장에서 그림 시장이 펼쳐지는 삶의 현장을 지켜보면 그런 대로 흡족해지고 향수가 달래지곤 했다. 그 밖의 시간들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미용 학원을 다니는 데 소모되었다. 둘은 햇살이 흔덕지게 내리는 '시테'섬의 노트르담의 층계에 앉아 있었다. 그 들 앞으로 노트르담 성당의 첨탑이 웅장하게 솟아 있었다. 그들은 수면이 반짝 거리는 센 강 위로 눈길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 너머 생루이 섬도 가물거렸다. 잠시 남숙은 자신이 현재에 존재하고 있다는 현실에서 벗어났다. 시간을 초월한 또 다른 차원의 세계, 과거로 거슬러 간 머언 피안의 세계에서 숨쉬는 티없는 존재같이 여겨졌다. 남편은 곧잘 자기 같은 사람을 잘 만났기 때문에 아이까지 떼어놓고 파리에 와서 회고의 미용 학원엘 다닌다고 했다. 관심이 어떻고 애정 이 어떻고 하는 팔자 편한 언어는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해 주었다. 왜인 지 그런 말을 면전에서 들을 때면 오히려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 우울에 빠져들었다. 낮 동안 아내가 무엇을 하는지 관심조차 없고, 자수 성가한 탓인지 출세를 위한 것이라면 자주 가는 출장도 마다 않고 집을 비웠다. 남숙은 애 끓이는 것보다, 남편에게 관심을 전혀 두지 않는 편이 도리어 그녀의 가슴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성욱과 한동안 있을 때에 자신에게 남편이 있 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며 티없는 존재의 세계로 날아갔었다. 그녀는 혼자 있을 때에도 티없는 존재의 세계에 젖어들어 생각을 앳된 소녀로 남아 있 고 싶었다. "항상 그 시각에 코코에 들리십니까?" 굵직한 성욱의 목소리가 그러한 상상에서 그녀를 끌어내려버렸다. 그때쯤이면 학원이 끝나는 시간이라 가끔 찾아간다는 그녀의 말에 무슨 학원이냐고 그는 물 어왔다. 한 무더기 바람이 그들과 옷깃을 동시에 스치고 강으로 내려갔다. 강비 늘은 바람의 무게를 전해 주는 것 같았다. 물음에 답은 했으나 결혼하여 아이까 지 있는 유부녀라고 선뜻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얘기는 듣는 편이 유리하죠." 성욱은 말수가 적은 그녀를 보고 얘기를 이어갔다. 자신이 축산과 낙농을 선 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부모의 희망이라고 했다. 선대의 땅이 고국의 다소 리 주변 일대와 현재 시설을 갖추어 놓은 농장을 포함한 농지가 십여 만 평이 며, 가축의 환경은 곧 나라의 경제 수준을 말하는 것이라 했다. 앞으로 한국은 전국민 모두가 우유를 흠뻑 마셔야 하며 초등학교에선 우유 배급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가까운 일본은 이미 실천을 하여 그 혜택을 입고 있다고 했다. 성욱은 마치 연극 대사를 읽어가듯 강약의 리듬을 탔다. 머지않아 질 좋은 버터나 순수 한 치즈도 우리 손으로 만들 날이 왔다고 했다. 열기에 찬 그의 눈빛은 남숙의 조용한 시선에 융화되고 있었다. "남숙 씨 덕에 우리 나라 말을 실컷 했고 강의까지 들어주셨으니 제가 답례를 하지 않으면 혼을 내실 눈빛입니다.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이렇게 그는 말하며 노트르담 사원 앞의 광장으로 얼굴을 돌렸다. 파비르 광장에 모인 군중들은 드라마를 보기 위하여 한 팬터마임 연기자를 에 워싸고 있었다. 연기자는 얼굴에 횟가루를 바르고 희극적인 표정을 수시로 바꾸 고 있었다. 활짝 웃다가도 몹시 서글픈 표정으로 얼굴의 주름살을 일그러뜨리며 한마디의 말도 없이 열정을 쏟고 있었다. 관객의 입장으로는 속아서 웃는 것 같 고 연기자로는 속이며 웃어 보이는 것 같다고 그녀는 군중 틈에서 성욱에게 속 삭였다. 그것은 서로 속이며 웃는 것 같았다. 남숙은 이 팬터마임의 뜻이 무엇을 말함인지 알면 가르쳐달라고 그에게 물었다. "여기서는 누가 듣습니다. 또 그러다가 남숙 씨에게 내 무식이 들통나면 책임 지시겠습니까?" "이 사람들, 한국 말 몰라요. 또 아무렇게나 얘기하셔도 전 그런 줄 믿거든요." 남숙의 응답에 그제야 성욱이 껄껄거리며 도망치듯 사람들의 무리에서 빠져나 갔다. 성욱의 강의를 들어준 대가로 목을 축이기 위하여 카페에서 테이블을 사 이에 두고 마주앉게 되었다. 시테 섬을 끼고 센 강을 따라 흐르는 '매짓스리'강 물의 고요한 분위기는 낮과 저녁 사이를 서서히 가르고 있었다. "결국 인생이라는 게 한 토막의 연극과 같다고 할까요? 그러나 속이는 편보다 속아 주는 편이 진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하고는 의견이 다릅니까?" 속인다는 뜻에 의미를 두면서 남숙에게 던지는 도전의 말 같았다. 성욱은 자 신의 얘기를 쉽사리 꺼내지 않는 그녀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남숙은 그의 말 에서 진지하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마치 자신이 성욱을 속이고 있다는 얘 기로 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진지한 편은 그보다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는 유부녀가 길에서 오가다 만난 유학생을 보자마자 자신 의 처지를 털어 보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와 마주 서고 보니 그에게 한없이 이끌리고 마는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게 되었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그러한 벅찬 감정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남숙은 마치 격에 맞지 않 는 일처럼 느껴졌다. 성욱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들을 서술하듯 별 어려움 없이 얘기했다. 남숙은 그가 어떤 사람을 만났어도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진지하다는 부분은 오히려 자기 쪽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자수 성가하여 출세한 남편은 회사의 간부로 지목 받기 전부터 외박이 잦았 다. 그러한 남편을 파리에서 몇 년 동안 홀로 있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파 리라는 여건을 이용하여 꿈꾸어온 미용학을 이때에 전공하고 싶었다. 남편이 외 박을 모면하기 위해 툭 하면 자기를 잘 만났기에 파리에서 유학하는 팔자가 되 었지, 하는 넋두리를 해댈 때마다 역겨웠고 반발심이 일어났다. 성욱이 말한 진지하다는 생각 때문에 남숙은 진지하게 자신의 입장에 젖어보 며 울적해졌다. "이미 결혼했어요, 전 딸도 하나 있구요." 그녀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성욱과의 진지함이란 무엇인가 하고 한동안 머 뭇대다가 비로소 입을 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왼손 약지에 끼고 있었던 금반지를 손을 들어 살짝 보여주었다. 마치 헤어졌다 돌아온 연인에게 고백하는 것처럼 처량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녀의 얘기가 이어지기도 전에 얼굴 표정이 굳어진 성욱의 눈동자는 엷은 거품이 묻어 있는 빈 맥주잔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뜻밖이라고 힘없이 말했다. 그는 남숙이 틀림없이 유학생인 줄 알았으며 결혼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고 말해 주었다. 무안함과 서운함 이 짙게 성욱을 누르고 있었다. 가을 들녘에 내리는 쓸쓸하고 차가운 비를 흠뻑 맞고 있는 듯 느껴졌다. 실망의 그늘이 스쳐갔을 무렵 그는 한쪽 눈썹 주위를 손가락으로 긁어댔다. 그리고 둘은 짙붉은 강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파리는 낮도 밤도 아닌 은연한 남빛 그림자 안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강가의 연인들은 마로 니에 아래에서 주변의 눈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얼싸안고 있었다. 남숙은 다정한 연인들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어 실기 시험의 날짜를 확인 했다. 내려다보는 까맣고 긴 속눈썹이 성욱의 텅 비어버린 가슴을 비집고 들어 왔다. 그때 그녀는 얼마 후에 서울로 돌아갈 것이라고 다시 밝혔다. "자꾸 그러지 마십시오. 오늘 만났는데 벌써 이별이라니요. 어차피 만남 자체 가 헤어짐을 전제하고 있잖습니까?" 남숙에게 항의하듯 말했다. 그녀는 체념과 요염한 눈빛을 교차시키면서 서울 에 가면 한센 호텔에다 뷰티 숍을 가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언젠가 성욱이 한국 으로 돌아간다면 그리고 연락이 닿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곱슬머리, 모양 나게 손질해 드릴게요." 남숙의 이 말에 그는 코끝을 묘하게 찡그러뜨리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런 후 한쪽 다리를 쭉 뻗어 바지 앞주머니에서 담배 곽을 꺼내 테이블에 힘없이 놓았다. 처음 그녀가 한국 여성일 거라는 적중이 그 기쁨은 결혼했다는 그녀의 고백 때문에 도리어 어두워졌다. 결혼했다는 사실을 애써 삭이려는 듯 머리를 아래로 푹 숙이고 있었다. 밖은 이미 어둠이 시작되고 있었다. 잠시 그는 담배를 한 개피 피워 물고 연기를 토해내려다 사래에 걸려 캑캑거렸다. 둘은 상대방의 마음이 다소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곳을 떠났다. 성욱은 그녀가 탄 건물 내의 수동식 엘리베이터가 삐거덕거리며 오르는 것을 보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남숙은 마로니에 아래에 한동안을 기대어 섰다가 거 리로 흡수되어 가는 그를 아파트의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았다. 밤은 언제부터인가 자신과의 투쟁하는 시간이라고 되뇌이며 수화기를 노려보 았다. 남편이 돌아오는 밤에도 다를 바는 없지만 좀전의 외박 통고를 받고 보니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남편이 파티에 초대되는 날에는 일반적으로 새벽에 들어왔다. 공식적인 모임이 있는 날에는 부부가 초대되어 한두 시에 돌아왔으나 비교적 남편만이 가는 모임에는 느지막이 귀가했다. 남숙은 얼큰한 취기로 화려 한 파트너의 한몫을 잘해내고 있을 남편을 떠올렸다. 연기로는 남편을 따라갈 사람이 드물 것이었다. 또한 임기 응변술도 빼어나 파리의 지사장으로 취임한 후로 회사의 기업체는 날로 호전되고 있었다. 그의 경영 방식과 남편을 무조건 신뢰하는 서울 본사는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그것을 최대로 이용하며 인생을 즐기는 남편을 응시할 때마다 왠지 혼자있는 기분에 젖어들었다. 그럴수록 자기에게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가정 생활이 원만하게 돌아간다는 판단을 했다. 그것이 라몽드에 입학하게 된 첫 번째 이유였다. 미용학은 남편에 대한 불만의 거스머리들을 미 련 두지 않고 깎아냈다. 남편은 결혼한 후 다른 사람처럼 변해갔다. 그는 인정받 기 위해서라면 가정이 희생되더라도 출세를 먼저 하고 보자는 식이었다. 그런데 오늘밤의 전화로는 로마에 와 있다고 말했다. 새 지사를 내려면 두루 알아봐야 하니까 주말까지 견디어봐야 한다고 했다. 남숙은 견디어봐야만 한다는 남편의 말에 화가 치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금요일이었다. 며칠 전 아니 하루 전에라 도 미리 말을 해줄 수 없냐고 수화기를 노려보며 대꾸했다. 그는 아파트로 전화 를 수없이 했지만 어디로 쏘다녔냐고 도리어 큰소리쳤다. 라데팡스의 후배와 같 이 있었다고 남편이 먼저 묻기도 전에 말해버렸다. 낮 동안 성욱과 함께 지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낮에 라데팡스로 몇 번이나 전화했는 줄 알아? 신호를 받아야지."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려나왔다. 다행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나갔더랬어요. 거기로 연락하실 줄 알았어야죠." 남숙은 뜨끔했다. 거짓말이 계속 술술 나올 것 같았다. 주말 하루 전에 로마로 떠난 자기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역정을 내는 남편이나 낮 동안 후배와 함께 있지 않고도 그녀와 지냈다고 둘러대는 아내나 서로 속이며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숙은 그가 집을 비웠던 그 많은 날들이 자기를 속인 것 만 같아 입맛이 썼다. "알았어!" 일방적으로 끊는 남편의 국제 전화 목소리가 너무타 가까이 들려서 수화기를 놓고도 마치 시내인 것 같은 찜찜한 생각이 들었다. 남숙은 글라스에 코냑을 반 잔 따랐다. 쉽사리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침대로 돌아가 글라스에 입술을 가만히 댔다. 내일 성욱과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던 일 이 스쳤다. 성욱은 약속할 수 없다는 남숙의 생각이 몹시 서운하다고 말했다. 약 속은 서로의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며 누구에게도 강요해선 이뤄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실은 남숙도 같은 감정에 젖어 있었다. "누구에게의 강요나 요구가 아니라 서로 자연스럽게 원하는게 아니겠습니까?" 그의 말은 남숙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성욱이 먼저 다음날의 약 속을 하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속을 하면서도 마음의 거리낌이라든 가, 학원이 끝나면 공연히 시간을 보내려고 성욱과의 약속을 하는 것은 절대 아 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반드시 만나야 될 것 같은 야릇한 감정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성욱의 말대로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강요가 아니라는 데에 남숙은 더 이끌리고 있었다. 코냑을 거의 다 마실 즈음에 전화가 울렸다. 남숙은 수화기를 노려보다가 후 배라고 생각하고 스르르 웃었다. 수화기를 드는 순간 귀가 따가울 만큼 큰 목소 리가 울려나왔다. "언니, 뭐야 연락두 않구." 불쑥 튀어나온 후배였다. 남숙은 대뜸 어딜 쏘다녔냐고 방금 남편이 뱉은 말 과 똑같은 말을 했다. "형부가 전화 걸으셨단 말야." 이 말에 공연히 화가 치밀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날 찾고 돌아다녔대?" 남숙은 무심코 그 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후배가 뭐라고 변명을 해놓았는지 궁금했다. "젊은 남자랑 데이트 중이라고 엄포를 딱 놔드렸지, 뭐." 남숙은 왜 그렇게 약을 올려주었냐고 물었다. 후배는 남숙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내일 코코 카페로 나와야 된다는 것이었다. 현장 목격을 하 였으니 자기의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고 막무가내로 우겼다. 조건은 반드시 둘이 함께 자기를 초대해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남숙은 그녀가 내세운 조건을 쾌히 받아들이기로 하고 수화기를 놓았다. 빙그레 미소가 새어나왔다. 잠이 곧 찾아올 것 같은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남숙을 집적였다. 남편의 노고를 늘 감사하게 여 기지만 마음 한편에 도사리고 있는 남편에 대한 불만의 불청객이 때를 기다린 듯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런 기분으로는 불청객이 주인의 행세로 둔갑할 것 만 같았다. 언젠가 남편이 불만이 무어냐고 물어왔을 때 당황한 기억이 났다. 별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었기에 고개만을 좌우로 느릿하게 저어 보였긴 했지만 정 확한 답변을 집어올린 건 아니었다. 열한 살 위인 남편은 아내에게 관대했고 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아예 간섭하지 않았다. 그런대로 자유로운 시간과 여유 를 할애하며 편안한 생활을 누린 셈이었다. 더구나 파리에 와서 유학생들과 함 께 어울려 이곳에서도 손꼽히는 라몽드의 미용학을 전공하는 행운을 가진 마당 에 불만을 얘기한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이었다. 남편의 말은 대부분 문법상 옳고 조리가 있으며 수긍해야 할 사실들이긴 했다. 앞으로도 발족할 미용 사업 에 남편의 후광과 협조는 약속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녀가 경제권을 따로 쥐 겠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어떤 분야의 여류들과도 떨어짐 없이 어깨를 겨누며 활동한다 해도 막을 그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소외되며 외롭고 공허할 까. 코냑 기운인지 온몸에 훈기가 퍼지면서 가슴이 뜨거워옴을 느꼈다. 외곬로 달리던 생각이 부서졌다. 낮에 만났던 장성욱이 가슴의 수면 위로 스르르 떠올 랐다. 맑고 총명한 눈동자와 우뚝한 코에, 웃으면 두터운 입술이 한껏 올라가면 서 흰 이가 다 드러나는 입언저리, 이지적인 턱과 그 주변의 푸른 기가 도는 면 도 자국, 미남이라기보다는 윤곽의 조화가 뚜렷한 남자라 생각됐다. 성욱은 자연 스럽게 상대방을 이끄는 부드러운 성품이었다. 난처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자기 쪽으로 흡수시키고 마는 호소력이 있는 반면에 그가 내세우고 싶은 것에는 끝내 밀고가는 고집스러운 면도 엿보였다. 그의 시선은 저변까지 꿰뚫어보는 예리한 힘이 있었으며 이따금 무겁게 다문 입언저리와 둥그스럼한 턱은 어딘지 모르게 유학생들이 겪는 외로움을 보이곤 했다. 남숙은 자기로 인해 그를 더욱 쓸쓸하 게 몰고 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렇게 성욱을 진단하면서 마치 첫경험처럼 흥 분되었다. 너무 늦었어. 내가 아리따운 미혼의 아가씨였다면 하고 되뇌다 그녀는 잠들어 버렸다. 요란한 시계의 알람소리가 남숙을 깨웠다. 으시시 몰려오는 한기와 왼쪽 두통 이 그녀의 기분을 우울하게 했다.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삭신을 5분 간의 미용 체조로 뿌리쳤다. 우유를 따끈하게 데웠다. 간밤에 마셨던 코냑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천천히 입으로 넘어가는 우유 맛을 음미했다. 그러고 나니 한결 두통 이 사라졌다. 다시 주말을 로마에서 보내고 오겠다는 남편의 가까운 전화 음성 이 기분을 거슬리게 했다. 강의는 오전에 끝날 것이었다. 후배와 성욱을 만날 생 각을 하니 공연히 신바람이 생겼다. 남숙은 가볍고 경쾌한 차림으로 아파트를 나섰다. 후배인 김마리는 먼저 와 있었다. 노상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작은 비둘기가 바닥을 급히 쪼고 있었다. 부스러기는 보이지 않았는데도 새는 여전히 날아갈 생각을 않고 있었다. "언니, 십 년은 젊어 보이잖아." 마리가 질투 어린 눈짓으로 두 손을 턱에 고이며 말했다. "트레 비앙." 마리는 불어로 연신 지껄였다. 그녀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남숙은 현장 목격 이 무엇이며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는 말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라데팡스로 전화 를 했지만 어디를 쏘다녔기에 연락이 되지 않았느냐는 호통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마리는 전후방 모두 안전 상태이니 그 예쁜 이마의 주름살을 펴 보이라 고 했다. 그 잘난 남편보다는 어제 자기에게 들킨 청년과 그림처럼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고 말했다. 남숙의 볼이 붉어지는 것을 보자 언제부터 자기에게 감추어 둔 애인이 있었냐고, 여자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 하며 사뭇 놀리는 억 양이었다. 그들은 늘 주문하는 그 잘생긴 신사에게 마실 것을 달라고 했다. 마리는 불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녀는 파리에서 대학을 나와 '라화에트' 백화점의 세일즈 부분을 맡고 있었다. 동양의 물결이 서서히 파리를 휩쓸 낌새 를 차린 백화점 쪽에서는 마리가 적임이었다. 일본어뿐 아니라 이탈리아어까지 해대는 언어의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리는 이탈리아 출생 인 샹송 가수와 열애 중이었다. 샹송 가수는 결혼한 중년 남자였으며 인기 정상 을 달리고 있었다. 유난히 큰 입이 마리를 야성적으로 돋보이게 했으며 조각처 럼 빚어낸 적당한 콧날과 동양적인 눈매는 이국적으로 느끼게 하였다. 마리는 파리지엔도 한국인도 아닌 그런 독특한 분위기가 매력이었다. 남숙에겐 그녀가 왠지 파리지엔처럼 느껴졌다. 마리와 며칠 못 만나는 날이면 마치 한 달을 넘기 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 동안에 일어났던 샹송 가수의 연속 얘기가 밀려 있었으나 곧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한다고 말했다. 지방 공연에서 돌아온 애인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성욱과의 만찬은 다음 기회로 미 룰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고 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언니, 난요, 결혼 같은 건 생각 전혀 없어요. 만나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바로 행복이에요. 상대에게 조건을 강요하는 연예는 서로 상처를 부거든요. 언 니, 마음에 있으며 미련 없이 연애하세요. 이게 내 부탁!" 마리는 남숙의 대답을 들으려고도 않고 멀어져 갔다. 남숙은 희무레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데 마침 성욱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아니, 멀어져 가는 여인은 누굽니까? 소개도 없이 내쫓는 거 아닙니까?" 성욱이 곱슬머리를 슬쩍 쓸어올리며 다가와 앉았다. 그는 주문한 커피를 훌떡 마셨다. 성욱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누르며 간밤에 술이 과하여 늦잠을 자고 일 어난 덕인지 머리가 무겁다고했다. 성욱은 대뜸 걷자고 했다. 둘은 코코에서 빠 져나와 역사를 업고 있는 파리의 시내로 천천히 걸었다. '몽스리' 공원의 오후는 가을이 익고 있었다. 물이 든 마로니에 아래의 벤치에 서 쉬고 있는 사람들은 한가로워 보였다. 노인들과 젊은이들은 쇠붙이로 만든 공을 굴기고 있었다. 공과 공이 서로 맞부딪치는 음향이 주위에 울려 퍼졌다. 젊은이들 한 쌍이 노오란 수선화가 무리져 만발한 잔디에서 마악 결혼식을 끝내 고 들러리섰던 어린애들과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은 남숙에게 지난 일을 되돌아보게 했다. 결혼식을 끝내고 바라보던 신랑은 미덥고 자랑스러웠다. 앞날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았던 신혼 시절이 스쳤다. 언 제부터였는지 남편에 대한 신념이 서서히 허물어져 갔다. 가정 형편이 기름지면 서 바깥일에만 정신이 팔려 아내의 존재를 거의 잊고 있는 남편이 떠올랐다. 잦 은 출장과 음주 그리고 대화 없는 십 년 남짓한 산산스러운 세월이 아깝도록 흘 러가 버렸다고 남숙은 생각했다. 파리로 부임되기 전 서울에 있을 때에는 툭하 면 통행금지가 풀려야 쾨쾨한 술범벅이로 어벌쩡하게 들어와서 내의와 Y셔츠를 갈아입고 이른 시간인데도 출근을 했다. "자식과 아내를 먹여 살리느라 이렇게 바삐 뛰는 남편이 가엾지 않느냐." 오히려 큰소리를 남기며 후닥닥 사라져버리는 남편이 떠올랐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거요?" 무리져 피어 있는 수선화를 지켜보던 남숙에게 그가 물었다. "참, 결혼 언제쯤 하실 계획이세요?" 묻고 싶었던 것이 생각난 듯 그녀가 물었다. 쓸쓸한 미소가 성욱의 입가를 적 셨다. "남숙 씨와 결혼하고 싶은데 임자가 있으니 또 한 사람의 노총각이 늘었지 뭡 니까?" 임자라고 말한 곳에서 성욱은 이마를 찡그려뜨렸다. 성욱은 남숙을 쑥스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그의 모습이 마치 관객을 웃도록 만드는 코미디언의 얼굴처럼 보여졌다. 그녀가 환하게 웃는 것을 보다가 아스므 레한 눈빛으로 창공을 더듬었다. 남숙은 그보다 5살이나 위였다. 그래도 앳되 보이는 쪽은 그녀였다. 그의 눈을 바라보면 진심인 것 같았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성욱과 만나는 순간만이라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성욱은 파리에서 떠나는 날을 미루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성욱을 계속 만 나고 있었다. 정오 가까이부터 한밤에 이르도록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남숙은 일시적 유혹 이상으로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성욱과의 만남을 의식했다. 그것은 불안과 동시에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기쁨은 그를 통하여 느낄 수 있었고 불안 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이었다. 남편을 다른 남자라고 쉽게 표현해 버 리는 자신이 이상히 여겨지지 않았다. 가슴에 자리잡고 있었던 내면 의식이 뒤 바꿔지고 있는 것이었다. 성욱을 대하면 가차없이 빨려들고 마는 나약함을 느꼈 다. 그리고 점차 그에게 전부를 내맡기고 싶은 본능이 치밀었다. 그럴수록 성욱 은 그녀 앞에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첫날은 허전한 대로 부질없는 감정 같았지 만 성욱의 시선과 부딪치는 순간에는 전에 경험 못했던 호흡의 빠름으로 가슴을 달래야 했다. 그것은 고통이었으며 감미롭기도 하여 일종의 신비로운 기분을 맛 보았다. 그의 말이 끊어질 때면 침묵에서 오는 무거움으로 호흡이 중단되는 것 만 같았다. 서로는 말없는 대화가 가로막아도 은밀한 약속을 키워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북구로 다시 여행할까 하는 데 같이 가 주실 수 있습니까?" 벤치에 앉아 힘주어 손을 꼭 잡으며 성욱은 물었다. "덴마크로 가시게요?" 남숙은 눈망울에 고여드는 슬픔을 감추려 했다. 요번엔 기차여행이 아니라 숙 박을 하면서 더 가까이로 가 볼 생각이라 했다. 그녀의 입장으로는 여행은 불가 능한 일이었다. "유럽의 북쪽은 아름답고 웅장해요. 뿐만 아니라 신비스러운 힘이랄까 그런 걸 느꼈어요."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지난 해 경험했던 산야를 덮고 있는 빙하의 얘기를 털 어놓았다. 처음 만나는 길손의 눈에는 빙하가 얼음산의 허리를 감고 낮은 곳으로 흘려 내린다 자세히 눈여겨보게 되면 산을 형성한 얼음덩이가 웅장한 소리와 함께 부 서지며 녹아 내리면서 강의 본줄기와 합류하여 낮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 흐름은 유구하여 푸른 호수 위에 다만 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얼음덩이는 시 간의 흐름과 함께 호흡하면서 녹아 흘러간다. 마침내 거대한 옥 같은 얼음덩이 는 출렁이는 하류로 내려가면서 분열이 되기 도 하고 푸른 호수를 만들기도 한 다. 그 하류를 따라가면 훈풍이 날아들면서 비로소 기후가 색다르다. 강변에 노 오랗고 작은 여린 풀꽃들이 들판을 이루는가 하면 보랏빛 들꽃 무리의 낮은 구 릉이 헤아릴 수 없는 이랑을 이루며 북구의 국경과 어우러진다. 평행선을 그렇 게 달리며 마치 옥 같은 얼음산과 꽃무리의 색채는 극치를 이루는 신비를 만끽 하게 한다. 조용하게 시작했던 그의 말소리가 흥분하면서 끊겼다. 그의 목소리는 생명이 약동하는 열정으로 힘 차 있었다. 그의 흡사 자연과 일치하고 있는 듯함에는 자 연과 사람의 관계를 맺어주는 신선함이 어려 있었다. 남숙은 그가 소중한 존재 를 느껴졌다. 그리고 가슴의 가장 밑바닥에서 터져나오는 숨을 토해냈다. 성욱의 숨결이 자신의 폐부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어느덧 그의 체온이 그녀의 내부 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녀가 아래로 밀리면서 성욱의 콧등이 그녀의 목을 쓸며 내려갔다. 신비스러운 전율을 둘이 동시에 느꼈다. 둘은 몹시 잡아당기며 마치 하나를 둘로 가르듯이 입술로 서로를 다스리고 있었다. 융화되는 비음이 연달아 새어나왔다. 둘의 감정은 이질적이나 같은 행복의 전율과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 마주보고 상대방을 확인하며 출렁이는 이랑과 구릉을 타고 한없이 흘러갔다. 마리와 그의 애인은 지방 공연을 하러 떠났기 때문에 그녀의 아파트에서 빠져 나온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남숙과 성욱은 요리를 직접해 먹는 즐거움을 맛보 았다. 그가 길에서 오가던 남자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으로 남숙의 가슴을 꽉 메 우고 있는 것이었다. 둘에겐 그 사살이 누가 무어라 해도 진실처럼 다가왔다. 3 1970년도 초반에 '주미셀'은 눈부신 성황을 이루며 젊은 여성들과 가정 주부들 에게 인기를 얻었다. 특급 호텔인 한센의 지하에 자리잡은 헤어 뷰티 숍은 국내 에는 일찍이 없었던 최신 설비와 미용의 특수 시설 그리고 실내 장식과 어울리 는 미용 기구들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찾아온 고객들이 시선을 머물 게 하는 데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유행되는 감미로운 뮤직과 교차하 여 흐르는 클래식은 마치 바닥에서 울려오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그만 큼 최신의 미용 시설을 갖춘 숍이었다. 2년의 짧은 기간동안 현재의 자리로 쌓 아 올리게된 것은 특수한 설비도 이유가 되겠지만 무엇보다 남숙의 끈기있는 노 력과 사업에 대한 열의 때문이었다. 그녀는 경영상의 수지 계산에 앞서 고객들 에게 쾌적하고 안락함을 주기 위하여 봉사했으며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그녀가 수업했 던 파리에서 비롯되었다. 마치 미용실이 아닌 듯한 착각을 고객들에게 주는 숍 이 대단한 인기를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악을 감상하는 곳인지 차를 먹 기 위한 응접실인지 구분이 안 되면서도 안정감과 친절은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 았다. 특별히 미용 상담은 남숙이 직접 관여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카운슬링을 맡았다. 그녀를 찾아오는 고객들의 분위기를 예리하게 캐치하여 항시 유행이라 는 첨단보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살려주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 다. 피부 보호를 겸한 화장법에 정성을 기울이고 머리의 모양새보다 머리카락의 성질을 파악하여 손상되는 않게 손질하는 법과 머리 패션과 실생활의 관계를 고 객과 함께 의논해 주었다. 주미셀은 독특한 경영 방식으로 여성들에게 관심도가 높아져갔다. 그녀가 파 리에서 남편보다 먼저 서울로 돌아온 지 거의 일 년이 되어 갈 무렵에 남편도 파리를 떠났다. 남숙은 호텔과의 계약을 미룰 수가 없었기 때문에 미용학을 수 료하자마자 서울로 달려왔다. 딸 애영을 보기 위하여 방학 때는 서울에 들리곤 했지만 막상 미용 공부가 끝나갈 무렵에는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더 이상 파리 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남편은 도쿄의 지사장이라는 명분으로 연속적인 해외 근무를 거친 다음에야 전무 자격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남편이 쌓아올린 사회적 인 위치와 권위는 한치의 여유도 없었다. 생활 굴레의 틀에 꽉 매여 있는 남편 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남숙 역시 일에 전심 전력하여 그에게 무관심하였다. 애 영은 곧 중학 입시로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 모양, 시간에 안달을 하며 얼굴 마 주 대하는 것조차 어렵게 되어 갔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기들의 영역에 불만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남숙은 그녀대로 열심히 일을 하고 남편은 그대로 아내와 아이한테 상관하지 않았다. 집안의 살림은 남숙의 친모가 도맡아 보살피며 애영 은 가정 교사인 정희와 시간을 나누었다. 남편은 자유 분방한 나머지 돈의 힘으 로 사생활을 합리화시키고 그 허세를 음주로 달래는 듯했다. 그는 하루도 빠짐 없이 술을 마셨다. 남숙이 그가 은근한 중독기에 접어들고 있으니 건강 진단이 라도 받자고 하면 도리어 술이 없으면 병이 걸리는 특수 체질이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자기 일이나 신경쓰라고 호통이었다. 남숙이에게 미용업이 있 다는 것은 때때로, 막연히 고맙고 퍽 다행한 일로 생각되었다. 남편에 대한 신뢰 와 애틋한 애정의 속삭임도 필요없이 그녀는 미용업의 그늘에서 스스로 자신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이다. 파리에서 성욱과의 만남 이후 그녀의 마음은 남편으로 부터 여지없이 튕겨나버렸다. 남편은 아내보다 출세를 더 사랑하는 것 같았다. 어쩌다가 잠자리를 해야 하는 밤이면 그녀는 괴로움에 뒤척였다. 그럴 때면 성 욱의 생각이 절실했고 서로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무엇보다 슬펐다. 간혹 남편 이 술기운으로 위세를 부리면 부릴 수록 자신은 강제로 마치 더러운 힘을 입는 것 같은 감정에 빠지곤 했다. 거부하면 할수록 남편의 열기는 발악으로 덮쳤다. 그러다가 그가 받아들이려고 할 때면 금세 수그러져 그만 코를 골고 마는 것이 었다. 남숙은 그러한 남편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습성이 더욱 그녀를 침 울하게 했다. 두어 달 전의 일이었다. 주미셀로 한 장의 엽서가 날아왔다. 그것은 장성욱으 로부터 온 것이었다. 남숙은 읽기 전에 우선 심호흡을 들이키며 지난 일들을 들 추었다. 그와 함께 경험했던 일들이 머리 속 가득하게 채워졌다. 그때 그날이 마지막 이 될 줄은 몰랐다. 둘이 다시 만날 약속을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스스러운 마 음 없이 포옹하고 다시 만날 수 있음을 당연한 일이 되었다. 약속한 저녁에 느 닷없이 남편이 차를 몰고 아파트로 들어왔다. 한센 호텔 사장이 예정보다 3일 앞당겨 파리에 왔으며 특별히 남숙 부부를 연회에 초청했다는 것이었다. 남숙은 자신의 일을 생각하면 사장의 초대가 절호의 기회였으나 성욱의 약속 때문에 끓 어오르는 조바심을 누르느라 화장이 잘되지 않았다. 드레스를 입고 나서니 몰라 보도록 아름답다고 새삼스러운 눈길을 보내며 한마디 던지는 남편이 공연히 원 망스럽기까지 했다. 열한 살 위인 남편은 점잖고 의젓한 중년의 신사로 모양새 가 잡힌 데 비해 남숙은 아직 앳되고 생기찬 이목구비에 눈화장을 하면 발랄해 보이기까지 했다. 포도송이처럼 짙은 눈동자가 백 미러에 불안하게 반짝거렸다. 어디가 아프기라도 하냐는 남편의 물음에 남숙은 사장을 만날 일을 생각하니 긴 장이 된다고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그녀는 성욱에게 전화조차 걸지 못하 는 처지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남숙은 핸들을 잡은 기름진 남편을 슬금 쳐다 보며 이럴 때 성욱이었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고 상상해 보았다. 모든 것이 부질 없는 일로 생각되어 괜히 한숨이 길게 새어나왔다. 한센 호텔의 사장을 만나러 가야만 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는 일이었으며 남편은 연회 도중에 아내에게 일임 하고 다른 약속 장소로 나가려했다. 연회가 열리는 호텔의 방켓은 마리의 애인이 샹송을 부르기로 예약되어 있었 다. 마리가 나타나자 남숙은 그녀에게 성욱과의 약속을 들려주었다. 마리는 빙그 레 웃으며 한쪽 눈을 찔끔 감아 보이고는 대신 자기가 그 장소로 나가 성욱을 이 연회장으로 모시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남숙은 알아서 해달라고 마리에게 통 사정을 말한 뒤 겨우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서서히 모임이 시작되고 출입구에 는 인사 교환이 오고갔다. 남숙은 실내에 흐르는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한센 의 사장과 얘기를 주고받았다. 샴페인 잔들이 샹들리에의 불빛에 오색으로 아롱 거릴 때쯤 마리의 애인이 부르는 샹송이 은은히 울리면서 파티의 분위기가 술렁 이기 시작했다. 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남숙은 성욱이 자기를 기다리다 실망을 안고 돌아가는 뒷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나 쉽사리 돌아가지 않고 자기 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마리와 함께 성욱과 약속한 장소로 달려가고 싶 었다. 남편 곁에 서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아내 같아서 그 뒤에 오도마니 서 있곤 하는 것이었다. 마리의 애인은 노래를 부르면서 마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시선으로 더듬으며 찾고 있는 눈치였다. 남숙은 샹송을 부르는 그에게 손짓으로 마리 대신 흔들어 보내주었다. 이따금 마리는 자기 애인이 주간지에 오르는 날 이면 인기인이라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굳이 남숙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내 의 눈을 속이고 이중 생활하는 사람보다 낫다고 마치 남편을 보고 이르는 말처 럼 해댔다. 그녀의 애인이 얼마 전에 이혼을 했다고 했을 때 남숙은 아이의 장 난인 것처럼 이혼을 그렇게 식은 죽 먹듯이 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했다. 그러 나 남숙은 지금 마리에게 그 얘기를 들었다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고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누가 툭, 치는 낌새에 돌 아보니 마리였다. 왜 혼자 왔느냐고 농담 삼아 물었다. 마리는 성욱이 약속 장소 에 여태 나타나지 않았다며 무슨 남자가 그렇게 시시하냐고 입을 실룩거렸다. 남숙은 변명의 전화 연락조차 안 해주는 그가 원망스럽기까지 하여 그 이후 덴마크의 그의 기숙사로 편지를 하려다가도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그만 두었다. 성욱의 엽서에는 얼마 후에 한국으로 나갈 것 같다고 짧고 평범한 내용이 적 혀 있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한센 호텔에서 숍을 가질 터이니 그 곱슬머리 를 모양 나게 만져주겠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떠올랐을 것이었다. 그도 지금쯤은 호텔에다 엽서를 띄우면 연락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던 모양이라고 남숙 은 생각했다. 성욱이 온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지만 그 사실은 그녀 에게 기쁨으로 꿈틀거리며 출렁였다. 파리에서 그와 경험했던 일은 한바탕의 아 름다운 꿈이려니 생각하고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추억만일 수 없는 성욱에 대한 집념은 그녀에게서 쉽게 물러가지 않고 있었다. 마리가 주미셀로 찾아온 것은 뜻밖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한센 호텔의 초청으 로 그녀의 애인이 서울에 와서 샹송을 공연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벌써 그날이 되었는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마리는 남숙을 보자 반가운 나머지 얼 싸안으며 눈물마저 글썽였다. 그녀는 남숙을 부러워하며 선배는 여권 신장의 자 리를 굳혀가고 있는데 자신은 답답하고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고 말했다. 마리의 얘기는 어디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유머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녀는 벌써 사 랑을 잉태했으니 요번 공연이 끝나는 대로 이 호텔에서 결혼식까지 끝내고 파리 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하며 커다란 입을 벌리고 웃는 것이었다. "안 나오던 여드름이 뒤늦게 나오지 뭐예요." 하며 행복이 가득한 얼굴로 이마에 솟아난 여드름 한 개를 가리켰다. "언니! 사실은 말이에요, 더 중요한 게 있어서 이렇게 왔어요. 중요한 건 내가 아니란 말예요." 마리는 눈을 반짝거리며 남숙의 코앞에 그녀의 이마를 바싹 들이댔다. 남숙은 어떤 예감이 왔다. "나에게 중요한 건 일뿐인데 도대체 무엇일까?" 남숙은 시치미를 떼는 척했다. 그리고 마리는 모른 척하였다. 남숙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비밀조차 알아맞히는 마리였다. "언니에게 누가 있수? 그래! 그 사람?" 답답하게 속 시원히 말하지 않고 그 사람으로 그냥 가리키는 마리가 야속한지 남숙은 그만 눈을 흘기고 말았다. 마리가 호텔 룸으로 올라가면서 그의 편지 봉투를 손에 쥐어주었다. "성욱 씬 벌써 여기에 온 지 열흘이나 지났을 거예요. 파리의 오를리 공항에서 만나 동경까지 함께 온 걸요. 글세, 세상은 참 좁죠?" 마리가 동경에서 열흘이나 묵었다면 그는 이미 열흘 전에 한국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성욱은 그녀가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 다. 남숙은 긴장한 팔을 풀면서 편지 봉투를 뜯는다. 몇 번이나 파리로 연락 드렸으나 편지는 되돌아오고 전화는 받질 않으시더군 요. 아버지께서 운명하셨기 때문에 지금 다소리 농장으로 갑니다. 파리에서 마지 막 약속은 전적으로 제 잘못이었습니다. 용서 빌 기회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변 명이라도 듣고 싶지 않으신 지요. 기다리겠습니다.... 남숙은 직원들이 퇴근을 한 뒤에도 숍에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마주 보이 는 거울 속에는 고객들의 요구와 개성미를 창조하기 위하여 한치의 소홀함 없이 일하는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있다. 그러나 지친 모습이었다. 천장을 아 늑하게 비워주는 조명들이 꺼진 탓인지 여자의 얼굴빛은 어둡고 처진 모습이었 다. 시름겹도록 짐을 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앳되고 싱그러운 살결은 시달린 자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것이었다. 서른 중반을 달음박질하며 일하는 로봇이 그녀 앞에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다. 못박아 세운 듯한 표정 잃은 얼굴 모습과 파리에서 성욱과 마주치던 그녀는 서로 두 인격체로 여겨졌다. 생명 없 는 고체와 향기로운 장미와 같은 여인의 두 형상이 겹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혼 자 남는 고요한 시간에 젖어들면 으레 찾아오는 성욱에 대한 절박하고 감미로운 그리움이 그녀를 위협했다. 그 집념은 끊임없이 솟구쳐서 때때로 그녀를 우울하 게 만들기도 했다. 그녀는 마리가 전해 준 성욱의 편지가 그녀에게 내일의 삶을 활짝 열리게 하는 응답이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전화 다이얼을 장성욱에게 돌 리고 있는 것이다. 그건 아직도 법이 아니라 지은이 조혜경 "또 무가당이구먼. 너무 떫은걸." 최찬섭 교수는 찻잔에서 입을 떼고 세정을 바라보았다. 단 한 수저의 설탕인 데도 그것을 넣지 않았다고 단박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사모님이 신신 당부하셨어요. 전 몰라요." 세정은 자기 몫의 커피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자꾸 이러면 나, 식당에 가서 사 마실 테야. 정 선생이 타주는 맛에 여기서 마시는 건데." 최 교수는 찻잔을 든 채 아이처럼 투정했다. "사실 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건 저도 이해 못해요. 그냥 분말도 아니고 잎 차를 말이에요. 그게 설탕물이지 뭐예요?" "그래도 습관이 된 걸 어쩌나. 정 선생이 블랙 커피 마시는 거야 노처녀가 살 안 찌려고 그러는 거지. 차는 즐기는 거예요. 음식도 아니고 약도 아냐." "어머나, 선생님. 노처녀 얘긴 또 왜 나오나요. 차 끓여드리는 봉사를 하면서 그런 소리까지 듣다니요. 억울해요. 다음부터 설탕을 듬뿍 넣어 드리지요. 사모 님이 뭐라시건 상관 않고." "흥. 둘이서 짜구. 집사람도 그래. 당뇨라니까 단 것만 무서워하는데 무지해서 그래요. 단 것보담도 더 조심해야 할 건 기름기라고." 마지못해 한 모금 넘긴 최 교수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은 마치 맛있는 과자를 빼앗긴 어린아이와 같았다. 나이가 들면 아이 같아진다더니 저렇게 섭섭하실까, 세정은 웃음이 나왔다. 그는 정년 퇴임을 몇 년 남기지 않고 있었고 그의 건강만이 부인에겐 큰 걱정거리였다. 얼마 전 소변에서 당이 체크 되면서부터 부인은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학교에서 종종 교수를 위해 차를 끓 이는 세정에게 당뇨병이 얼마나 까다롭고 위험한 병인가 누누이 설명하며 교수 식당에서의 커피 타임까지 감시하도록 당부했다. 최 교수도 은근히 신경은 쓰이 는지 단 것은 줄이려 하는 편이었다. 창가의 난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는 쓰다, 떫다 하면서도 한 잔의 차를 다 마셨다. 그는 그 시간에 또 들어서고 있었다. 난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시 간 속에. 교수의 규칙적인 생활 중의 한 순간이었다. "담배가 몸에 해롭다, 해롭다 해서 피를 말려가며 끊었더니 원, 피가 지나치게 산화했나? 이젠 당뇨가 뭐야? 에이, 늙으니까...." 교수는 난에다 그윽한 시선을 묶어놓은 채 계속 투덜거렸다. 서너 평 남짓한 좁은 교수실을 잠시 채웠던 차 향기가 은은한 난향과 함께 섞였다. 난은 얼마 전 꽃망울을 틔웠다. 줄무늬가 있는 연자줏빛 조그만 꽃망울들이 서너 개씩 이 어서 조금씩 입술을 벌리더니 어느 날 아침엔 느닷없이 온몸을 벌리고 훈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교수는 마치 예쁜 첩을 새로 들인 한량처럼 시간이 날 때마 다 거기에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다. 교수는 난광이라고 할 만했다. 그의 집엔 아 예 난을 키우는 방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막내딸이 끝으로 출가하자 그 방을 난으로 채워 새로 얻은 자식 기르듯했다. 서양 난은 혼란스럽다고 보지도 않고 까다로운 동양 난만 취급했다. 세정은 교수의 집을 자주 드나드는 편이었으나 최근까지도 난에는 무관심했었다. 교수가 난이 있는 방을 조심스레 열고 구경시 켜 주어도 팔자 좋은 화초거니 할뿐이었다. 교수는 앵글 위에 나란히 놓인 난들 을 가리키며 새겨들으라는 듯이 말하곤 했다. "저걸 얻으려고 친구놈들이 갖은 주접을 다 떨어요. 난이 비싸다는 얘긴 어디 서 주워듣고는 키울 줄도 모르는 놈들이 욕심은 많아서." 그러나 두 해 전인가 교수가 난 화분을 하나 교수실로 내오고 난 후로 세정은 난에 대해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맨 처음 그녀는 잡초와 설난도 구분하지 못했지만 점차 한란과 풍란 등을 구별하다가 다음에 선옥이니 뭐니 하며 좀더 자세히 알아보게 되었다. 그 선옥이 바로 교수실로 수청들어 와 있는 난인데, 보 면 볼수록 욕심이 생기는 거였다. 교수에게 난은 존재의 가장 단아한 형상이지 미의 완성이었다. 붓끝으로 그려놓은 듯 곧게 뻗어나가다 살짝 뒤튼 듯한 잎사 귀하며 어느날 느닷없이 망울져 올라온 꽃하며, 게다가 그 향기란. 그래서 언젠 가는 그 화분을 얻으리라 내심 맘먹은 종이었다. 물론 난 얘기만 나오면 입도 뻥긋 못하게 하는 그였지만 사랑하는 수제자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온 그의 말 값으로라도 떼를 써볼 생각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건강하시잖아요? 조심하시라는 뜻으로 생각하셔야죠." 세정이 교수 앞에 놓인 빈 찻잔을 거두어가며 말했다. "에이, 들렸어. 작년 같지 않아." "어머나, 별말씀." "별말씀이라니, 뭐가?" 교수가 세정에게로 안경 위의 시선을 보냈다. "건강이 작년 같지 않다 하셨잖아요?" "내 건강이 아니라 이놈의 건강 말이요. 이놈." 그가 난을 가리켰다. "아." "꽃망울이 작아. 작년 같지 않아." "잘 모르겠는데요. 설마 꽃망울이 작아졌다 커졌다 할라고요." "모르는 소리. 해마다 다르다고. 확실히 향기도 덜 해." "향기도 여전히 좋아요." 최 교수는 이미 세정의 말을 듣지 않고 있는 듯했다. 난을 골똘히 바라보던 그가 단호히 말했다. "최루탄 때문이야." "네? 최루탄이요?" 세정이 푸훗, 하고 웃었다. "그 가스에 중독이 된 거야. 그래서 이 애가 병들고 있어. 안되겠어. 집으로 가 져가야지." "어머, 안 돼요." 세정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딸그락, 하고 세면대에 내려놓았다. "왜?" "그거 저 한 촉 주신다고 했잖아요?" "이게 그리 쉽게 새끼를 치나? 분갈이할 때 보자구." "그래두 벌써 몇 해째를 잘 견디고 있잖아요? 최루 가스가 여기까지 올라오려 면 독기가 다 빠져 괜찮을 거예요." "집으로 가져가야겠어." 교수가 다시금 말했다. 세정은 찻잔 위로 수도꼭지를 틀었다. 집으로 가져가야겠어.... 그 소리는 마치 교수가 '난 집으로 가야겠어. 은퇴해야겠어.'라고 말하는 것처 럼 들렸다. 그는 강의하는 도중에 밖에서 징소리, 북소리와 함께 구호소리가 들 려오면 더 목청을 높이는 사람이었다. 학생 두 명을 놓고 100분 강의를 마치던 그였다. 그러던 그가 지금은 난 한 촉 앞에서 은퇴 성명을 연습하고 있는 것처 럼 보였다. "사람 또한 나이가 들면 이 정도의 품위는 지켜야 하지 않는가." 학생들의 수업 거부로 결강을 하게 되거나 혹은 시험을 치를 수 없게 되어 빈 시험지 뭉치를 세정으로부터 건네 받으면 그는 난을 보며 시름에 찬 말을 던지 곤 했다. 그의 난 취미가 각별한 것을 아는 학보사 기자 김정수는 짓궂게도 자 기는 질경이 꽃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 가끔 학교 신문에 그의 이름으로 실 리는 글들을 보면 꽤나 급진적이다 싶은 데가 있어 질경 운운의 속뜻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퇴근 안 하나? 정 선생." 교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회전 의자가 빙그르르 돌다 반동으로 벌떡 젖혀졌 다. "난 교무처에 들렀다 가야겠어." "여기 좀 있다 갈게요." "가습기는 한 30분쯤에 맞춰 두고." "알았습니다." 교수가 방을 나갔다. 세정은 소소한 뒷정리를 하고 가습기의 타이머를 맞춰 놓았다. 난은 건조한 공기를 싫어한다고 했지. 직사광선도 질색이고. 참 까다롭 긴 까다로운 화초군. 김정수가 삐딱한 눈으로 꼬나볼 만해. 그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화초 하나조차도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소유하는 게 아닐까? 그 에게 질경이는 들길에 홀로 피어 오가는 이들의 발에 밟히며 사는 식물이고 이 는 두말 할 것 없이 압박 받는 민중의 상징인 것이다. 그러나 세정은 그 이분법 적 사고가 맘에 들지 않았다. 난은 이거, 질경이는 저거, 하는 도식적인 해석보 다는 보다 아름다운 시적 정서로 승화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만약 그가 이 념의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라면 온 세상의 난이란 난은 다 목을 비틀어 놓을 것 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질경이는 질경이고 난은 난이지." 세정이 창가의 난에 눈을 둔 채 중얼거리고 있을 때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났다. 그녀는 소파에서 몸만 돌려 문이 열려 있다고 큰소리로 말했다. 문고리 돌 리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2학년 강인환이었다. "아, 웬일이야?" "혼자 계시는군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조금 웃어 보이는 입가가 왠지 굳어 있었다. "선생님 방에 갔더니 안 계시더군요. 그래서 이리로 와 봤죠." "내 방에? 왜?" "최 교수님은 어디 가셨어요?" 그가 곁눈으로 최 교수의 빈 책상을 바라보았다. "응. 퇴근하셨을걸? 왜?" "뭣 좀 여쭤보려구요, 선생님께." "나한테?" 세정이 의외라는 듯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네." "앉아. 여기서 얘기하지, 뭐." "선생님 방으로 갔으면 좋겠는데요." "무슨 예긴데...." 세정이 안경을 밀어올렸다. 전번 '양자역학' 리포트라면 그는 A플러스를 받았 는데....자리까지 옮기며 하자는 이야기가 뭘까. 인환은 얼마 전 집 앞 버스 정류 장에서 우연히 만난 뒤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학생이었다. 통근 버스 를 놓쳐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가 만났는데 알고 보니 서로 집이 가까웠다. 나 이와 외모에 비해 묵직한 느낌을 주는 그가 세정은 맘에 들었다. 한번은 화학 실험실에서 알코올 램프에 물을 끓여 봉지 커피를 타 마시고 집에 같이 간 적도 있었다. 이야기는 주로 전공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 가지, 뭐." 세정은 가습기를 확인하고 교수의 방을 잠근 후 복도를 나섰다. 대부분의 교 수들이 퇴실을 해서인지 회관은 조용했고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세정의 방은 3층 구석에 있었다. 전임 강사 자리와 함께 얻은 방이라 입 실한 지 얼마되지 않아 정리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자, 들어와.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아 어수선해." 책상 위에 한쪽으로 밀어 놓은 빵과 우유가 보였다. 최 교수와 식당에서 같이 카레라이스를 들었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은 그녀의 점심 식사였다. "빵 먹을래?" "네." 자나가는 듯 물은 말에 서슴없이 대답하는 인환을 보고 세정이 웃었다. "사양할 줄도 알아봐. 재차 권하는 맛도 괜찮으니까." "배가 고프기도 한걸요." "어머, 왜?" 세정은 작은 탁자 위에 빵과 우유를 갖다 놓았다. "점심을 걸렀어요." "웬일이야? 한창 먹을 나이에 끼니도 거르고." 인환은 카스텔라 봉지를 들고 우적우적 먹기 시작했다. 세정은 우유의 팩을 먹기 좋게 뜯어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 인환의 머리칼이 탐스럽게 흘러내렸다. 윤이 나고 부드러워 보였다. 린스까지 했나봐.... 그리고 보니 그는 옥수수 수염 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인환 씨가 내게 무슨 용건이 있으실까, 응?" 그녀는 책상 위를 정리하는 척 왔다갔다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인환은 빵 과 우유를 다 먹고 남은 껍질을 쓰레기통에 얌전히 넣었다. 세정은 책상 의자에 걸터앉아 이제 말해 보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인환이 손수건을 꺼내 입가의 우유를 닦았다. 세정은 오, 그래? 하듯 눈을 크 게 뜨며 웃었다. 순간 그녀는 그의 부탁이 예사롭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 과 그럴 것이라는 예측 때문에 바싹 긴장했다. 인환이 후딱 빵과 우유를 먹은 것도 실은 어려운 부탁을 하기에 앞서 마음을 가다듬으려는 시간 벌기가 아니었 을까 싶었다. "무슨 부탁? 혹시 데이트 신청?" 세정이 지레 웃었다. 인환도 따라 웃었다. "데이트 신청이라면요?" "나쁘지 않지." "아, 참 정 선생님은 왜 아직 결혼 안 하십니까? 어머니랑 두 분만 사신다면서 요?" "대단한 분 고르시느라구...." 둘은 다시 웃음을 지었고 조용해졌다. 짧은 침묵이 뒤를 이었다. 세정은 계속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두 손을 비벼댔다. "말해 봐, 이제." "좀 급한 일 때문에 왔어요." "응." "사학과에 다니던 3학년 고윤이라고 아시는지....." 세정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로 저었다. "왜, 학교 신문에 식민지 사관에 대한 글을 썼던 학생 말입니다." "아, 무슨 사학회 회장 말야?" "아시네요." "그 학생이 왜? 아마 제적당했지?" "지금 수배 중이죠. 국보법 위반입니다." "국보법? 그럼 국가보안법? 그런데?" "피신다니고 있어요. 지금 제 집에 있습니다." 순간 세정은 입을 다물었다. 왠지 소름이 끼치고 뭔가 무서운 것이 가까이 다 가와 너울대고 있는 것 같았다. 인환은 그녀의 표정을 이미 예감했다는 듯 개의 치 않고 말을 계속해 나갔다. "근데 제 집에 더 있을 수가 없게 됐습니다. 또 한 친구가 좀전에 잡혀 들어갔 는데 고윤 형의 소재를 알고 있습니다. 오늘내일 사이에 그 사실은 알려질 겁니 다. 그러면 더 이상 그는 갈 곳이 없어요. 지방에 있는 친지에게 연락을 했는데 이삼 일 시간이 필요해요. 고윤은 얼굴이 워낙 잘 알려져서 함부로 움직이기도 나쁘고...." 세정은 무엇에 쿡 찔리기라도 한 듯 움찔 몸을 떨었다. 이야기는 다 나온 것 이나 다름없었다. 조금 전 그는 어머니와 둘이서만 사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 듯 물었다. 그리고 그와 세정의 집은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다. 이삼 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정은 더 확실한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꼼짝 않고 그를 바 라보았다. 그러면서 문득 여러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것은 영화에서 본 많은 장면들이었다. 피신하는 유태인, 피신하는 항일 투사, 피신하는 레지스탕스, 숨겨주는 사람들, 수색, 체포, 고문.... 인환은 말을 멈춘 채 잠시 딴 생각에 빠진 듯한 세정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세정은 모기소리만하게 말했다. "이삼 일 간만 몸을 피해 있을 곳이 필요합니다. 내일 아침쯤이면 제 집에 형 사들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오늘 밤 안으로...."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내일 아침쯤인지." 세정이 말을 가로챘다. "그냥 집시법 위반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고윤 형과 연결되려면 시간이 좀 걸 리거든요." "계속해." "그래서 오늘 밤 안으로 어디 자리를 옮겨야 하는데 웬만한 데는 지금 좌악 깔려 있고.... 그래서 정 선생님네를 생각해냈습니다." "우리 집에 숨겨주자고?" "네...." 세정은 안경을 천천히 벗었다.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따가웠다. "안경 벗으신 게 훨씬 좋군요. 딴 사람 같아요." 인환이 갑자기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제를 잠깐 다른 곳으로 돌리자는 듯이. 마치세정에게 시간적인 여유를 주겠다는 의도 같았다. 그래? 하고 웃으며 세정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교수 회관 뒤뜰에는 잎이 무성해진 나무들과 벤치가 여름 초입의 서늘한 저녁 빛을 담고 있었다. 세 정이 학생일 때만 해도 키 큰 은행나무와 자작나무, 살구나무의 작은 숲을 이룬 이 뒤뜰은 캠퍼스 내의 여러 휴식처 중의 하나였다. 교수 회관이 올려다 보이는 이 숲은 가을이면 노란 은행과 단풍이 색을 다투어 떨어져 학생들의 대화와 토 론과 웃음소리의 광장이 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학교 내 분규가 심화되고 문리대 앞 농성장만 매일 들끓다시피 하면서 그 숲은 점차 발길이 뜸해지고 말 았다. 재미있는 대화도 진지한 토론도 결코 거기까지는 들릴 리 없는 교수 회관 때문에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버려진 숲속의 빈터를 세정은 안경 벗은 어릿어릿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마 전 친구인 희숙과 통화하던 생각이 났다. - 느이 대학 애들도 어지간하더라. 전날 거기 지나오다 죽는 줄 알았어. 최루 탄 냄새가 사거리까지 나서 우리 향이가 눈도 못 뜨고 울었지 뭐야? 향이는 희숙의 5살 된 딸 아이 이름이었다. - 여기라고 조용하겠니? - 맨날 화염병만 던지면 뭐해? 나오지도 못할 꺼. 전경들이 무슨 죄냐? - 똑같지, 뭐. 전경애들이나 학생애들이나. - 장사가 돼야 말이지. 도대체 교수들은 뭐하는 거지? 학생들 비위 맞추는 얘 기나 하고 말야. - 얘가 또 누굴 갖고 그래? - 신문에 쓰는 거 보면 몰라? 인기에 급급해서 돼먹지 않은 이론이나 늘어놓 구. 너두 강의 시간에 선동하냐? - 화학 원론 가르치는 사람이 무슨 선동이냐? 희숙은 무척 흥분해 있었다. 그런 세태에 대한 심오한 고찰이나 의식 때문이 아니고 다만 그놈의 학생들 데모에 장사가 안돼서였다. 그녀는 남대문 상가에 점포 하나를 빌어 아동복 장사를 하고 있는데 데모만 했다 하면 교통이 막히고 손님이 끊어져 파리 날리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거였다. 희숙이 장사 때문 에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입장과 다르게 세정은 자신의 전공이 순수 자연과학이라는 점에서 날아오는 최루탄의 각도를 많이 비껴나 앉아 있었 다. 소위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아름답게 느낄 만한 거리가 필요하듯이 이 복잡 한 세태는 그것을 바로 볼 만한 거리가 필요함을 느꼈고 그 거리의 적당한 시점 을 그녀는 자신의 전공에서 찾았다. 물론 그녀도 때로는 현 시국이나 학생 운동 에 대한 관점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는 때도 있긴 했지만 그 어느 쪽도 피부를 뚫고 심장에 깊이 와 닿지 않았다. 그러한 그녀를 두고 누구는 정치적 진화가 덜된 상태라 했고 누구는 핏속 헤모글로빈의 색깔이 푸르기 때문이라고 놀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에게 절실했던 것은 몸이 불편한 홀어머니를 모신 가장으 로서 확실한 직업적 안정이었다. 이 대학 저 대학을 시간 강사로 뛴 보따리 장사를 이제 겨우 면하지 않았던 가. 나이 서른 셋에 이제 겨우 전임이 된 처지가 아닌가. 나라의 장래도 중요하 고 자신의 결혼도 중요하지만 기왕 정년 퇴직까지 교직에 충실히 종사할 양이면 강의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다. 그런고로 그녀는 학생들이 이 시대 에 있어 화염병의 의미도 알아야 하지만, 또 화염병을 만들 때 섞을 신나의 비 율도 알아야 하지만 그 화염병이 날아가 불태우는 것은 그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군부 독재의 소맷자락 한오라기도 아니고 단지 전경의 두툼한 전투복일 뿐이며, 게다가 특히 자기가 맡은 화학과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덧붙여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어떤 물체가 불에 탈 때 그 이전까지 생각해 온 플 로지스톤이 없어도 불은 탄다는 리브와지에의 이론도 알아야 한다고. 그러나, 하고 세정은 다시 시선을 돌려 안경을 썼다. 지금 일부 운동권 학생 들의 투쟁 양상이나 방법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때보다 더 긴박하고 현실적인 요 청이 자신 앞에 와 있는 것이다. 숨겨달라.... 그건 이제 법적으로 '은닉'이었고 잘 하면, 필요하다면 두세 가지 위법 사실이 더 연루될 수도 있었다. 너무 극단적으 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 극단이 아주 흔해진 세상이었고 더군다나 대학 강사 라는 직업은 이야기 엮기에 아주 좋은 소재였다. 세정은 곤혹스러움에 앞서 짜 증 비슷한 답답함이 일었다. 이런 어려운 자리에 있는 자신에게 어떻게 그런 위 험한 일을 부탁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내가 사촌 누나라도 된단말인가? 자신 은 그 고윤이라는 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인환과도 결코 가깝다 할 수 없는 사이인데다 그들과는 조직적 연관은커녕 사상적인 유대감조차 없는 사 람이 아닌가. 그런데 일이 잘못되면 별 관계없는 남조차 현행법의 위험한 수렁 으로 빠뜨릴 수 있음을 그들은 왜 모른단 말인가? 대학 동창이며 시를 쓰는 한 남자 친구는 한밤에 찾아온 도피 인사에게 삼만 원을 건네주었다는 사실만으로 도 자금 조달죄로 잡혀가지 않았는가. 허름한 차림에 피곤해 보이는 친구에게 준 단돈 삼만원이 그 도피 인물의 공작금으로 둔갑해 치죄의 증거물로 제시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는 수배자의 친구라는 도덕적 원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는 무언가? 얼굴도 모르는 위험한 수배 인물을, 그것도 일 계급 특 진에 백만 원 포상은 기본으로 붙어 있을 핵심 인물을 숨겨달라니. 그러나 답답 함을 목구멍 밖으로 내놓지 못한 채 세정은 인환을 바라보았다. "인환인 그 학생과 같은 조직인가?" 세정은 자신이 꺼려 왔던 말, 마치 좌경 조직의 준말 같은 조직이란 말을 내 뱉었다. 그러나 인환의 느낌은 다른지 그냥 범상한 표정으로 고개만 저었다. "그 형은 제 고교 선배입니다. 동문회 때 알게 되어 가까워졌죠." "그런데, 왜...." "왜라뇨?" 왜 거기에 끼여드느냐는 질문이었는데 인환은 힐난하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들에겐 그들의 조직이 있을 것 아냐?" "아, 그 사학회 말이군요. '조선사학회'라고, 아세요?" "몰라." "그 친구들 다 들어갔는걸요. 형이야 많이 살지 않겠지만.... 오늘 또 들어갔잖 아요. 그래서 급하게 된 거죠. 누가 있어야죠." "그런데 왜 인환이가 끼여들어? 다치면 어쩌려구." "고윤 형이 저희 집에 일주일이나 있었지만 아무 일 없었어요." "어떤 일이 있을지 누가 알아?" "그럼 어떡합니까? 고윤 형 정도면 잡히자마자 칠성판 위에 누울 텐데요." 필성판.... 칠성판이 무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맨 처음엔 나름대로 칠성이라 해서 거기에 올라가면 별이 일곱 개나 보인다는 뜻인 줄 알았더니 일곱 개가 아 니라 칠천 개도 더 보이는 지옥행 널빤지인 모양이었다. 그에 비하면 진짜 칠성 판은 그야말로 천국행 스케이트보드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난 학생들이 그런 활동하는 거 비난하지 않아.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각자 의 신념에 따라 하는 것.... 하여튼 그런 활동하는 사람들은 그렇다구 쳐. 옆에서 이렇듯 피해 보는 사람은 뭐야? 내 생각은.... 그가 진정한 투사라면, 자기 나름 대로 확고한 이념의 소유자이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려고 결정한 사람이라면, 그 는 피하고 다니지 말아야 해." 순간 인환이 고개가 위로 치켜지는 느낌을 송곳이 날아오듯 날카롭게 전해 받 았다. "그가 얼마나 탁월한 운동가인지는 몰라도 그가 진짜 자기의 삶을 던져 행동 한다면 구태여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훼손시키면서 구차하게 피해 다니면 안 된 다고 생각해. 그가 진정한 투사라면. 그런데 대부분은 안 그렇거든. 그런 자는 보호받고 숨겨지고 애꿎은 추종자들만 인생이 거덜나도록 피해를 받거든." 어디 한 번 말 좀 해봐, 하는 식으로 세정은 인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다소 가쁜 숨을 내쉬며. 그녀는 마치 방탄용 조끼라도 입은 것처럼 든든하면서도 답 답했다. 아니, 답답하면서도 든든했다. 인환이 주먹으로 누르고 있던 입을 뗐다. 그리고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무섭습니다. 마치 알루미늄으로 된 가슴 같아요.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인환은 진저리가 쳐진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내 말은, 그가 새로운 시대의 새 질서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려면 입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지. 더구나 남의 등뒤에서 말야." 세정은 마치 인환에게서 분노로 폭발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는 요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하긴 그는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없을 만큼 화가 나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전신으로 참고 있는 듯 했다. 원래 성격이 그런가. 무섭도록 침착해 보였다. 세정은 현실적으로 가장 걸 리는 점을 이야기했다. "게다가 우리 엄만 심한 협심증이야." 인환이 시선을 약간 누그러뜨리고 그러나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시다면.... 그렇게 말씀하시면 됐지...." "그럼 핑계가 되지 뭐야? 그리고 아무리 심각한 사실이라 해도 그 사회 정의 를 위해 싸우는 투사의 위급함에 비하면 유치할 만큼 사소한 거지. 너희들은 그 렇잖아? 어떤 늙은 여인의 협심증 따윈 민중의 해방을 위해 전혀 중요하지가 않 지...." "그렇지 않아요. 그냥 다함께 치러야 할 고통이나 압박으로 생각하는 거지요. 역시 제도 언론 덕이 크군요." 둘은 잠시 시선만 교환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인환이 그녀의 시선 속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곤 가슴의 펜을 뽑아 뭔가 써 서 부욱 찢었다. "저희 집 전화번호입니다. 11시까지 전화 기다릴께요. 그 이후로는 집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어요." 그는 일어섰다. "하루라도 좋아요. 오늘 밤이 고비죠." 잠깐 침묵의 마침표를 찍은 후 그는 방을 나갔다. 세정은 기가 막혔다. 어쩜 그런 소리까지 듣고도.... "무얼 찾으세요?" 다정한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렸다. 세정은 고개를 들고 진열장 건너편에서 함 빡 웃고 있는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장신구의 진열에 어울리는 짙은 화장의 여인이었다. "아, 목걸이요." 세정은 엉겁결에 대답하고 다시 진열장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비로드 천 위에 는 여러 가지 목걸이들이 어지러울 정도의 광채를 발하며 진열되어 있었다. 세 정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이 진열장 앞에 십 분도 넘게 서 있었고 방금 다른 고객과 흥정이 끝난 젊은 여자가 이제 자기에게로 다가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사람들이 북적대는 백화점의 잡화부를 이곳저곳 돌다 마침내 장신구 코너 앞에 와 붙박아 선 것도 이유가 있긴 했다. 그녀는 액세서리의 '액'자도 모르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결혼한 친구들이 맵시 나게 끼고 나오는 다이아 반지나 사 파이어 목걸이 같은 것을 보면 왠지 그 반짝거림에 압도당했고 요즈음엔 캠퍼스 내 여학생들이 끼고, 걸고 다니는 싸구려 장신구까지 기를 죽였다. 그래서 그녀 도 노상 입는 흰 가운이나마 그 파여진 목덜미 위로 품위 있게 반짝거리는 목걸 이 하나 정도는 걸고 다녀야겠다고 맘먹던 중이었다. 그런 잠재 의식이 있다면 조금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계획 없이 버스에 오르고 생각 없이 백화점에 들 어와 넋놓고 바라보고 있을 까닭은 없었다. 단지 귀가를 늦추고 싶은 이유 외에 는. "한 번 보실래요?" 여자가 세정이 눈길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손을 가져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 여자가 몸을 수그리고 새끼줄처럼 꼰 목걸이를 꺼냈다. 장밋빛 매니큐어를 칠 한 가는 손가락 사이로 섬세한 세공의 금줄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세정은 가방 속의 크레디트 카드를 떠올렸다. 동시에 그 속에 같이 섞여 있을 작은 메모 쪽 지도 생각해냈다. 정신이 약간 어찔했다. 그녀 머리 속 일곱 개의 숫자가 다 수 갑을 차고 있었다. '오죽 급하면 내게로 왔을까. 그러나 그는 지금 내게 얼마나 무리한 부탁을 하 는지 알고나 있는 것일까? 내가 쌓아온 대학에서의 십 년은 거저 생긴 것이 아 니야. 그것을 한숨에 무너뜨릴 수도 있는 것을 지금 너희들은 시키려 하고 있다 고. 너흰 무언가를 잃기에는 너무 젊고 풍요하다. 아무리 다치고 상처를 입어도 너희들의 젊음을 더 찬란하게 만들뿐이다. 마치 거친 원석을 깎아내는 아픔처럼 창조적 파괴의 눈부신 제련이 있다. 하지만 난 안 그래. 나에겐 그냥 파손일 뿐 이다.' 이미 목걸이는 목에 걸쳐졌고 여자가 거울을 들이밀었다. 안경 속의 지친 눈 알이 거울 위로 생동하니 떠올랐다. 세정은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노르스 름한 줄이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살결이 희셔서 아무거나 다 잘 받으시네요." 여자는 이 나이 먹어 보이는 손님의 유일한 포인트를 재빨리 간파하여 말했 다. 그건 맞는 말이지.... 사실 서른이 넘은 노처녀로서도 쉽게 아가씨 소리를 듣 는 것은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흰 살결 덕이 컸다. "금이에요?" 세정이 어정쩡하게 물었다. 금이라는 금속 원소에 대해 그녀가 알고 있는 건 은 간단했다. 원소 기호 Au. 산에 닿아도 녹지 않고 유황에 닿아도 색이 변하지 않지. 왕수에는 녹고. 그러나 장신구로 만든 것에 대해선 이게 도금한 것인지 뭔 지 잘 알 수가 없다. 현란한 조명 때문에 더했다. "18k예요." 여자가 화장만큼 짙은 웃음으로 말했다. 18k라면 내겐 좀 가벼운 느낌이 들지 않을까. 나이도 있고.... "금은 없어요?" 여자가 미소를 반쯤 거두고 진열장 한쪽을 가리켰다. 거리에는 좀더 노란빛이 짙은 목걸이들이 놓여 있었다. 조금 무게가 나가 보였다. 세정이 그 중 하나를 가리켰다. 여자가 그것을 꺼냈다. "요즈음은 이런 거 잘 안 해요. 촌스러워서요." 마치 자신보고 촌스럽다고 한 것 같아 세정의 얼굴이 뜨뜻해졌다. 돈 받고 팔 면 됐지 무슨 상관이람.... 촌스러워도 내가 촌스럽지. "요즈음은 아주머니들도 14k같은 걸 찾는걸요. 더군다나 아가씨들은.... 세정은 순금 목걸이를 슬그머니 놓았다. "촌스럽고 비싸고 게다가 순금은 약하지요." 여자는 순금에 대해 반감이라도 가진 양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24금이 다 소 무른 것은 세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이 세상의 모든 약한 것에 대한 비난에 금이라고 예외는 아니 라는 투였다. 순금은 약하다.... 세정은 그 말이 대단한 시구라도 되는 양 되뇌었다. "이걸로 주세요." 세정은 먼저 골랐던 18k를 가리켰다. 여자는 백화점을 상징하는 포장지에 목걸이를 쌌고 세정은 카드를 꺼내느라 백 속을 더듬었다. 인환이 준 종이 쪽지가 손끝을 자꾸 스쳤다. 포장된 목걸이가 손에 쥐어지자 세정은 곧 후회했다. 좀더 돌아보고 살걸.... 좀더 시간을 보낸 후 살걸 그랬다 싶었다. 에스컬레이터에 사람이 넘쳐흘러 세정은 계단으로 위층을 향했다. 위층은 가구 전시장이었다. 사람들은 덜 복작거리는 대신 장롱, 소파, 침 대가 위압적인 분위기를 깔며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세정은 천천히 매장을 돌았다. 아무도 다가와 말 시키지 않는 것이 맘을 편하게 했다. 그녀는 널따란 더블 베드 앞에서 마치 시트의 화려한 무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째려보 며 서 있었다. 저 시트는 어떻게 세탁을 하는 것일까. 지금도 이불깃이나 요닛을 뽀얗게 삶아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하는 엄마에게 저 시트는 어떨까 싶었다. 어 떡할까. 엄마에게 사실대로 털어놓고 이해를 구할까. 어느 낯선 청년을 잠시만 숨겨주자고. 그러면 엄만 딸의 화급한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약을 한 움큼 삼켜 야겠지만.... 차라리 힘든 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은 괜히 엄마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그러한 일들이 일상에 어떤 파문을 가져오는지 거의 모르는 편이다. 남산이나 남영동이 무엇을 상징하는 지명인지, 그곳에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그들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사람들이 필요한 사안에 따 라서 어떻게 취급되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고 있었다. 일단 수배자의 이름을 알 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장 없이 구둣발의 가택 수색이 가능하고 영장 없이 임의 동행의 검은 차에 태워질 수 있는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녀도, 그, 주로 유도 선수들같이 생겼다는 수사관들로부터 '년'자 소리 듣고 쥐 터지고 하면 투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은 그런 소릴 들어 귀와 영혼을 더럽힌 일이 다행히 없었다. 아니, 여태껏 남으로부터 야 소리 한 번 안 듣고 살아온 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망설임은 이런 가상적인 공포에서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고 윤을 가슴 깊숙이서부터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가 바웬사의 아들인지, 사하로 프 조카인지, 적군파 아류인지 알 수 없었다. 길거리에서 피를 흘리며 전경들에 게 질질 끌려가는 학생들을 보면 분노도 치솟았고 투표할 일이 있을 때 늘 야당 을 찍는 편이었지만 한쪽으로는 미워하면서 닮는다고 똑같은 증오의 비등점으로 끓어오르는 학생들의 거칠 것 없는 행동이 두렵기도 했다. 그들 중의 다수가 점 점 이념의 파랑새를 찾아 현실을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가 너무 지레 겁을 먹고 있는지도 몰랐다. 고윤은 이 시대가 하도 답답해 뭔가 좀 해보려했던 대학 생에 불과할 뿐이고 한 이틀 그녀의 방에서 조용히 머물다 갈지도 몰랐다. 마 치 먼 곳에서 온 사돈 총각처럼 조심스레 유하다가 늦은 밤 뒷문으로 조용히 사 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나중에 캠퍼스에서 다정하고 은밀한 웃음으 로 지나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하고 세정은 다시 푹신한 레저 소파로 시선을 돌려 노려보기 시작했다. 가격이 백구십오만 원이라고 써 있었다. 이백만 원이라니, 그럼 가죽인가? 소가죽이라 해도 황소 네댓 마리는 잡아야 했겠는 걸.... 그러나 고윤이 그녀로서도 납득할 수 없을 만큼 급진적이라면 위험을 부담 해야 할 명분은 어디 있는 것일까? 명분이라니? 한 사람의 목숨을 백척 간두에 두고 명분이라니? 그러나 아직은 시간이 좀 남아 있으니 잠깐의 명분도 엄마와 자신을 위해 찾아두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골치가 갑자기 지끈지끈 쑤셔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불현듯 두통을 걷어내기에 충분히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세 정이 움찔 놀라며 돌아보자 하얀 반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히 맨 청년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뇨." 세정은 갑자기 땀이 솟고 얼굴이 빨개졌다. "아, 네." 무슨 네인지 우선 대답해 놓고는 청년은 계속 세정을 바라보았다. 마치 소파 에 끌어도 앉히고 사랑이라도 속삭일 듯한 눈길이었다. "소, 소파가 너무 크군요." "아, 네." 소파는 몸을 뉘면 그대로 푸욱 파묻힐 만큼 푹신하고 커 보였다. "이 정도의 소파가 놓일 거실이라면 적어도...." 세정은 친구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평수를 헤아려보았다. 대개 삼사십 평 정도에 사는 그녀들의 소파도 떠올려보았다. 일전에 한 친구가 이제 등의자는 싫증이 나서 레저로 바꾸고 싶다는 소리를 한 기억도 났다. "너무 커요...." "작은 것도 있습니다." 청년은 계속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마도 파장 시간이 되어 매상에 관계없이 느긋한 기분인가 보다 싶었다. "다음에 보겠어요." "네. 그러십시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친절한 대꾸가 곧바로 이어졌다. 세정은 우아하게 돌 아섰다. 버스가 다가왔다. 버스 속은 퇴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설 자리가 넉넉했다. 세 정은 습관대로 운전석 바로 뒤쪽의 좌석에 붙어섰다. 다시 두통이 시작되고 있 었다. '아유, 골치야. 그놈의 두통약을 이젠 아예 백에 넣고 다녀야겠어. 물 없이도 씹어 먹어야겠어.' 저녁을 먹지 않아서 울렁증까지 겹친 것 같았다 .버스가 눈에 익은 거리를 스 쳐 지나갔다. 밤길의 포장 마차들에서 주홍빛 불빛이 새어나왔다. 때로는 천막 위로 술 마시는 남자들의 그림자가 선명히 나타나기도 했다. 그 그림자는 그녀 에게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 빨리 결정을 해. 전화를 하든가, 말든가. 만약 이 시점에서 그를 숨겨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붙잡혀 간 다면 자신은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어떤 죄책감? 친구를 배신한? 동 료를 외면한? 그와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녀는 자신을 영원한 회색주의 자 또는 중도파로 규정해 버린 지 오래였다. 공산주의나 공산당, 하면 머리에 뿔 난 뻘건 도깨비로 확신하는 계층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두세 권의 사회 주의 서적을 읽고는 햄버거 먹은 기름기가 가시지도 않은 입술 위에 레드 콤플 렉스 따위의 매끄러운 단어를 올려놓는 학생들도 이젠 좀 넌덜머리가 나는 편이 었다. 아니, 이제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소리 높이는 집단엔 아예 넌덜머리가 났다. 1987년 6월 28일까지 단 며칠간이지만 거리 시위에 참여해 본 세정으로서 는 그 후에 여러 갈래로 분화되는 시국에 관해선 차라리 이 넌덜머리로 자신을 수습한 편이었다. 그 넌덜머리는 올림픽을 계기로 귀국한 외삼촌과의 만남에선 퇴행성을 보일 정도였다. 외삼촌은 지금은 해외 여행 자유화로 그 이름 듣기가 흔해진 사이판이라는 남 태평양의 한 작은 섬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오륙 년 전 외숙모와 아이 들을 서울에 남겨두고 자신만 달랑 취업을 떠났었다. 거기서의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 식구들을 다 불러들이고 아이들은 미국 본토로 공부 보내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대학가지 나왔으면서 원래 직장에 붙어 있는 성격이 못 되고 남의 대소 송사 뒤치다꺼리에나 능란한 룸펜이었던 그가 외가 어른들의 비웃음 을 사며 떠난 취업 이민이었다. 친구의 호텔 경영과 관계된 사업을 하며 자리를 잡은 그는 가족들의 입국 서류 절차가 끝나가는 중이라고 했다. "살기야 좋지." 어떠세요? 하고 묻는 세정에게 외삼촌은 그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날이 추워 땔감 걱정을 하나, 먹을 게 없어 먹을 걱정을 하나." "그렇지요?" "그렇구말구. 그러니 사람들이 게으르기 짝이 없어." "TV에서 봤어요. 여자들이 굉장히 뚱뚱하던데요?" "결혼 전엔 그래도 괜찮은데 아니 낳기 시작하면 완전 드럼통이 되지. 그저 먹 고 나면 즐기는 거야. 혼전 섹스도 보통이야. 그래서 자기한데 시집온 신부가 자 길 안 닮은 아이를 낳아도 별 상관 안해. 모두 내 아이지." "설마." "설마가 아냐." 외삼촌은 커피 색깔로 그을은 얼굴을 펴고 와핫, 웃었다. 옛날부터 항상 그랬 듯 허풍기가 있는 달변가의 말이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몰랐지만 역시 옛날부 터 항상 그랬듯이 그녀는 좀더, 좀더 하며 이야기를 채근했다. "거긴 빵나무라는 나무가 있어요. 야자수 비슷한 나무인데 거기 열리는 열매의 맛이 꼭 빵 같아서 그렇게 부르지. 크기는 이만한데." 그는 두 손을 벌려 보았다. 시장에서 파는 늙은 호박만한 것일까, 하고 세정은 상상했다. "그 맛이 말야. 꼭 빵이란 고구마 섞인 맛 같아. 그거 하나면 한 끼 식사로는 끽이지. 그런데 도처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거야." "그럼 아무나 막 따먹어도 돼요?" "주인이 있는 건 안 되지. 허락을 받아야 해." 빵과 고구마를 섞은 맛이라면 그건 완전히 크림 타입의 그 뭐랄까.... 그런 맛 일 텐데.... 두 손으로 고인 턱 밑에서 침이 고여 나왔다. 물론 게으르긴 하겠지 만 그리고 단순하겠지만 그 단순함이란 또 얼마나 좋은 걸까? 정말 그랬다. 그 즈음에 세정은 복잡한 것에 넌덜머리를 내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주인 허락을 안 받고 남의 나무에 올라가면 총을 쏘지." 세정의 꿈꾸는 듯한 얼굴에 대고 외삼촌이 총 쏘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총을 쏴요?" "그럼. 총을 쏴서 바다에 버리면 5분 만에 상어가 와서 깨끗이 치워 주지." "아유, 외삼촌도." "진짜야." 상어의 식사 얘기를 하는데도 세정은 너무 재미있는 나머지 손뼉까지 짝짝 쳤 다. 그 폴리네시아 인들의 열도가 마치 낙원같이 느껴졌다. 바보들만이 살 수 있 는 곳 아닌가. 그때 세정은 '허리케인'이라는 영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얼마 전 TV에서 본 영화인데 미아 패로 라는 여배우가 주연이었다. 남태평양 한 섬의 총독 딸로 분한 그녀는 사파이어빛 바다를 배경으로 눈부시게 희었고 상대는 토 속적인 야성의 매력을 발끝까지 지닌 원주민 청년이었다. 미아 패로는 마치 백 색 문명의 상징이라도 되듯 금발에 흰 살결이 희다 못해 탈색되어 보였다. 그러 한 그녀의 박하와도 같은 이미지는 원주민들의 젊은 추장인 청년의 흑설탕과도 같은 살결과 섞여 화면에 녹아나고 있었다. 세정의 기억에 특히 남는 건 원주민 들의 의식 중에서 한 처녀와 춤을 추는 그 청년, 그리고 그 청년을 바라보며 온 몸을 미모사처럼 움츠리는 아니, 점차 숯불처럼 달궈지는 욕망을 그 투명한 살 결 속으로 숨기느라 기를 쓰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때 그녀는 귀빈석의 등의 자 손잡이를 움켜쥔 채 춤추는 청년을 빨려들 듯 바라보고 있었는데 하긴 그 춤 이 허리를 교묘히 비트는 꽤 관능적이 것이긴 했다. 춤 자체가 성행위를 암시하 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청년의 알몸인 상반신이 온통 땀으로 번들거렸고 그걸 보는 세정의 몸까지 전기 오른 듯 저릿저릿했었다. 외삼촌의 말을 들으며 연이 어 떠오른 장면은 그 청년과 산호초가 가득한 남태평양의 바다 속을 잠수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멋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살결도 어지간히 하얀 편이니까.... 그러나 안경은 써야 했다. 그녀는 안경을 안 쓰면 2미터 앞이 잘 안 보이는 근시이기 때문이다. "그 섬 사람들, 정치엔 관심이 없겠네요?" "정치?" 외삼촌은 다시 왓하, 하고 웃었다. "정치의 '정' 자도 모르는 사람들이야. 물론 태평양 전쟁 때는 일본군들이 주둔 하기도 했고 피해도 있었지만 그들의 전쟁은 아니었어. 그들은 그런 거 몰라. 어 찌 보면 행복한 사람들이지." 정말 행복할 거야. 세정은 달리는 버스 속에서 눈을 감았다. 대륙도 아닌 것이 섬도 아닌 것이 이 땅은 왜 이리 복잡할까. 화합과 조화보다는 단일과 획일을 향해 치닫는 우리 들. 소위 그 단일 민족이라는 단일의 시작이 사회적으로는 오히려 단세포와 같 은 마이너스적 기능을 해서일까? 하나에 하나를 더하지 못하고 세포 분열의 이 분법에만 능한 우리들. 종교를 봐. 갖가지 종교가 다 들어와서는 저마다 하늘을 제 켠에 두고 소리 높이지. 정치도 그래. 이쪽이고 저쪽이고 다 민중을 제 켠에 두고 소리 높이지. 버스가 좌회전을 하며 그녀의 동네 쪽으로 진입했다. 두세 정거장쯤 가면 내 려야 한다. 조바심이 쳐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족은 남들과 마찬가지로 일제 36년과 6.25 동란을 겪긴 했지만 비교적 그 역사적 소용돌이의 외곽에 있었다. 자유당 때나 유신 때도 그 정권의 부침이 빚어내는 파문의 끝쯤에 있었다. 그녀 는 인종 분규가 심했던 60년대 미국의 흑인이나 프랑스 혁명 때의 귀족으로 태 어나지 않은, 자신의 평범한 삶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인환이 그녀의 삶을 갑자 기 어떤 꼭지점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밤 그녀는 뭔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 다. 오늘 밤.... 어쩌면 오늘밤이 고비라는 건 인환의 과장일 수도 있다. 내가 아 니더라도 무슨 수가 있을 거야. "다음 정거장은 사거리 앞입니다. 다음 정거장은 사거리 앞입니다." 운전석 쪽에서 녹음된 소리가 들려 왔다. 기계 안내양인 모양이었다. 벌써 거 리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사거리 상가에선 밝은 불빛들이 환히 비춰 나오 고 있었다. 이 정거장에서 그녀는 가끔 인환을 우연히 만나곤 했다. 그의 집은 사거리에서 시장 쪽으로 5분 거리에 있다고 했다. 세정의 집은 시장 뒷길로 10 분 쯤 들어간 주택가에 있었다. 그녀는 시장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갑자기 늘어난 술집들의 휘황한 네온이 즐비했다. 무슨 스탠드바니 카페니 하는 유흥업소가 이 변두리 동네의 사거리를 빠르게 잠식하고 있었다. 그녀완 별 상 관이 없지만 밤이면 살아나는 이 퇴폐적인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 하루빨리 아 파트로 이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손목 시계를 불빛으로 끌어내 들 여다보았다. 10시 반. 엄마가 초조히 기다리실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놓고 돌아다니느라 조금 늦는다는 전화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때 사거리에서 주택가 쪽으로 난 건물 모퉁이에서 눈에 익은 전경 버스가 보였다. 그 버스는 매일 저 녁이면 으레 그곳에 정차해 있는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한 명의 전경이 버스 앞 쪽에 부동 자세로 서 있었고 두어 명이 옆에서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아마도 버스 안에는 전경들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누워 자거나 잡담을 하며, 그 버스 는 50미터쯤 떨어져 있는 한 여당 국회의원의 사무실 때문에 노상 대기하고 있 는 차량이었다. 대학생들이 걸핏하면 그 사무실에 화염병과 돌을 던지고 달아나 기 때문에 여차하면 출동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그런데 오늘은 뒤쪽으로 한 대 의 버스가 더 서 있었다. 게다가 웬 젊은이를 세워 놓고 그의 가방을 뒤지고 있 는 사복 경찰의 모습도 보였다. 세정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자기처럼 젊은 여자의 늦은 귀가는 그들로부터 보호를 받으면 받았지 의심받을 하등의 이 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발이 떼어지질 않았다. '오늘이 고비'라고 한 인환의 말이 떠올랐다. 그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고윤의 소재가 알려졌다면 막바로 인환의 집으로 들이닥치면 될 텐데 왜 버스까지 줄지어 대놓 고 있는 것일까? 세정은 발걸음을 데려다 다시 멈추었다. 그 곁을 지나다가 자기도 모르게 '난 몰라요', '난 아무 상관이 없어요.'하고 소리칠 것만 같았다. 맘 편히 뒷길로 가자 는 생각이 들었다. 주유소와 기사 식당을 코너로 돌면 그녀의 집으로 돌아가는 뒷길이 있었다. 그녀는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길은 건너 동네와 사이를 두 고 흐르는 넓은 개천을 끼고 있었다. 코너를 돌아서자 뿌연 달빛을 머금은 길이 한없이 뻗어 있는게 보였다. 그리 늦은 시각 같지도 않은데 사람 자취가 전혀 없었다. 길의 중간쯤을 둥그스름하게 밝히는 외등도 왠지 썰렁했다. 으스스한 느 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다시 행길로 나가기도 싫고. 그녀는 온몸에 돋은 소름을 후르르 떨구기라도 할 양으로 빠른 걸음을 내닫기 시작했다. 길다 란 그림자가 그녀를 앞서 걸었다 둑 아래 개천을 흐르는 물소리와 풀벌레소리가 섞여 왔다. 꽤 넓은 개천 양쪽으로는 반듯반듯한 돌을 쌓아 경사지게 만든 둑이 있었다. 여름이라 길에서 개천까지 경사진 곳에 풀이 제법 무성했다. 주택가의 창문에서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어느 집의 불 끈 창문으로는 연속극 소 리와 함께 푸르스름한 TV의 불빛이 밝았다 어두워졌다 하면서 방안을 물 속같 이 비추고 있었다. 작년만 해도 밤이면 평상을 길까지 내다 놓고 바람을 쐬는 동네 사람들이 노상 보였는데 그리 늦지도 않은 시각에 길이 너무 조용하다 싶 었다. 외등 불빛이 가까워졌다. 밝은 불빛 속으로 하루살이들이 떼를 지어 바글 대고 있었다. 그녀가 불빛으로부터 시선을 돌리자 바로 그 아래 컴컴한 담벼락 에 비스듬히 서 있는 남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몸을 꼰 채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소름이 전신을 ㅎ고 지나갔다. 깊게 빨아들이 는 담배 불빛에 남자의 표정이 잠깐 드러났다. 조금 웃는 듯했다. 그제야 개천 길로는 절대로 다니지 말라던 엄마의 당부가 번갯불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얼마 전 이 개천 수풀 속에서 초등학교 다니는 여자아이가 강간을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는 것이다. 시국 치안 때문에 민생 치안은 뒷전이라는 신문 사회면의 머릿글자가 확대되며 떠올랐다. "이거 봐." 어느새 남자가 세정의 뒤쪽에 찰싹 달라붙어 와 있었다. 고개를 돌리려는 순 간 반짝 하고 빛나는 칼이 그녀의 블라우스 한쪽을 누르고 있는 게 보였다. "우리 저어 쪽으로 좀 갈까?" 남자에게서 소주 냄새가 났다. 그가 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리 고 부드러운 시폰의 블라우스 소매를 세게 움켜쥐고 주물렀다. "왜, 왜 이래요?" "소리내지 마. 죽어." 남자의 숨 가빠오는 목소리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지 않아도 그녀는 이 미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아, 소리만 해도 칼이 여지없이 파고들 것만 같아 서였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칼끝이 이미 블라우스의 슬립을 뚫고 맨살에 닿아 있었다. 마른 풀잎과 무릎까지 오는 잡초가 우거져 있는 수풀 더미까지 그녀는 안기다시피 실려 내려왔다. 멀리 개천 건너 지은 지 얼마 안되는 고층 아파트의 불빛이 보였다. 물 흐르는 소리와 풀벌레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외등 불빛은 흔 적도 없이 사라지고 달빛조차 지워져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개천 건너 찻 길에서 버스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돈, 돈 있어요. 다 가져가요. 아악?" 비명을 지르느라 떨린 목젖 아래로 칼이 파고들었다. 동시에 남자가 한 손으 로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난 지금 기분이 굉장히 나빠. 그러니까 기분 좀 풀어줘야겠어. 벗어." "제발." 어둠이 한 꺼풀 지워지고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소리치지 마. 쳐 봤자 여긴 아무도 없어. 경찰이나 방범 따위도 없어." 그 순간 길가에 서 있던 전경 버스들이 떠올랐다. 그건 그렇게 위세도 당당히 거리를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이 뒷길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바보들같이.... 고윤이 그 큰길로 다닐 것 같애? 울음이 삐져 나왔다. 남자가 칼 날을 세우고 그녀의 목덜미를 살짝 그었다. "제발 살려...." "누가 괜히 죽인대?" 옆에서 바스락대던 풀들조차 남자의 기세에 눌려 소리를 멈추었다. 그녀가 수 풀 사이로 넘어졌다. 남자가 칼끝으로 그녀의 목을 누른 채 스커트를 젖히고 속 옷을 벗겨 내렸다. 그녀는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있는 힘을 다해 삼켰다. 안 돼! 소릴 지르겠어! 1센티미터 아래 죽음이 있었다. 1센티미터 건너에 소리 없는 죽 음이 있었다. 소리도 명분도 없는 죽음이. 철커덕, 하고 벨트 풀어지는 소리에 이어 마치 온 세상 어둠의 무게마냥 남자 의 몸이 그녀에게로 덮쳐 왔다. 양 팔꿈치로 그녀의 두 팔을 찍어누른 채 몸을 거세게 움직이면서도 남자는 뱀처럼 얼굴을 치켜들고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 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이빨이 보이고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기분 나쁜 웃 음과 소주 냄새와 짐승의 헐떡거림이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안경은 이미 어디론가 달아나고 없었다. 남자의 몸이 활시위처럼 팽팽히 당겨지더니 진저리 를 쳤다. 칼은 이미 미친 개마냥 요동을 치던 남자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고 없 었다. 남자가 몸을 천천히 뗐다. 그제야 하늘의 벌이 보였다. 그것도 무수히 많 이. 마치 그 누군가가 칠성판 위에서 보았을 것 같은 반짝이는 별들이. 그녀는 벌어진 다리를 겨우 모으고 한쪽 발목에 걸쳐져 있는 속옷을 끌어올리 려 애썼다. "난 좀 더 마셔야겠어." 남자가 그녀의 백을 열고 거꾸로 들어 털었다. 소지품들이 떨어졌다. 남자가 그녀의 지갑에서 돈을 꺼내 가슴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백화점 포장 지에 싸인 목걸이를 꺼냈다. 남자는 줄을 늘어뜨려 보더니 풀밭으로 휙 던졌다. 그리고 일어섰다.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 마. 그럴 때도 있는 거야. 또 보자." 남자의 개운하게 웃는 소리가 그녀의 숙인 머리 위로 떨어졌다가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개천 건너편 길가로 달리는 버스며 차들이 보였다. 아직도 그녀의 목 에 금방이라도 파고들 듯한 칼끝의 느낌이 화끈거리며 남아 있었다. 그녀는 수 풀 사이로 헤쳐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목걸이가 보이지 않았다. '순금은 아닌데, 뭐....' 텅 빈 머리 속으로 술지게미 같은 상념이 떠오르다 말다 했다. 전화번호가 적 힌 종이 쪽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뻐근한 아랫도리를 이리저리 끌며 한참 을 뒤져 그것을 수풀 사이에서 찾아냈다. 남자가 가면서 밟아서인지 한쪽에 구 두 뒤축 무늬가 찍혀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쪽지에 쓰인 전화번호를 오랫 동안 바라보았다. 이제 이 뒷길과 이 수풀은 그녀와 관계가 있었다. 안경과 18k 목걸이와 30여 년 간 일없이 묵혀온 순결을 잃었다. 이 모든 것이 죽음의 1센티미터 앞에서 만 난 공포 때문일까? 그녀는 종이를 움켜쥐었다. 그 쪽지에 묻어 있던 공포는 이 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일곱 자리 숫자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는 수많은 면도 칼들 사이로 손을 비집고 넣으려다 베일 것 같던 그 공포심은 사라지고 없었다. 일곱 개의 숫자에 1센티미터쯤 다가가 있는 것은, 그건 아직도 법이 아니라 폭 력이었다. 그리고 그 일곱 개의 숫자는 아직도 불온이나 불순이 아니었다. 그것 이 지금 어떤 불온을 향하는 한 시점에 있는지는 몰라도 법을 향하지도 않는 폭 력보다는 보호받을 가지가 충분히 있었다. 지금의 그녀에겐 더욱 그랬다. 흐르는 개천물 소리를 들으며 입을 벌리고 앉아있는 그녀에겐.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세정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최 교수로부터였다. 아 끼던 난을 하나 주겠다는 것이었다. 아까 낮에 난을 가지고 준다 안 준다 한 것 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잘 키워요. 보춘화라는 건데 정 선생 이미지에 딱 맞아. 닮았다구." "정 주시려면 학교에 있는 걸 그냥 주세요." "그거? 그건 시들한걸. 시원치 않아. 최루 가스 때문에." "한 번 키워 보죠, 뭐." 그리고 세정은 한 통의 전화를 걸었다. 인환의 집에였다. 11시가 훨씬 넘었는 데도 다행히 고윤은 아직 그 집에 있었다 인환이 조금 과장을 하긴 한 모양이었 다.